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월 한국의 한보철강이 도산하면서 동남아의 경제부도 사태가 시작됐다. 곧이어 2월 태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솜프라송’이라는 재산관리회사는 3백11만달러의 부도를 내고 만다. 3월 태국 정부는 급격히 악화되는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에 39억달러의 원조를 요청했으나 IMF의 캉드시 총재는 사태가 더이상 진전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이를 기각하고 만다. 후일 캉드시 총재는 태국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장될지 몰랐다고 후회했다. 태국 사태 후 한국의 삼미철강이 은행관리 체제로 들어갔다.
1997년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경제 위기
이같은 일련의 사태 탓에 일본의 엔화 가치가 하락했고, 일본 관리는 엔화의 은행 이자율을 높이겠다는 암시를 주었지만, 외환의 불안정은 풀이 죽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움직임이 세계 투자자에게 동남아 금융가의 불안요인으로 인식돼 동남아 여러 나라들의 화폐를 파는 사태로 이어졌다. 5월 14-15일 태국의 바트화는 동남아의 경제 위기를 감지한 외국 외환딜러의 재빠른 행보로 폭락 사태를 맞게 된다. 또 7월 한국의 기아자동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된다.
7월 2일 태국의 중앙은행이 바트화의 불안정을 극복하기 위해 IMF에 지원을 요청하고, 바트화의 가치를 15-20% 평가절하하기로 결정하면서 동남아 경제위기 사태는 급속히 악화됐다. 뒤따라 필리핀, 말레이시아도 자국화폐의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이후 인도네시아 화폐도 위기를 맞이했고, 싱가포르에도 이와 같은 사태가 뒤이었다. 12월 1일 세계 11대 경제 대국인 한국은 IMF 경제위기 사태를 맞이했고, IMF 역사상 가장 큰 5백50억달러를 원조받기로 결정했다.
중앙은행은 금융네트워크의 허브
IMF 경제위기를 되돌아보면 세계 경제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의 영향을 받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IMF 경제위기에 대해 무차별적인 재벌의 확장 정책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경제블록의 측면에서도 이해해야 한다.
IMF는 이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중앙은행에 긴급자금을 지원했다. 각 나라 회사들의 도산 사태가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고, 이 사태는 연결선을 제일 많이 갖는 네트워크의 허브를 거쳐 전파된다. 때문에 도미노 현상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네트워크의 허브가 쓰러지지 않도록 허브인 중앙은행에 자금을 넉넉히 지원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나라도 IMF 자금과 공적자금을 조성해 회사들의 연쇄 도산을 막았으며, 이와 함께 회사들의 통폐합을 실시했다.
금융 네트워크는 영향력이 매우 큰 허브인 중앙은행이 존재하고 뒤따라 은행과 단자회사들이 있으며 가장 작은 가계가 있는 구조를 가진다. 또 몇개 가계의 도산은 전체 네트워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연결선이 많아 영향력이 큰 은행의 도산은 파급효과가 매우 커 전체 금융 네트워크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렇다고 가계들의 도산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많은 가계들이 동시에 도산하는 경우가 몇 은행의 도산보다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경제가 위축돼 많은 가계가 도산되면 금융 네트워크를 잇는 연결선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즉 네트워크가 성긴 구조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이 심해지면 금융 네트워크는 급기야 군대식의 방사형 네트워크 구조를 띠게 된다.
GDP 클수록 연결선 많아
방사형 네트워크는 중심의 최고 사령관으로부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구조다. 최고 사령관이 모두 지휘하기 때문에 한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이동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방사형 네트워크는 안정성 면에서 매우 취약하다. 실제로 한 사회학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IMF 사태 전 한보그룹은 계열회사 간의 지분공유 네트워크의 구조는 방사형이었다. 금융에서는 네트워크 구조의 단순함이 더욱 큰 피해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금융 네트워크에서 경제 활동과 연결선 수의 관계는 2003년 스페인 바르셀로나대 물리학과 연구팀의 연구결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연구는 2000년도 국제연합(UN) 통계청의 무역거래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했다. 연구팀은 세계 1백79개국 간의 무역량을 토대로 상호 수출입이 있으면 연결선을 이어 국가간 무역 네트워크를 완성했다.
그 결과 한 나라는 평균적으로 대략 43개국과 교역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국가 간 무역 네트워크는 척도없는 네트워크에 속했다. 척도없는 네트워크는 다수가 적은 연결선을 갖고 소수의 허브가 많은 연결선을 갖는 구조를 띤다. 이와 함께 연구팀이 발견한 흥미로운 점은 각 나라의 연결선수와 그 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관계였다. 대부분의 경우 연결선의 수가 많은 나라일수록 1인당 GDP가 많고, 연결선 수가 작을수록 1인당 GDP가 적다. 연결선 수와 1인당 GDP가 큰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 등이었다. 이와 반대인 연결선 수와 1인당 GDP가 적은 나라는 앙고라, 소말리아, 르완다 등이었다.
