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새로운 슈퍼 독감이 유행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왔다. 바이러스 표면의 단백질을 끊임없이 바꾸면서 인간의 정복을 쉬이 허락치 않는 독감. 독감은 어떤 특징이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과학적 노력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지난 11월 2일 영국의 BBC 방송은 1918년 유럽에서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에 버금가는 ‘슈퍼 독감’이 당장 이번 겨울 유럽대륙을 휩쓸 가능성을 경고했다. 홍콩 독감과는 또다른 독감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독감은 한번 유행하면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독감의 위력을 알 수 있는 한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지난 1997년 5월 홍콩의 퀸메리 병원에 독감증상이 심각한 3살짜리 남자 어린이가 도착했다. 어린이는 며칠 후 내부장기 출혈로 사망했다. 아이의 몸에 전염된 독감 바이러스를 조사한 결과, 닭과 오리 등의 가금류에서 발생하는 H5N1 독감 바이러스라는 것이 확인됐다. 이후 추가로 17명이 감염돼 이 중 5명이 사망하자 도시 전체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 독감은 가금류에서 발생하는 급성 바이러스 전염병인 조류독감(Avian Influenza)이 인간에게 감염돼 발생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홍콩에서는 당시 가금류 1백40만 마리가 도축됐다. 조류독감의 공포는 계속 이어져 지난해 5월에도 수십만 마리가 도축됐으며 전세계적으로 광우병과 함께 동물에 의해 발생하는 질병의 공포를 야기시켰다.
인체 내의 방어망 무력화
홍콩 조류독감으로 불리는 이 바이러스는 닭에서 인간으로만 전염되고,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염은 되지 않기 때문에 엄청난 피해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변이가 쉽게 발생하는 바이러스의 특징을 생각한다면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염을 일으키는 변종의 탄생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지난 5년 간 홍콩 조류독감 바이러스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됐으며 최근 충남대 수의학과 서상희 교수가 주목할 만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서 교수 연구팀은 홍콩 조류독감 바이러스의 표면 단백질(NS1)이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는 연구결과를 지난 10월 ‘네이처 메디슨’에 발표했다. 2000년 5월부터 시작된 이 연구에서 서 교수는 병원성이 약한 독감 바이러스에 NS1 유전자를 재조합시킨 후 돼지에 접종했을 때 고열과 함께 30% 이상의 체중감소 등의 증상이 나타난 반면, NS1 유전자를 갖지 않은 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된 돼지는 약한 독감 증상만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서 교수는 NS1단백질을 주목했고, 홍콩 조류독감 바이러스 표면에 있는 NS1단백질의 특징을 밝혀냈다. NS1은 인체 내에서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사이토카인(cytokine) 중 3종류와 역시 항바이러스 기능을 가진 TNF-α에 대한 저항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강력한 기능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또한 NS1단백질의 92번째 아미노산인 글루탐산이 독감 감염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는 사실도 함께 밝혀냈다.
서 교수의 이번 연구 결과는 독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감 증상의 주요 원인이 밝혀졌으니 이를 무력화 할 방법의 개발도 머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독감은 정복당할 만하면 새로운 변종을 탄생시켜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다. 과연 인간은 독감을 정복할 수 있을까. 또한 독감과 감기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손을 통해 전염되기도
독감을 알아보기 전에 감기에 대해 알아보자. 요즘 같이 일교차가 심한 환절기에는 쉽게 피로해지고 저항 능력이 떨어져 여러 환절기 질환에 걸릴 위험이 있다. 특히 호흡기는 대기에 노출돼 있어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감기에 걸리기 쉬워진다. 만병의 근원이라는 감기는 발병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또한 발병할 때마다 조금씩, 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확실한 예방책이나 치료방법을 세우기 어렵다.
감기는 여러 종류의 감기 바이러스 감염으로 발생하는 질환이다. 영어로는 ‘보편적’이라는 뜻을 가진 ‘common cold’라 부를 만큼 흔하게 일어난다. 감기는 코막힘, 콧물, 목 아픔, 기침, 발열 등을 주증상으로 해 5-7일 정도 앓고 나면 저절로 치유되는 병이다. 대부분 호흡기를 통해 전염되며, 특효약도 없고 증상도 견딜 만하기 때문에 보통 가볍게 여기고 넘어간다. 하지만 많은 병이 감기로 인해 시작되므로 오히려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감기는 리노바이러스를 비롯해 로타, 아데노, 코로나, 콕사코 등 여러 종류의 감기 바이러스 감염에 의해 발생한다. 특히 리노바이러스는 감기환자의 기침 등을 통해 공기로 전염되는 것보다 감기환자의 손을 통해 전염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즉 감기환자의 콧물 속에 포함된 리노바이러스가 환자의 손을 통해 감기환자 주변 여기저기 산재하게 되고, 이를 접촉한 사람이 다시 무심코 자신의 코를 만질 때 감염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바이러스 감염증은 한번 앓고 나면 체내에 항체가 생겨 상당 기간, 또는 영구히 그 바이러스에 대해서 면역력을 가진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파라인플루엔자 등은 앓고 난 뒤에 면역이 생기지 않아 반복 감염될 수 있다.
