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8월 4일 밤 미국 루이지애나주 라파에트시. 한 남자가 여자에게 비타민을 주사하고 있었다. 남자는 위장병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였으며 여자는 같은 병원의 간호사. 둘은 지난 10년 동안 서로 아내와 남편을 속이고 연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남편과 이혼한 간호사는 의사에게도 이혼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얼마 전 결별을 선언한 상태였다. 자신을 떠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그였지만 세번의 임신중절수술 뒤에 낳은 그의 아이가 곁에 누워 있었고 늘 맞던 만성피로 치료용 비타민-12라는 말에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6개월 뒤 재니스 트라한이라는 이 간호사는 혈액검사에서 에이즈 양성반응이 나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됐다. 범인은 바로 전 애인이었던 의사 리처드슈미트였다. 간호사의 변심에 앙심을 품은 이 의사가 자신이 치료하던 에이즈 환자의 혈액성분을 비타민이라고 속이고 주사했던 것. 간호사는 의사를 살인미수로 고소했고 그때부터 지루한 법정공방이 이어졌다. 결국 법원은 2000년 슈미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슈미트는 곧 항소했지만 2002년 3월 4일 대법원에서 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는 징역 5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변호인이나 검사 모두 과학을 앞세워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는 점이다. 법원의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과학은 무엇이었을까. 법정으로 간 과학자들을 만나보자.
DNA 지문으론 감염 경로 밝히지 못해
재판의 핵심은 슈미트가 치료하던 환자의 에이즈 바이러스가 간호사의 혈액 속에서 발견된 에이즈 바이러스와 같은 것인지를 판정하는 것 이었다. 최근 법정에서는 DNA 검사자료가 증거물로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번 재판에서는 DNA 검사자료가 증거물로 제출되지 않았다.
DNA 지문(DNA fingerprint)이라고도 부르는 DNA 검사법은 1984년 영국의 인류유전학 교수인 제프리 박사가 처음 개발했다. 제프리 박사는 사람 근육의 산소 전달 단백질인 미오글로빈(myoglobin)유전자를 연구하던 중 이 유전자 옆에 존재하는 극소위성(microsatellite)부위를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이 부위는 수십-수백 염기쌍이 수만번 또는 그 이상 반복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극소위성은 개인차가 매우 심하다. 다만 일란성 쌍둥이만이 동일하다. 손가락에 있는 지문으로 개인을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극소위성 역시 사람을 유전적으로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DNA 지문이라 부르는 것이다.
제프리 박사는 DNA 극소위성 1개를 비교대상으로 삼았을 때 두 사람이 꼭 같을 가능성을 보일 확률은 3×10-11(3억 분의 1 이하)이며, 2개를 사용했을 때는 5×10-19 이하의 확률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담배꽁초에 묻은 침이나 머리카락, 정액 등에서 DNA를 뽑아내 증폭한 다음 용의자의 DNA와 비교하면 범인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자와 간호사의 혈액 속에 있는 에이즈 바이러스를 DNA 검사와 같은 방법으로 분석해보면 사건은 쉽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사람의 경우 DNA는 수백만년이 지나도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사람에서 발견되는 에이즈 바이러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돌연변이가 일어나 나중에는 다른 바이러스라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유전적 변화가 심하다. 그러므로 환자와 간호사에서 발견된 에이즈 바이러스를 기존의 DNA 지문법으로 조사해보면 같은 바이러스가 아니라는 결과가 나오기 십상이다. 또 사건이 발생한 라파에트 지역의 에이즈 환자가 갖고 있는 바이러스를 분석할 때 간호사가 갖고 있는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라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충분하다. 변호인측은 이를 이용해 슈미트의 무죄를 주장했다.
사건의 열쇠 쥔 유전자 돌연변이
미국 유전체학발전센터(TCAG)에서 운영하는 게놈뉴스네트워크(GNN)는 지난 1월 말이 사건의 전모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과학자들이 이 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계통유전학(phylogenetics)이란 새로운 연구방법을 이용한 분석결과가 최초로 형사재판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됐기 때문이다.
계통유전학이란 생물들의 유전정보를 해독해 상호비교함으로써 유전적으로 얼마나 가깝고 먼지를 알아내는 분야다. 진화 연구에서는 이를 이용해 이제까지 밝혀진 것과 다른 새로운 진화 계통도를 작성할 수 있다. 또한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이 방법으로 분석하면 어디서 질병이 시작됐는지를 알 수 있으며, 특정 국가나 민족에 고유한 병원체를 밝혀낼 수도 있다. 연구가 시작되던 1970년대에는 주로 아미노산의 서열을 비교했지만 최근에는 대부분 DNA 염기서열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다.