물론 이 규칙에 따르지 않는 예외적인 나라도 있다. 연결선의 수는 적지만 1인당 GDP가 큰 나라로는 노르웨이, 아이슬란드가 있는데, 이들 나라는 석유를 생산하면서 1인당 GDP가 높아진 것이었다. 반대로 연결선의 수는 많지만 1인당 GDP가 적은 나라로는 브라질, 중국, 러시아가 있었다. 이들 국가는 인구가 많아서 1인당 GDP가 적은 것이다. 이 연구는 경제활동에서 연결고리의 다변화가 경제활동을 촉진시키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중요한 일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식시장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국가간 무역처럼 눈에 보이는 거래뿐 아니라 금융 네트워크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망도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예를 증권시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 주식이 대표주로 통한다. 삼성전자의 주식가격은 곧 삼성계열의 주식, 예를 들어 삼성 SDI 주식가격에 영향을 미치고, 또 삼성전자의 주식가격은 종합주가지수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다른 주식 가격에도 영향을 준다. 이처럼 기업 간에 직접 투자나 거래가 이뤄지지 않아도 주식시장에서는 보이지 않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이런 점을 밝히고자 최근 경제물리학자들은 S&P500에 속하는 기업의 주식가격이 서로 다른 회사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그래프로 분석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이들은 두 주식가격의 변동이 서로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계수를 구해, 상호연관성이 큰 두 회사를 연결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기업간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연구결과 주식시장에는 척도없는 네트워크와 같이 영향력이 매우 큰 소수의 주식이 존재해 주가의 요동현상을 주도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삼성전자 주가의 변화가 우리나라의 종합주가지수를 결정하는 주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세계의 5백대 주요기업 주식들의 가격 변화도 주도 주식이 존재해 나머지 주식시세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한편 지난해 10월 일본 니케이 신문사가 주관한 세계경제물리학회에서는 어떤 주식의 가격변동을 좇아 오르내리는 동반 주식들을 그래프로 나타내, 주도 주식의 가격 변동이 다른 주식들의 가격에 어떤 순서로 전파되는지를 설명하려는 연구가 발표돼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처럼 최근에는 주식에 대해 네트워크 방법으로 이해하려는 연구경향이 등장하고 있다.
또다른 연구를 통해 사회 네트워크에서 잘 드러난 좁은세상 현상이 복잡한 금융 네트워크에서도 나타난다는 것도 밝혀졌다. 회사들은 상호투자나 일방적 투자를 통해 연결되기도 하지만, 사외이사 제도를 통해 링크된다. 즉 한 사외이사가 다른 두 회사에 몸담고 있어서 그 두 회사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최근 세계적 경제지인 ‘포춘’은 1천개 회사에 소속된 7천6백82명의 사외이사들에 대한 네트워크를 발표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약 79%의 이사들이 한 회사에만, 14%가 두개의 회사에, 7%가 셋 이상의 회사에 소속돼 있었다. 또한 7천여명으로 구성된 사외이사 네트워크는 평균 4.6명만 악수하면 모든 이사를 알게 되는 좁은세상이었다.
이 네트워크에 속해있는 대표 인물에는 미국 클린턴 대통령 스캔들 사건에서 르윈스키의 변호를 맡았던 조르단 변호사가 포함돼 있다. 그는 10개사에 소속돼 있고, 그 회사의 다른 1백6명의 사외이사와 연결돼 있다. 조르단 변호사는 사외이사 네트워크의 허브임에 틀림없다.
사외이사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타 회사의 좋은 제도를 공유한다. 또한 회사는 영향력이 많은 사람들을 영입함으로써 이들 사외이사를 통해 기업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영향력이 많은 사람들은 더욱 많은 회사의 사외이사에 참여하게 되며, 그 영향력을 확산하게 되는 부익부 현상이 일어난다.
전자상거래의 새로운 경제패턴
최근 10년 동안 우리들 생활에 큰 변화를 몰아온 인터넷은 경제활동에서도 전자상거래라는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냈다. 공간적인 제약이 사라지고 정보가 공개된 상황이기 때문에 공급과 수요자 간의 최적화된 거래가 일어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인터넷 경매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경매 사이트, 이베이의 경매 기록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전자상거래에 대한 연구논문도 발표됐다. 이 연구는 인터넷에서 다수의 수요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협동현상으로 표출되는 경제패턴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연구를 통해 경매에서도 전문 입찰자가 존재해 입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문 입찰자는 한 경매품에 대해 여러 차례 입찰을 하면서 동시에 다른 많은 경매품에 대한 입찰에도 참여한다.
한편 이 연구는 같은 경매품의 입찰에 참여하는 거래자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고 가정하고 거래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네트워크를 분석했다. 그 결과 경매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네트워크도 척도없는 네트워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경매의 상거래에서 주도 세력이 존재할 뿐 아니라 이 주도 세력이 낙찰 가격 등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자상거래의 또하나의 예로 인터넷 서점을 들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서 책을 구입한 사람들은 ‘무슨 책이 신간으로 나왔으니 구입 바랍니다’라는 신간서적 소개 e메일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e메일을 열어보면 자기에게 매우 필요한 신간이 나온 것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아 구매 충동이 생긴다.
네트워크 이론으로 효과적 경제 활동
아마존에서 이같은 e메일 서비스를 할 수 있는 것은 네트워크를 활용한 덕분이다. 평소에 같은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을 네트워크로 구성하고, 유사한 주제를 가진 책들을 서로 링크시켜놓는다. 이를 기반으로 신간이 출판됐을 때 어떤 고객이 이 책을 구입하면 이 사람과 링크돼 있는 고객들에게 홍보함으로써 판촉효과를 높인다. 소비자는 아마존에서 오는 e메일은 자신에게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을 경험상 신뢰하기 때문에 e메일을 열어보게 되고, 구매 충동을 느끼게 된다. 네트워크 이론을 활용함으로써 별로 큰 투자 없이도 판촉효과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나라의 대형 온라인 서점에서는 새로 나온 책들은 모두 모아 회원 모두에게 e메일을 정기적으로 뿌린다. 이 경우에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필요 없이 신간에 대한 정보를 받게 되고 이를 거듭할수록 e메일에 대한 신뢰도를 의심하게 돼 열어보지도 않고 지우게 된다.
최근 네트워크 이론을 이용하면 경제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차츰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네트워크를 이용한 금융 네트워크의 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일 뿐이다. 앞으로 네트워크 이론이 경제활동에서 더욱 중요시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