감기가 심해지면 독감?
이에 비해 독감은 감기를 초기에 치료하지 않아 걸리는 ‘독한 감기’가 아니라, 독감 바이러스에 의해 일어나는 급성 호흡기 질환이다. 독감은 보통의 감기와는 달리 고열, 전신근육통, 심한 쇠약감 등을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1-2주 정도 경과하면 치료되지만 2차 감염, 폐렴, 천식 등의 위험한 합병증의 우려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독감은 한번 유행할 때마다 바이러스의 형태, 즉 우리 몸에서 이물질로 인식하는 항원부위에 돌연변이가 생기기 때문에 ‘세계의 여행자’, 또는 ‘변장술의 명수’라 불리기도 한다.
독감의 영어명칭은 ‘영향을 받는다’라는 의미의 ‘influenza’로 바이러스의 존재를 모르던 시절에 독감이 별의 영향으로 걸린다는 생각에서 유래했다. 독감은 기원전 412년 그리스의 의학자인 히포크라테스에 의해 최초로 보고됐으며, 1580년 처음으로 전세계적으로 발생한 독감이 기록된 이후 31번이나 보고됐다. 지난 한세기 동안 세계를 긴장으로 몰고 간 전세계적 독감으로는 1918년 발병해 10억명에게 피해를 입히고 2천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H1N1 스페인 독감, 그리고 1957년 발생한 H2N2 아시아 독감, 1968년의 H3N2 홍콩 독감이, 1977년의 H1N1 러시아 독감이 있다. 독감은 10-15년 주기로 전세계를 돌며, 국지적으로는 1-3년마다 소규모로 유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변신 비결은 단백질
독감 바이러스는 지금까지 4가지 형태가 발견됐다. 그 종류에는 심각한 증상으로 죽음까지 유발하며 전세계적 유행병을 일으킬 수 있는 인플루엔자 A와 국지적인 전염병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B, 비교적 잘 발생하지 않고 증상도 가벼운 인플루엔자 C, 그리고 아직까지 인간에 대한 병원성이 불명확한 인플루엔자 D가 있다. 인플루엔자 A는 사람과 돼지, 말 등의 다른 포유 동물과 여러 종의 조류에 감염을 일으키며, B형은 사람이 유일한 숙주고, C형도 주로 인간에서 발견된다.
독감 바이러스는 RNA로 이뤄진 8개의 유전자 분절로 구성돼 있으며, 이 RNA를 많은 수의 핵단백질과 중합효소들이 둘러싸고 있다. 독감 바이러스의 외피는 숙주세포에서 나올 때 갖고 나온 숙주세포의 지질이중막으로 구성돼 있다. 이 외피에는 M2단백질과 2종의 당단백질인 헤마글루티닌(H, hemaglutinin)과 뉴라미데이즈(N, neuramidase)를 갖고 있다. 헤마글루티닌은 인체의 세포 내로 침투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고, 뉴라미데이즈는 인체의 세포에서 복제를 마친 바이러스가 세포 밖으로 나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까지 인간에 대한 병원성을 갖는 독감 바이러스에서 H1, H2, H3 3종류의 헤마글루티닌이 확인됐으며, 뉴라미데이즈는 N1, N2의 2종류가 밝혀져 있다. 일반적으로 독감의 명칭은 당시 유행한 독감 바이러스의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데이즈의 종류를 기준으로 지정한다. 독감 바이러스의 변종들은 이 H와 N 단백질에 미세한 차이를 보이며, 1968년 이래 지금까지 H3N2와 H1N1을 갖는 바이러스가 2-3년마다 교대로 유행하고 있다.