생물체의 DNA 염기서열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그 가운데 한 염기가 다른 염기로 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염기전위(transition)와 염기전환(transversion)이다. 염기에는 고리가 두개인 아데닌(A), 구아닌(G)과 같은 피리미딘 염기와 고리가 하나인 시토신(C), 티민(T, RNA의 경우 우라실(U))이 있다. 염기전위는 한 피리미딘 염기가 다른 피리미딘 염기로, 또는 한 퓨린 염기가 다른 퓨린 염기로 바뀌는 것이다. 즉 A가 G로, C가 T로 바뀌는 형태다. 염기전환은 피리미딘 염기가 퓨린염기로 또는 그 반대로 바뀌는 것으로 A가 T로 C가 G로 바뀐다.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DNA 변화는 염기전위다. 염기전위는 시간에 따라 거의 비례해서 변하다가 어느 지점부터는 기울기가 완만해진다. 이는 염기전위가 반복되다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계통유전학 방법을 이용해 생물의 진화를 추적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우선 두 생물의 특정 유전자 염기서열을 해독한다. (그림 1)에서 보듯
예를 들어 10개의 염기 중 다른 것이 두개라면 차이가 20%가 되고, 이는 진화적 거리 0.2로 해독된다. 만약 같은 생물에서 진화한 것이라면 계통도에서 두 생물은 진화거리 0.2를‘ㄷ’자 모양으로 반으로 꺾어 아랫변과 윗변이 진화거리 0.1인 가지로 표현된다.
문제는 비교대상의 수가 많아지면 진화거리를 간단히 반으로 꺾는 식으로는 표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때는 우선 비교대상들끼리의 진화 상대거리를 각각 구한 다음, 거리에 맞게 여러 생물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낸다. 이 그림은 한 점, 또는 한 직선에서 여러 생물체가 곁가지를 치는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개, 사람, 고릴라, 침팬지의 진화 상대거리를 각각 구했다고 하자. (그림 2)에서 보듯 우선 한 직선을 중심으로 침팬지, 인간이 왼쪽에 가지를 치고, 고릴라와 개가 왼쪽에 가지를 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아래 왼쪽 그림에서 침팬지와 개의 실제 진화거리는 0.38인데, 계통도에서는 침팬지에서 시작해서 개까지 이르는 세직선의 합(0.091+0.1+0.154=0.345)이 이에 근사하도록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상태에서는 아직까지 진화의 방향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알고자하는 생물군(ingroup)이 그들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진화하기 이전에 진화된 다른 쪽으로 진화한 외부그룹(outgroup)을 골라낸다. 진화상에서 가까운 생물군이 형제라면 외부그룹은 사촌인 셈이다. 그림에서 보면 개가 외부그룹이 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고릴라와 개가 갈라지는 지점이 진화의 기원이 된
다. 이를 토대로 계통도를 그리면 공통조상에서 개가 먼저 갈라져 나오고 다음으로 고릴라가, 최종적으로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져 나오는 진화 과정을 알 수 있게 된다.
염기서열 분석결과에서 진화거리를 구하고, 다시 이를 하나의 계통도로 그려내는 과정은 모두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이뤄진다. 그래서 분석결과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부트스트랩(bootstrap)법이다.
예를 들어 10개의 염기로 구성된 세 동물의 특정 유전자 부위를 비교한다고 할 때 위 방법으로는 비교 데이터가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다. 염기수가 작을 경우엔 쉽게 차이를 알 수 있지만 그 수가 늘어나면 하나의 데이터만으로는 분석 결과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만약 염기가 10개라면 순서대로 1번부터 10번까지 번호를 붙인 다음, 반복을 허용해 무작위로 10개의 번호를 뽑아 새로운 비교대상들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원래 자료와 비슷한 유사자료를 만들고 염기서열들을 비교해 계산의 정확도를 측정할 수 있다.
두 대학 분석 결과 모두 범죄 입증
계통유전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에이즈 재판을 다시 살펴보자.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 간호사는 직업 특성상 의료 기록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간호사는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슈미트를 포함해 모두 7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맺었다고 진술했다. 사건 이후 이뤄진 이들 남자들의 에이즈 검사결과는 이들이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병원에서 에이즈 환자가 내뱉은 침을 맞고 에이즈 검사를 받은적이 있었으나 이때도 음성이었다. 마약을 한적도 없는데다 사건 직전까지 정기적으로 헌혈을 해서 에이즈 검사를 수시로 했기 때문에 간호사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에이즈에 감염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검사는 슈미트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에이즈 바이러스 검사에 들어갔다.
