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의 복원 과정에서 무언가가 새로 발견될 때마다 사람들은 늘 잊혀진 역사가 성큼 다가서는 신선한 느낌을 받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바디칸궁전의 시스티나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가 복원작업을 마치고 1994년 일반에 공개됐을 때도 사람들은 뭔가 새로운 것이 발견되지 않았을까 기대했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반덴베르크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기라도 하듯 미켈란젤로가 교황을 저주한 글자가 복원 과정에서 발견됐다는 내용의 ‘미켈란젤로의 복수’란 역사추리소설을 썼습니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천장만 보며 그림을 그리느라 온몸이 정상이 아니었는데도 교황이 보수를 떼먹는 등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황청이 12세기에 이단자로 규정한 유대 밀교 예언자 아불라피아(ABULAFIA)의 이름 여덟글자를 성인으로 받드는 예언자들의 그림 아래에 그려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반덴베르크의 상상처럼 세계적 명화 아래 숨겨진 또다른 그림이 5백년만에 드러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영국 국립미술관은 지난 10월 30일부터 ‘르네상스 명화 속의 소묘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화가들은 물감을 칠하기에 앞서 목탄이나 잉크, 연필 등으로 소묘, 즉 스케치를 합니다. 바로 이 스케치가 새롭게 발견된 그림입니다.
영국 국립미술관의 복원팀은 적외선을 이용해 이 스케치들을 복원했습니다. 사람의 눈은 파장이 4백nm-7백nm(1nm는 10억분의 1m)인 가시광선의 빛에만 자극을 받는 시세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바로 이 가시광선이 각종 색깔의 물감에 반사돼 우리의 시세포를 자극합니다. 그런데 적외선은 파장이 가시광선보다 긴 7백50-1천8백nm인데다 진동수가 낮아 침투성이 좋습니다. 물감을 뚫고 들어간 적외선은 스케치에 쓰인 목탄이나 잉크, 연필 속에 들어있는 탄소분자에 흡수돼 사진에서 검은선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한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투시카메라’와 원리가 같습니다. 투시카메라는 적외선을 내보낼 수 있기 때문에 렌즈 앞에 가시광선 차단 필터를 끼우면, 옷의 색을 나타내는 가시광선은 렌즈 앞에서 차단되고 옷을 통과해 피부에서 반사된 적외선만 감광 센서에 잡혀 영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따지면 물감이 옷이고 스케치가 피부인 셈이죠.
그렇다면 스케치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을까요.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한사람의 손으로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포착된 것입니다.
‘1518년의 대가’로만 알려진 화가의 ‘이집트로의 탈출’ 스케치를 보면 한사람은 풍경을 매우 세밀하게 그렸고, 전혀 다른 화풍의 또다른 사람은 인물의 윤곽만 대충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당시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 중에는 스케치뿐 아니라 채색까지도 제자들이 도맡은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대가들은 나중에 사인만 하고 공을 독차지했던 것이죠.
물론 제자를 끔찍이 아낀 화가도 있었습니다. 지난 8월 르네상스시기의 대가 라파엘로의 제자인 기울리오 로마노의 유화 작품을 분석한 결과, 라파엘로가 작품 제작에 관여한 흔적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화제의 작품은 로마노의 작품 ‘아기를 안은 성모 마리아와 산 지오바니노’입니다. 로마노는 라파엘로가 가장 아끼는 문하생인데다 작품스타일이 라파엘로와 워낙 비슷해 전문가들 사이에 라파엘로가 도와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 왔던 것이죠. 당시 조사를 맡은 로마 박물관 협회는 적외선 감식 결과 유화물감 밑의 스케치가 영국 옥스퍼드 애시몰린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라파엘로의 스케치와 사실상 똑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밖에 이탈리아의 폰토르모가 그린 ‘이집트에서의 요셉, 야곱 부자’에서 임종 장면이 오른쪽 상단에 그려져 있는데 스케치엔 왼쪽 상단에 있었다든지, 종이에 그린 선을 따라 바늘로 구멍을 낸 다음 연필가루 등을 뿌려 캔버스에 스케치를 복사했다는 등의 흥미로운 사실들도 여럿 밝혀졌습니다.
영국 국립미술관의 큐레이터인 데이비드 범포드는“라파엘로의‘성모자(聖母子)와 어린 세례 요한’스케치는 그 자체로도 명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그림을 사면 한번에 두점의 명화를 사는 셈이니 그림값이 그리 아깝지는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