독감이 얼마나 심한 증상을 나타내고, 얼마나 넓은 지역에서 유행하는가는 사람의 혈액 속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항원에 대항하는 항체가 얼마만큼 존재하는가에 달려있다. H1N1에서 H3N2로 바이러스 형태가 크게 변하면, 혈액 속에는 H3N2에 대항하는 항체가 없으므로 증상이 심한 독감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고, H1N1의 큰 골격은 유지한 채 H1이나 N1에서 미세한 돌연변이가 나타나는 경우엔 체내에 기존의 H1N1에 대한 항체가 남아 있으므로 증상도 가볍고 국지적으로만 유행하는 독감이 되는 것이다. 1997년에 유행한 홍콩 조류독감은 H5N1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의 혈액 속에 H5에 대한 항체가 없었기 때문에 전파력이 높았다면 좀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독감과 싸우는 약품들
독감의 치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안정을 취하며 휴식하는 일이다. 여기에 일반적인 치료로 해열진통제인 아스피린이나 아세트아미노펜 등의 요법이 추가되지만, 심한 경우나 기존의 만성질환이 있는 경우에는 고유 약품을 이용해야 한다. 1964년 미국에서 개발된 ‘아만타딘’(amantadine)은 A형 인플루엔자 감염에 효과가 있는 약으로 1966년 미 식품의약국(FDA)에 정식으로 승인받아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아만타딘이 간염과 파킨슨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에도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만티딘이 독감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메커니즘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바이러스의 RNA가 사람 세포로 들어가는 과정을 억제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만티딘은 불면증이나 신경과민 등의 부작용을 초래하기 때문에 제한된 범위에서만 사용된다.
이에 비해 정확한 메커니즘이 밝혀진 독감 치료제도 있다. 바로 ‘뉴라미데이즈 저해제’다. 이 약품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사람의 호흡기 세포에서 복제 후 다른 세포로 확산되는 역할을 하는 뉴라미데이즈의 기능을 저해하는 물질로서 이미 3년 전에 개발돼 판매되고 있다. 영국의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이 개발한 ‘리렌자’와 호프만 라 로슈에서 개발한 ‘타미플루’가 대표적인 뉴라미데이즈 저해제이다. 특히 리렌자는 흡입형 제품으로 1999년 겨울 미국 전역에 유행한 ‘시드니 A형’ 독감 치료제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 제품은 가격이 비싸고 구토, 설사 등의 부작용이 보고되고 있다. 현재는 이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뉴라미데이즈 저해제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최근에는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된 세포에서 ‘라프 카이네이즈’(Raf kinase)라는 효소의 활성을 억제함으로써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돼 새로운 독감 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이 기대되고 있다. 뉴라미니데이즈 억제제가 바이러스 자체를 억제하는 것에 비해 라프 카이네이즈 치료제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숙주세포의 효소인 라프 카이네이즈를 억제한다. 그 결과 복제된 독감 바이러스의 유전물질이 숙주 핵에서 빠져 나오는 것을 막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카이네이즈 효소는 세포의 분화와 사멸에도 관여하기 때문에 카이네이즈 억제물질이 독감 치료제로 이용되기 위해서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하도록 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최대 위협
독감은 예방접종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독감 바이러스의 항원변이가 심하기 때문에 예방효과가 작고, 면역 지속기간이 3-6개월에 불과하므로 매년 접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독감 백신은 주로 어린이와 노약자와 같이 면역력이 약한 사람에게 예방차원에서 이용되며 60-80%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또 최근에 독감 백신이 노인의 중풍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보고도 있었다.
백신은 달걀에 바이러스 균을 주입해 만들며, 최근에는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데이즈 외에 독감 바이러스의 외피에 존재하는 단백질인 M2도 새로운 백신의 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효과가 뛰어난 백신 개발을 위해 면역력을 증진시키는 성분과 백신을 안정화시키는 물질, 그리고 DNA 백신 등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1998년 독감과 이에 수반된 합병증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가 3천2백명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사망자 수가 1만명에는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독감이 영국 전역에 유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또 1970년대 후반부터는 H1N1과 H3N2 2종의 독감 바이러스가 조합된 변종 독감인 H1N2가 유행했다. 하지만 H1N1과 H3N2 바이러스는 유전적 차이가 크지 않고 사람들이 이미 면역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2000년과 2001년 유럽에서 H1N2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얼마 전 영국의 BBC 방송이 경고한 ‘슈퍼 독감’은 지난해 ‘사이언스’에 발표된 미 위스콘신 매디슨 대의 카와오카 박사의 연구에 근거한 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독감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엄청난 살상력을 갖는 변종으로 변할 수 있다. 또한 유럽의 보건 과학자들은 유전적 변이를 통한 바이러스의 돌연변이가 계속 진행된다면 수십만명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강력한 변종 독감 바이러스가 발생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유럽에서는 1968년대 이후로 10-15년 주기로 출현하는 대규모 유행성 독감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슈퍼독감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에 더해 미국에서는 독감 바이러스를 이용한 생화학 테러의 가능성도 대두된 바 있다. 이런 이유로 전세계의 바이러스 연구 전문가들은 슈퍼독감에 대한 긴급모임을 갖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