검찰측은 검사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슈미트가 돌보던 에이즈 환자와 간호사, 그리고 간호사가 살던 라파에트 지역 에이즈 환자들의 혈액 샘플을 베일러 의대와 미시간대에 동시에 보내 독립적으로 검사하게 했다. 미시간대에 보낸 샘플에는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아 누구의 혈액인지 알 수 없게 했다. 또 샘플 채취나 보내는 시간도 달랐다. 그 사이에 에이즈 바이러스의 유전자 염기서열이 많이 바뀔 수 있다. 만약 검찰측의 주장이 옳다면 상이한 시기의 염기서열을 분석해도 진화 과정에서 같은 결과가 나와야 했다. 즉 에이즈 환자와 간호사의 혈액속에 든 바이러스는 계통도에서 가장 근접한 위치에 있어야 했다.
에이즈 바이러스의 유전자는 복제를 시작하는 신호가 되는 프로모터 부분과 핵단백질을 만드는 gag 유전자, 외피 단백질을 만드는 env 유전자, 그리고 숙주의 DNA를 이용해 자신의 유전자를 증식시키는 역전사효소를 만드는 pol 유전자로 구성된다. 양 대학의 연구팀은 각각의 혈액샘플에서 env 유전자와 pol 유전자를 증폭시킨 다음, 대량 복제해서 염기서열을 분석했다. 염기서열을 비교하는 방법은 일종의 통계적 과정을 거친다. 유전자를 대량 복제하는 것은 이런 통계적 과정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분석대상을 늘이기 위해서다.
우선 외피 단백질 env 유전자의 염기서열 비교결과 계통도에서 라파에트 지역의 일반 에이즈 환자들과 환자 및 간호사의 유전자는 확연히 구별됐다. 또한 환자와 간호사의 유전자는 같은 기원을 갖고 있었으며 이후 독자적으로 진화해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환자의 에이즈 바이러스가 간호사에게 감염됐고 이때부터 두명의 몸 안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역전사효소 pol 유전자 분석결과는 이를 좀 더 명확하게 보여줬다. 바이러스를 인체의 면역세포가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외부 형태를 바꾸기 때문이다. 당연히 env 유전자의 변화가 심하게 된다. pol 유전자는 이보다는 변화 정도가 덜하기 때문에 환자에서 간호사로 이어지는 에이즈 바이러스의 감염을 비교적 쉽게 추적할 수 있다.
(그림 3)의 (a)에서 큰 상자는 환자의 pol 유전자를 보여준다. 작은 상자는 간호사의 유전자를 보여준다. 이 분석결과는 베일러 의대에서 나온 것이다. (b) 그림은 베일러 의대와 미시간대의 분석결과를 합한 것이다. 두 그림 모두 공통조상에서 환자의 유전자가 진화하다가 마지막에 간호사의 유전자로 갈라져 나오는 것을 보여준다. 베일러 의대팀을 이끈 마이클 메츠커 교수는 재판에 증거물로 제출된 계통유전학 분석결과를 지난해 10월 29일자‘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소와 고래는 한가족
에이즈 감염 경로를 둘러싼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0년에는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치과의사의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에이즈에 감염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치과의사도 에이즈 환자였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법정 공방이 일었지만 계통유전학 분석결과 치과의사의 에이즈 바이러스가 치료 도중 환자에게 감염됐다는 것이 밝혀져 도중에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과학계에서는 당시의 계통유전학 분석결과를 두고 논란이 계속됐다. 현재로는 당시의 분석결과가 옳았다는 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지만 분석 방법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연구결과도 제기됐다. 1998년 스웨덴에서도 정형외과의사를 통해 환자가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형사사건으로는 1994년 스웨덴에서 강간 피해자가 에이즈에 감염되면서 계통유전학 분석결과가 법정에 증거로 제출된 바 있다. 1992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는 친아들이 아니라고 의심한 병원 직원이 11개월 된 아이에게 에이즈 바이러스를 주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DNA 검사결과 부자관계가 증명됐지만 아이는 1996년 에이즈 양성반응을 보였다. 이 사건은 아직 재판이 진행중인 상태로 역시 계통유전학 분석결과가 검찰측 증거로 제출됐다. 그러나 형사재판에서 계통유전학 분석결과가 법정의 최종 판결을 이끌어낸 것은 라파에트 사건이 처음이라고 GNN은 보도했다. 과학자들은 DNA 지문이 법정에서 증거로 공식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계통유전학 분석결과도 곧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렇지만 계통유전학의 본무대는 진화연구에있다. 한동안 사람들은 생물을 인간의 눈으로, 즉 식용인지 아닌지, 또는 인간이 살고 있는 땅에 사는 동물은 물에 사는 동물보다 고등하다는 등으로 분류했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분류가 고대 학자들의 이론체계를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던 것이 르네상스기를 거치면서 자연을 직접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분류법이 등장했다. 그 후 지금까지 골격, 신경, 호흡기, 생식기의 구조 등을 비교해 생물들 사이의 진화적 연관성을 추적할 수 있었다.
