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그 해의 획기적인 과학 업적을 발표해온 세계적 과학전문지 ‘사이언스’는 2002년의 ‘10대 하이라이트’를 선정, 지난해 12월 20일자 지면에 소개했다. 발표 결과, 최고의 성과는 의외의 후보에게 돌아갔다. 분자 연구에 있어 그동안 DNA에 가려 과소 평가돼온 RNA연구가 영예의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유전’하면 DNA를 떠올렸다. DNA는 세포 내에서 단백질의 아미노산 배열을 결정, 유전형질을 만들어내는 주역으로 알려져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RNA는 DNA의 활동을 돕는 ‘수행비서’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의 생명과학은 RNA가 각종 생명현상에 직접적으로 관여해 생명을 주관하는 핵심분자라는 사실을 하나씩 밝히고 있다. RNA가 DNA 못지 않게 생명현상의 여러 단계에서 다양한 역할을 한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으며, RNA가 생명의 기원 물질일 것이라는 이론도 강력히 제시되고 있다. 더 나아가 RNA는 암과 에이즈 등의 난치병 치료제와 진단제 등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공학 산업의 도구로서 급부상하고 있다.
DNA와 단백질 잇는 가교 그 이상
DNA 구조가 밝혀진 직후 과학자들에게 RNA는 단지 DNA가 갖고 있는 유전정보로부터 실제 생명현상의 표출에 관여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에 중간 매개체로 작용하는 정보전달자로서의 역할로만 인식됐다. 이는 1958년 크릭에 의해 처음 주장됐는데, 그는 세포 안에 핵이라는 세포 소기관을 가진 진핵세포의 경우 유전물질인 DNA는 핵 안에 존재하는 반면 단백질은 핵 밖의 세포질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근거해 이같이 주장했다. 즉 DNA에 내재돼 있는 유전정보로부터 단백질을 형성하기 위해선 두 분자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다른 분자가 필요하며, 이런 정보전달체로 작용하는 분자가 바로 RNA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 가설로부터 크릭은 DNA라는 핵산 분자로부터 마치 인쇄물을 만드는 것과 같은 전사과정에 의해 우선 DNA와 유사한 핵산 분자인 RNA가 합성되며, RNA로부터 흡사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과 같은 해독과정에 의해 아미노산이 중합돼 단백질이 합성된다는 ‘센트럴 도그마’(Central Dogma) 개념을 정립했다. 이 학설은 HIV(에이즈 바이러스)와 같이 RNA를 유전자로 갖고 있는 바이러스들을 제외하곤 생명체의 유전자 발현과정의 일반적인 현상을 설명해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세포 내 유전 정보에 관여하는 RNA로는 DNA의 염기 배열을 인쇄된 형태로 갖고 있어 단백질 합성 기질로 작용하는 전령RNA(mRNA)와 이 전령RNA의 염기 순서에 해당하는 아미노산을 데리고 오는 운반RNA(tRNA), 그리고 단백질 생산 공장이라 할 수 있는 리보솜의 구성 성분으로 마치 뼈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리보솜RNA(rRNA) 등이 있다.
그러나 실제 세포 내에 존재하는 RNA의 종류는 좀더 다양하다. 조그마한 RNA 조각이 DNA 복제가 시작되기 전에 선도물질로 작용하기도 하며, 텔로머라제의 구성 성분으로서 DNA 복제 후 짧아진 DNA 말단 부위인 텔로미어를 채워주기 위한 기질로서도 작용한다. 그리고 진핵세포의 경우, DNA로부터 생성된 RNA 중 인트론이라는 단백질로 암호화되지 않는 RNA 부위를 절단하는 ‘스플라이싱’이라는 가공과정이 있는데, 이 스플라이싱 과정을 담당하는 ‘스플라이소좀’의 주요 구성성분 또한 조그마한 크기의 RNA다. 또한 다양한 RNA 조각들은 단백질과 결합해 세포 내의 RNA와 단백질 등을 운반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단백질로 암호화되지 않는 마이크로 RNA라 불리우는 짧은 길이의 RNA들이 발견돼 그 기능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런 점은 곧 다양하게 존재하는 RNA가 세포 내에서 단지 유전정보만 전달하는 수동적 역할만 담당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하며 RNA의 기능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급부상하게 된 계기가 됐다.
