1953년 4월 생물학을 전공한 왓슨과 물리학을 전공한 크릭의 절묘한 만남으로 DNA 이중나선구조에 관한 논문이 발표됐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2003년 4월 14일 국립인간게놈연구소(NHGRI)는 인간게놈 염기서열을 99.99% 해독했다고 발표했다. 인간의 DNA가 담고 있는 31억2천만개 염기서열의 유전자 정보지도가 완성된 셈이다.
그러나 6개국 18개 기관에 속한 수많은 과학자들이 수십억달러가 넘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가면서 1990년부터 노력해 이뤄낸 이 업적은 사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에 대한, 즉 인간의 생명현상 이해에 대한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이 요즈음 과학계의 중론이다. 때문에 종종 인간게놈지도의 완성은 로제타스톤의 발견에 비유되기도 한다. 생명의 설계도를 가지게는 됐지만 설계도가 워낙 난해한 언어로 쓰여있어서 이제 언어를 해독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게놈프로젝트에서 밝혀낸 인간의 유전자 수는 약 3만개로, 그동안 미뤄 짐작했던 10만개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숫자다. 3만개면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인간보다 훨씬 단순한 식물 중에도 약 2만5천개의 유전자를 보유한 종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과연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탁월하게 뛰어난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결국 인간은 우리가 믿고 있는, 아니 믿고 싶어하는 만큼 그렇게 복잡하고 정교한 존재가 아니거나, 또는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복잡성을 결정하는 것이 유전자 수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생명의 복잡성은 네트워크에서 비롯
사실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유전자 자체가 아니다. 각각의 유전자에는 단백질을 합성해내는 공식이 담겨있고 이 단백질 분자들이 수만개의 다른 단백질 및 기타 물질과 복잡한 연결망을 구성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상호작용함으로써 심장이나 뇌, 간 같은 우리 몸의 여러 기관들이 형성되고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몸을 포함한 생명현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무엇보다 우리 인간이 유전자 수에서 큰 차이가 없어보이는 식물들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단백질과 여러 물질의 연결망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국 인간의 정교함과 복잡함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 수가 아니라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 간 전체 연결망의 정밀한 설계구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현상의 유지와 조절은 유전자, 단백질, 그리고 여러 물질로 구성되는 전체 네트워크, 즉 생명체 복합네트워크(bio-complex network)에서 기인된다. 따라서 인간 생명현상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생명체 복합네트워크를 통합적으로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인간을 비롯한 많은 생명체 속에 존재하는 물질들의 연결구조망은 어떻게 생겼을까.
단세포 박테리아인 대장균처럼 단순하기 짝이 없는 유기체조차도 5천개에 가까운 유전자가 서로 얽혀 대단히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유전자들은 간략히 말해서 작고 길쭉한 DNA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상황에 따라 on 또는 off 상태에 있다. on 상태인 유전자는 다른 세포기관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단백질을 만들어내고, 이 단백질들은 대장균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막을 구성하거나, 대장균이 먹이를 찾거나 위험을 느끼는 등의 일을 할 때 감지기 역할을 한다. 또 대장균 내부의 각 부분들이 신호를 주고받을 때에도 이용된다.
한편 유전자는 대장균이 영양분의 섭취, 소화과정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여러 생화학 반응을 조절하는 효소 단백질도 생산한다. 이 모든 것들로 이뤄진 생체내 연결망은 아주 정밀한 결합을 통해 박테리아가 세포내의 생화학적 균형을 유지해나가며 생존하고, 세포분열을 통해 성장하며, 더 나아가 번식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현상의 복잡성은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생물학적 연결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세포 내 허브 물질인 ATP
하지만 재미있게도 최근 필자(정하웅)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엄청나고 복잡한 생체내 연결망도 그 기본 구조만을 따로 떼어놓고 살펴보면 인터넷이나 월드와이드웹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흥미로운 연관관계가 있음이 밝혀졌다.
세포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명현상을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해 우리 몸 속의 각종 생화학 물질 분자들을 네트워크의 점(노드)으로 찍는다. 그리고 세포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한 몸 속의 여러 생화학반응에 함께 참여하는 분자들 사이에 서로 연결고리(링크)를 만들어준다. 이 연구에서 필요한 실제 생화학반응 자료로는 미 아르곤 국립연구소의 전산생물학 그룹에서 운영하는 WIT(What Is There?, http://wit.mcs.anl.gov/ WIT2)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대장균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유기체 43가지의 신진대사망(몸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화학반응들을 이어놓은 연결망)을 이용했다.