계통유전학은 이러한 생물 분류를 유전자 차원에서 검증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최근 상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2001년 2월 1일 과학전문지‘네이처’에는 DNA 염기 서열을 비교해 태반 포유류의 진화계통도를 새롭게 작성한 연구 논문 2편이 나란히 실렸다. 태반 포유류는 어미 배속에서 태아를 키워 출산하는 동물로, 사람을 비롯한 대부분의 포유류가 여기에 속한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마크 스프링거 교수팀과 미국 국립암연구소 스테펜 오브리언 박사팀은 미토콘드리아 및 세포핵 유전자의 DNA 염기 서열을 비교해 태반 포유류를 4개군으로 분류했다. 이에 따르면 원시 포유류는 처음 파충류에서 갈라져 나온 뒤 1억4백년에서 6천4백만 년전 사이에 4개 무리로 갈라진 뒤 독자적으로 진화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유전자 계통도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육지에서 살다가 바다로 간 포유류인 고래와 해우의 경우가 그렇다. 고래와 해우 모두 수중 생활에 맞게 네발이 퇴화되고 몸이 유선형으로 바뀌었지만 유전적으로는 고래가 해우보다는 박쥐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또한 고슴도치와 쥐가 가까워 보이지만, 두 동물의 유전자 차이는 인간과 쥐의 유전학적 차이보다도 큰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팀이 작성한 계통도(그림 4)를 보면 태반 포유류 1군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퍼져 나간 초기 포유류의 후손인 코끼리와 해우가 들어 있고 2군에는 중남미의 포유류인 나무늘보나 개미핥기가 속한다. 3군에는 토끼나 쥐, 호저, 날다람쥐 같은 설치류와 사람이 속하는 영장류가 두 축을 이루고 있다. 4군에는 소, 고양이, 고래, 박쥐 등 다양한 동물이 들어 있다.
3D 학문에서 첨단 생명과학으로
국내에서도 유전자 분석을 통해 이제까지의 분류체계를 뒤집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경북대 황의욱 교수는 절지동물의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을 비교해 새로운 계통도를 만들어냈다. 2001년 9월 13일자‘네이처’에 발표된 이 연구(그림 5)에 따르면 풍뎅이나 나비와 같은 곤충류는 겉모양이 비슷한 지네나 노래기 등의 다지류보다는 게, 새우, 물벼룩이 속하는 갑각류와 유전적으로 더욱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곤충류와 다지류는 모두 한쌍의 더듬이를 갖고 있는 반면, 갑각류는 두쌍의 더듬이를 갖고 있어겉모습에서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다지류는 곤충류보다는 거미, 전갈 등과 같이 아예 더듬이가 없는 협각류에 가까이 있었다. 곤충류와 갑각류의 관계에 대해서는 과학자들 사이에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나 절지동물의 나머지 큰 집단인 다지류와 협각류의 관계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거의 없었다. 황 교수의 논문은 이 부분을 계통유전학으로 밝혀낸 것으로 절지동물의 연구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됐다.
일반인들에게 분류학은 채집망을 들고 산과 들을 헤매는 과학계의 대표적 3D업종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생물 분류는 이처럼 DNA 염기서열을 해독하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컴퓨터 상에서 다른 생물들과의 상관관계를 밝혀내는 계통유전학으로 급진전하고 있다. 현대 생명과학의 대표 주자인 게놈 해독과 생물정보학이 한데 모인 셈이다. 그 결과 수많은 생물들이 새롭게 분류되고 있으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종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과학 외적으로는 법정에서 뿐 아니라 국가 방역체계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최근에는 서울대 김선영 교수팀, 국립보건원 이주실 박사팀 등이 바이러스 유전자 두개를 이용해 밝힌 바에 따르면 국내 에이즈 환자들이 바이러스 계통도에서 하나의 진화적 집단을 이룬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를 활용하면 우리나라 에이즈의 초기 전파 경로를 밝혀 어떻게 하나의 바이러스가 국내에서 그렇게 널리 퍼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초기 에이즈 환자들의 혈액 샘플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더 이상의 추적이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지만 지금부터라도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하면 특정 지역에서 어떠한 에이즈 바이러스군이 어떤 감염 경로로 퍼지고 있음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방역당국은 이 정보를 가지고 해당 지역을 집중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에이즈 확산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 또 생물 테러가 발생했을 때도 발원지가 어디인지, 무기로 사용된 병원체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 미국 라파에트시의 에이즈 사건은 이러한 계통유전학 분석의 효과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계기가 된 셈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계통유전학 분석이 남용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전염병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알게 됐을 때 사람들은 고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처음 병을 얻게 된 사람이나 지역을 마녀사냥하듯 비난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시 과학은 양날의 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