RNA와 효소의 합성어 리보자임
1982년과 1983년 미국의 체크 그룹과 알트만 그룹은 기존에 알려져 왔던 RNA의 기능적 개념을 뒤엎는 놀라운 결과를 발표했다. ‘테트라하이메나’라는 단세포 원생생물의 리보솜RNA의 일부분과 박테리아의 운반 RNA를 가공하는데 관여하는 ‘RNase P’라는 효소의 일부분(RNA)이 놀랍게도 기존의 단백질만 갖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 왔던 효소의 특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효소로 작용하는 RNA를 RNA(RiboNucleic Acid)와 효소(enzyme)의 합성어로 ‘리보자임’(ribozyme)이라 부른다. 이런 획기적인 발견 이후, 식물을 감염시키는 병원체와 인체의 델타 바이러스 등 다양한 생명체에서 리보자임같은 효소 기능을 가진 RNA들이 속속 발견됐다. 일반적으로 리보자임은 마치 가위와 같이 특정 RNA 염기서열을 인식해 그 부위를 자르기도 하고 또한 이어 붙일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RNA는 어떻게 이런 효소 기능을 할 수 있을까. 효소의 대명사인 단백질은 활성 부위로 작용하는 특정 3차 구조를 갖고 있어 이 부위에 기질을 ‘끼워 맞추는’ 식으로 효소 작용을 한다. RNA도 이처럼 자신이 갖고 있는 염기 간의 결합을 통해 다양하며 복잡한 3차원 구조를 만들며 이 구조를 활성 부위로 이용해 효소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상의 DNA도 염기 간 결합으로 효소 기능을 나타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DNA는 이중 가닥으로 한쪽 가닥의 염기들이 반대편 가닥의 다른 염기와 결합하고 있어 3차원 구조를 만들 수 없다. 이에 비해 RNA는 단일 가닥으로 여기에 붙어 있는 염기들이 동일 가닥 위에 다른 염기와 수소 결합을 통해 특정 구조를 이룰 수 있다.
이와 같이 RNA가 효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크게 세가지 측면에서 RNA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 첫번째는 생명현상에 있어 RNA의 기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즉 RNA가 기존에 알려진 유전 정보의 수동적 전달체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단백질과 같이 효소 기능을 가짐으로써 매우 능동적으로 유전자 정보 발현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추측은 이후에 리보솜RNA의 일부가 단백질 생성을 위해 필요한 아미노산 연결 과정에 참여하는 효소 기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 밝혀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스플라이소좀을 구성하는 짧은 길이의 RNA 역시 효소 활성을 통해 스플라이싱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이런 추측은 유전자 발현 시 RNA의 편집 과정에도 RNA가 관여한다는 보고로부터 사실로 인정받고 있다.
최초 생명물질의 강력한 후보
두번째는 생명의 기원 물질로서 RNA가 강력한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유전 정보 저장체인 DNA나 그 발현 산물인 단백질은 마치 누가 먼저냐는 닭과 달걀의 논쟁처럼 생명체의 기원으로서 두분자 모두 마땅한 후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DNA는 유전 정보를 갖고 있는 반면 복제를 위해선 단백질에 의한 촉매 작용이 필요하며, 단백질의 경우 효소 촉매 기능은 갖고 있으나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아직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RNA는 유전 정보를 저장할 수 있으며 동시에 효소 활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최초의 생명체는 RNA 형태로 자연 합성된 후 자기복제를 통해 증식하면서 현재의 생명체로 진화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가설이 대두됐다. 이런 모습의 초기 RNA는 이후 유전 정보의 저장자로서 좀더 안정된 형태를 찾았고 아마 DNA가 그 기능을 대체했을 것이다. 그리고 촉매 역할로서는 좀더 효율적이며 다양한 화학반응을 매개할 수 있는 단백질이 그 기능을 대체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가설은 자연계에서 자가복제 기능을 할 수 있는 리보자임이 아직 발견되지 않아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1990년 미 콜로라도대의 골드 박사가 행한 실험을 통해 상황은 바뀌었다. 그는 ‘셀렉스’라는 시험관 내 진화기법을 통해 다양한 기능을 가진 RNA를 실험실 차원에서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1996년 미 매사추세츠공과대(MIT)의 바텔 박사는 비록 인위적 진화기법으로 만든 RNA이지만 놀랍게도 자기복제 기능을 가진 RNA를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이 결과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시험관 내 진화기법은 자연계의 진화 과정을 실험실 내에서 단기간에 압축해보는 것이므로, 기나긴 진화 과정에서 자기복제 기능을 가진 RNA가 출현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실험 이후 생명의 기원 물질로서 RNA의 개연성은 한층 높아졌다.