그 결과, 필자는 생명체 내부의 연결망이 항공망을 닮은 척도없는 네트워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과학동아 2003년 2월호 참조). 즉 소수의 분자들이 많은 수의 연결선을 지닌 허브 역할을 하면서, 대부분의 다른 분자들에 비해 훨씬 많은 반응에 참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포의 에너지 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ATP(Adenosine TriPhosphate)나 물(H2O), 이산화탄소(CO2) 같은 분자들이 세포 네트워크 내의 핵심을 구성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척도없는 네트워크에서 허브가 차지하는 위치는 너무나 중요하다. 때문에 이 허브가 파괴되면 네트워크는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인터넷이나 월드와이드웹 같은 정보통신 네트워크의 경우 허브에 대한 전체 네트워크의 심각한 의존도가 지난 1월 인터넷 대란에서 확인된 바 있다. 허브는 전체 네트워크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세포내 신진대사망에서 발견되는 척도없는 네트워크의 구조는 그렇게 나쁜 뉴스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런 성질이 오히려 신약 개발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진대사망에서 연결중요도가 가장 큰 물질을 제거하면 생물체에서 신진대사가 활발히 일어나지 못하게 돼 결국 생물체는 죽게 될 수 있다. 따라서 바이러스가 어떻게 생물체 내 신진대사망에 관여하는지를 알게 된다면,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질병을 효과적으로 치유하는 백신을 개발할 수 있다. 게다가 이같은 방식으로 신약을 개발한다면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부작용도 미리 예측할 수 있다.
한편 인터넷과 마찬가지로 척도없는 네트워크의 구조를 가지는 신진대사망은 인터넷과는 다른 흥미로운 점을 하나 갖고 있다. 그것은 네트워크의 크기, 즉 구성성분(노드) 수에 상관없이 각 노드 간의 평균거리가 3으로 일정하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같은 정보통신 네트워크는 그 크기가 커질수록 각 노드 간을 잇는데 필요한 연결거리가 로그함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신진대사망은 생명체의 종류나 크기에 상관없이 그 평균거리가 약 3으로 일정했다. 이는 임의의 한 물질로부터 원하는 다른 물질을 생성하기까지 평균적으로 약 3번의 생화학반응만 거치면 충분하다는 말이다. 생명체가 외부 환경의 변화나 질병에 적응하기 위해 급히 특정 물질이 필요할 경우 3번의 생화학 반응만으로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생명체가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개체가 커지고 네트워크의 구성요소가 많아져 복잡해짐에도 불구하고 인터넷과는 달리 이 평균 반응과정 수를 3으로 일정하게 유지시켜 왔기 때문에 이제껏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효모의 0.7% 단백질이 생존의 핵심
연구가 많이 이뤄지는 생명체 내 또다른 네트워크는 단백질 상호작용 네트워크다.
단백질은 홀로 한가지 작용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단백질들과의 반응과 협동과정을 통해 여러 생명작용을 한다. 맥주나 빵을 발효시키는데 사용되는 균으로 잘 알려진 효모(Saccharomyces cerevisiae)는 1996년 유전자지도가 이미 완성돼 16개의 염색체와 약 6천2백개 유전자의 존재가 잘 밝혀져 있다. 그러나 맥주효모의 내부에 존재하는 생명체 복합네트워크는 이 유전자들이 생산하는 분자인 단백질 차원에서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맥주효모의 경우 효모 단백질 상호결합(yeast two-hybrid system)이라는 방법을 통해 각각의 단백질들이 어떤 단백질과 결합을 하는가에 대한 정보를 쉽게 대량으로 얻을 수 있다. 이같은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효모의 단백질 상호작용 네트워크의 지도를 얻을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 네트워크가 척도없는 네트워크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생명체 네트워크의 특징을 좀더 알아보기 위해 필자(정하웅)는 특정한 단백질을 효모로부터 제거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단백질을 차례로 제거하면서, 해당 단백질의 연결정도-네트워크 내에서 연결선 수-와 그것의 제거에 따른 결과를 비교·관찰했다.
