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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무대 위로 올라간 과학자

본격 과학극 ‘산소’ 포항서 공연

“내가 최초로 발견했습니다.” “발표는 내가 최초입니다.” “최초로 이해한 건 나입니다.” 지난 8월 11일 포항 문예회관 대강당 무대에서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세명의 남자가 다투고 있었다. 이 남자들이 다투고 있는 것은 산소 발견의 우선권. 바로 ‘산소’라는 연극의 한 장면이다.

극단 모아가 무대에 올린 연극 산소는 2002 대한민국과학축전의 한 행사로 10일부터 12일까지 모두 세차례 공연됐다. 과학축전과 연극, 언뜻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두 행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그 단서는 연극을 알리는 안내장에 이름표처럼 붙어있는 ‘과학연극’이란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과학을 연극으로 표현했다는 말이다. 과연 과학연극이란 무엇일까.


사랑 찾으려 글쓰기 시작

산소의 원작자는 경구용 피임약을 최초로 개발한 미 스탠퍼드대의 칼 주라시 명예교수와 198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미 코넬대 로알드 호프만 교수다. 그렇다면 과학자가 연극 대본을 썼다는 점이 연극 앞에 과학이란 말을 갖다 붙인 첫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산소 공연에 맞춰 우리나라를 찾은 주라시 교수의 답은 이러한 예견을 빗겨나갔다. 주라시 교수가 11일 저녁 포항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말해준 대로라면 ‘사랑’ 때문에 과학연극의 대본을 쓰게 됐다. 두번의 이혼 끝에 주라시 교수는 50대에 16살 연하의 한 여성문학가를 사랑했다. 주라시 교수에 따르면 그녀는 당시 자신보다 서른살이나 연하로 보일 정도로 젊었다고 한다. 둘은 그때부터 5년을 넘게 같이 살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여자가 결별을 선언했다. “그녀는 문학가를 사랑한다며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라고만 말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고, 그 때부터 나 역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년 뒤 그녀와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나는 그동안 쓴 소설을 보여줬다. 결국 그녀는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고, 나는 그녀와 결혼했다.” 당시 주라시 교수가 소설을 쓰게 만든 사람은 지금의 부인인 미 스탠포드대 영문학과 다이앤 미들 브룩 명예교수다.


사랑을 얻은 뒤에도 주라시 교수는 소설을 계속 썼다. 1985년 대장암 선고를 받고 나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고, 과학연극과 소설이 새로운 인생의 주제가 된 것이다. 그 때문인지 대장암은 완치됐다. 주라시 교수는 이제까지 ‘칸토의 딜레마’ 등 5편의 소설과 산소를 비롯한 3편의 희곡을 썼다.
 

라부아지에는 잠수복 모양의 옷으로 사람의 들숨과 날숨 을 모두 포집해 산소가 호흡에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증명 했다. 사진은 라부아지에(왼쪽)가 프리스틀리에게 이에 대 해 설명하는 장면.



연극 속의 과학

과학소설은 이미 SF(Science Fiction)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라시 교수는 자신의 소설은 ‘공상과학’(Science Fiction)이 아니라 ‘소설 속의 과학’(Science in Fiction)이라고 주장한다. 시간여행이나 화성인의 침공과 같이 검증되지 않은 공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밝혀진 과학적 사실을 소설의 기법으로 표현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연극 역시 ‘극장 속의 과학’(Science in Theatre)이라고 부른다.

과학을 주제로 한 연극은 독일의 대문호 브레히트가 쓴 ‘갈릴레오 갈릴레이’나 3년 전 미국에서 공연돼 인기를 끈 마이클 프레인의 ‘코펜하겐’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주라시 교수는 이들은 자신의 극장 속의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브레이트나 프레인은 모두 자신의 견해에 따라 갈릴레이와 원자탄 개발자들의 이미지를 창작해냈으며, 기본적으로 과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주라시 교수는 코펜하겐의 한 장면에서 하이젠베르크와 보어가 16명의 과학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드는 장면을 예로 들면서, 도대체 대화에 나오는 과학자의 이름을 하나도 모르는 관객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가 보기에 진정한 과학연극이란 관객이 연극을 보면서 과학에 대해 모르던 것을 배우고, 과학자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무엇인지를 즐겁게 이해하는 것이다. 즉 교육과 오락의 기능이 결합된 형태다.