RNA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마지막은 의학 분야를 비롯한 생명공학 분야에서의 RNA의 효용성, 즉 응용성을 생각하게 된 점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대다수 리보자임의 기능인 특정 표적 RNA의 절단 기능을 이용하면 HIV나 HCV(C형 간염바이러스)와 같이 RNA를 유전자로 갖는 바이러스의 복제를 억제할 수 있는 항바이러스제를 개발할 수 있다. 또한 암세포의 특정 RNA를 잘라 암세포를 죽게 하거나 암 성장에 필요한 영양 공급을 차단할 수 있는 항암제를 개발하려는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필자의 실험실을 중심으로 리보자임 중에 특정 RNA를 잘라낸 후 다른 종류의 RNA를 이어 붙일 수 있는 ‘트랜스-스플라이싱’ 기능을 이용하려는 연구도 진행중이다. 이 기능을 이용하면 마치 분자 수준에서 유전자를 수술하듯 유전병을 유발하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로 수리하거나 질병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로 대체시킴으로써 유전병을 비롯한 여러 인체 질환에 대한 유전자 치료요법이 가능해진다.
이외에도 골드 박사가 개발한 셀렉스 기법을 이용해 다양한 기능의 리보자임이 개발되고 있다. 실험실에서 RNA를 인위적으로 합성할뿐 아니라 표적으로 삼는 특정 분자의 구조에 꼭 들어맞는 최적구조체의 RNA를 설계해 합성한 뒤 선별하는 작업도 이뤄지고 있다. 이같이 만들어진 RNA는 여러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로 응용되고 있으며 나아가 이런 리보자임을 질병 진단제로 응용한 바이오센서의 개발도 한창 진행중이다.
응용 가능성 높은 유전자 억제 기능
지난 2001년 99% 완료된 인간게놈프로젝트의 발표 결과, 기존의 예상과는 다른 놀라운 사실 몇가지가 밝혀졌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 점은 인체가 갖고 있는 전체 DNA 중에서 실제 단백질로 발현되는 유전자의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적은 3만-3만5천개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추정치는 유전자 예상 프로그램의 한계 등 기술적 이유로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인간보다 훨씬 하등한 초파리나 선충류의 유전자 수보다 단지 2배 가량 높은 수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적은 유전자를 갖고 인체의 복잡한 생물학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복잡한 조절 기작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고 예상된다. 즉 DNA의 전사 과정 중 RNA 합성 과정의 조절뿐 아니라 스플라이싱 과정, 전령 RNA의 세포질 이동 과정, 전령 RNA의 번역 과정과 번역 후 성숙 과정의 조절 등 유전자 발현 과정에서 좀더 다양한 유전인자들이 생성돼 복잡한 조절 과정을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최근에 발견된 마이크로 RNA들은 세포 내에서 mRNA와 결합해 특정 유전자 발현을 능동적으로 제어함으로써 다양한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RNA들이 어쩌면 생각보다 적은 수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인체에서 유전자 발현 조절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세계적 유수 저널에 경쟁적으로 발표되고 있는 간섭RNA(RNAi)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간섭 RNA는 21-25개 정도의 뉴클레오티드(nucleotide) 중합체로 이뤄진 길이가 짧은 RNA다. 단일 가닥의 간섭RNA 염기들이 상호 결합된 두 가닥의 간섭RNA를 예쁜 꼬마 선충에 주입한 결과, 놀랍게도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매우 효과적으로 억제한다는 보고가 처음 발표된 이후 그 활성 메커니즘과 응용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간섭RNA 현상이라 불리는 이 작용은 이후 초파리와 식물에서도 발견됐다. 최근 과학자들은 간섭RNA 현상이 생명체의 발생 과정과 외부 병원체에 대한 방어 기작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간섭RNA에 대한 산업적 응용 가능성은 2001년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 투스클 그룹에 의해 최초로 제기됐다. 이 그룹은 간섭RNA 현상이 포유류 세포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이 같은 결과가 발표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즉 간섭RNA를 이용해 인체 세포 및 동물 모델 내에서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하는 많은 결과가 발표되고 있으며, 이 결과들은 곧 특정 유전자의 세포 내 기능 규명과 바이러스나 종양과 같은 인체 질환의 치료제로서 간섭RNA의 응용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최근 발표된 더욱 놀라운 발견은 효모에서 간섭RNA가 유전자가 아니라 염색체의 구조 자체를 변형시켜 유전자 발현 조절에도 관여한다는 사실이다. 이발견은 ‘사이언스’가 2002년의 최고과학업적으로 RNA연구를 지정하는 주요 계기가 됐다. 이는 유전자 발현조절 메커니즘을 유전자 차원뿐 아니라 염색체 구조 변형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필요성을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