결과는 꽤나 놀라웠는데,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는 단백질 중 90% 이상이 5개 이하의 연결선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서 5개 중 1개만이 효모가 살아나가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나머지 단백질들은 세포 내에서 제거돼도 남은 네트워크를 조정함으로써 여전히 생존을 위한 기능을 수행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전체 단백질의 0.7%에도 못미치는 적은 수의 허브 단백질들은 15개 이상의 연결선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들의 2/3 이상이 하나라도 없으면 효모의 생존에 치명적인 결과를 준다. 결국 우리는 ‘효모의 단백질 상호작용 네트워크에서 많은 연결선 수를 가지고 핵심 역할을 하는 허브 단백질들이 개체의 생존에 미치는 영향력은 연결고리가 몇개에 불과한 대부분의 단백질에 비해 3배 이상 높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세포내 구조에 대한 이해를 좀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심화시키며, 생명체 네트워크의 서로 다른 다양한 부분이 지니고 있는 상대적인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또한 실용적인 면에서도 그 유용성을 찾을 수 있는데, 허브 역할을 하는 단백질을 신약 표적으로 설정해 공략할 경우, 박테리아와 기타 병원균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주어 질병을 치유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좁은세상 이루는 고립된 먹이사슬망
생명체의 복잡한 연결망은 그 내부뿐 아니라 개개의 생명체 간에도 존재한다. 먹이사슬이라고 불리는 생태계가 바로 그 예다. 누구를 먹고 누구에게 먹히느냐에 관한 연결관계를 나타내는 먹이사슬망은 그 자료를 얻는 일이 쉽지 않아서 극히 제한된 지역, 예를 들어 고립된 호수와 같은 지역의 자료만이 알려진 상태다.
드물지만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뤄진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먹이사슬망은 그 연결구조가 단순할 것이라는 기존의 예상과는 달리 각 종들이 꽤나 서로 복잡하고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서 평균적으로 단지 2단계만에 서로 연결이 되는(즉 서로 먹고 먹히는) ‘좁은세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최근 들어 생태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좀더 크고 엄청나게 복잡한 연결망을 눈앞에 두고 그 연구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한 예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바다표범-남방대구 네트워크다.
이곳의 수산업계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서부 해안에 서식하는 바다표범의 수를 줄이면 가격이 비싼 남방대구의 어획량이 늘어서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어왔다. 바다표범이 주로 남방대구를 잡아먹고 사는 것이 사실이므로 그들의 주장에는 무시 못할 수학적인 논리가 담겨있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이 상황을 살펴보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바다표범과 남방대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서해안에 살고 있는 여러가지 수산생물들이 이루고 있는 먹이사슬망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상어는 남방대구와 바다표범을 함께 잡아먹으며, 또 바다표범 역시 상어를 잡아먹기도 한다. 이러한 전체 먹이사슬망의 연결관계를 무시하고 바다표범과 남방대구 달랑 둘만을 떼어내서 생태학적 간섭을 예측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캐나다 겔프대 생태학과 교수인 피터 요지즈 박사는 바다표범 개체 수에 변화가 일어날 경우, 남방대구의 개체수는 그 중간에 개입된 2억2천5백만가지가 넘는 여러 관련 종들에 의한 도미노 연쇄 상호작용을 통해 결정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따라서 남방대구를 잡아먹는 바다표범을 제거하는 것이 직접적으로 남방대구의 숫자를 늘릴 것이라는 예측은 어찌보면 무모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간에 개입한 다른 여러 생물들에 의한 영향으로 오히려 숫자가 줄어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다표범-남방대구 네트워크는 생태계의 엄청난 복잡성을 보여주는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밖에도 복잡계에 대한 우리의 무지로 인해 재앙을 자초할지 모르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지질학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 최소 다섯번 정도의 대규모 재앙이라 일컬을 만한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전세계 모든 종의 50% 이상이 갑자기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최근 들어 인류가 지구 환경을 훼손시킴으로써 스스로 여섯번째의 재앙을 초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또 무엇보다 만일의 사태를 피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당연히 복잡한 생태계 네트워크의 작동원리를 잘 파악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