국내에서도 몇년 전 먼 미래 인간의 욕심에 의해 모든 자원이 고갈된 상태에서 복제기계인간이 판치는 세계를 그린 연극이나 체세포를 복제한 인간이 생물학적 부모와 자신을 만들어준 과학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내용을 담은 연극이 공연되기도 했다. 그러나 주라시 교수의 생각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진정한 과학연극은 아니다. 체세포 복제를 다룬 연극의 경우, 복제인간이라는 과학적 주제를 다뤘지만 실제 인물들의 갈등구조는 햄릿, 오필리어, 오이디푸스와 같이 기존의 연극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즉 그림을 그리는 내용이 나온다고 미술연극이 아니듯, 과학이 등장한다고 해서 다 과학연극이 아니라는 뜻이다.
 

산소의 공동저자인 미 코넬대 로알드 호프만 교수(왼쪽)와 스탠퍼드대 칼 주라시 교수.



피임약과 인공 수정

그렇다면 최근 국내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LG 사이언스홀의 과학연극은 이점에서 진정한 과학연극의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다. 피에로가 나와 초전도 현상을 마술처럼 보여주면서 우스꽝스러운 대사로 오락과 교육적 효과를 함께 거두니 말이다. 주라시 교수는 그러나 자신의 연극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말한다. 11일 포항의 관객석을 메운 것은 초등학생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포항에서 공연된 산소는 미국, 영국, 독일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공연됐다. 왜 어른들에게 과학을 가르쳐야할까.

“새로운 과학이 나올 때 과학자들이 이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 주체는 바로 일반 시민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과학을 알아야만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다.”

주라시 교수는 1950년대에 경구용 피임약을 개발한 뒤, ‘피임약의 아버지’라 불리며 여성계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들었다. 원하지 않는 임신의 공포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켰다는 것. 그래서 영국에서 발행되는 신문 ‘런던타임’은 그를 1천년 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30인의 한사람으로 뽑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계 일부에서는 이 피임약의 부작용을 들어 철저히 남성 중심적인 발명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보수 종교계에서는 피임약을 윤리적 방종을 부른 괴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주라시 교수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과학과 과학자를 이해시킬 수 있는 연극을 생각한 것이다.

주라시 교수의 첫번째 연극은 ‘순수한 잘못된 수태’(Immaculate Misconception)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가진 ‘무흠 수태’(Immaculate Conception)에 빗대 만든 말이다. 이 연극은 보조생식기술 중 가장 앞선 ‘세포질 내 정자삽입술’(ICSI)을 다룬다. ‘시험관 수정’(IVF)은 난자와 정자를 자궁 대신 시험관에서 수정시킨 뒤 다시 산모의 자궁에 착상시키는 방법이다. ICSI는 수많은 정자가 필요한 IVF와 달리 정자 하나를 직접 난자 안에 집어넣어 수정시키는 방법이다.

‘순수한 잘못된 수태’는 ICSI를 개발한 여성 과학자가 애인의 정자를 몰래(버린 콘돔을 이용해) 자신의 난자에 삽입시켜 최초의 ICSI 아기를 낳으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애인의 정자가 자외선 때문에 파괴되고, 실험의 중단을 우려한 동료 과학자가 자신의 정자를 대신 제공한다. 그러므로 남자와의 섹스가 없는 ‘무흠 수태’이지만 원하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정자가 이용돼 ‘잘못된’이라는 말이 붙은 것이다.

주라시 교수는 11일 오전 ‘인간 생식의 미래’라는 강연을 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ICSI가 가져올 변화를 이야기했다. 주라시 교수는 평소 ICSI가 섹스와 생식의 분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남성들은 자신의 정자를 냉동 보관시킨 뒤, 정관수술을 하면 임신에 대한 걱정 없이 순전히 사랑과 즐거움만을 위해 섹스를 할 수 있으며, 나중에 아기를 원하면 정자 하나만 녹이면 된다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이다. 연극은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도구인 셈. 그래서 연극에서는 정자를 난자에 삽입하는 장면이 스크린을 통해 보여지는 식으로 ICSI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학교로 가는 과학연극

주라시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차라리 복제인간이 더 간편한 방법이 아닐까. 이에 대해 주라시 교수는 “섹스와 생식을 분리했지만 ICSI는 기본적으로 ‘자연적인’ 생식을 목표로 한다. 복제인간은 자연적이지 않은 방법이다. 기자가 말했듯 체세포복제는 완전한 ‘자가 생식’이다. 여기엔 부모가 다 있을 필요가 없지만, ICSI에는 엄연히 부모가 존재한다. 복제인간은 이밖에 기술적 결함이나 우생학적인 목적에 이용될 소지 등 많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주라시 교수는 최근 미적분학의 창시를 둘러싼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우선권 논쟁을 다룬 ‘미적분학’(Calculus)의 집필을 마치고 곧 공연할 준비를 하고 있다. 또 ICSI의 교육을 위한 학교용 연극 대본을 만들어 10월부터 독일의 학교들에서 공연할 계획이다. 이밖에 화학교육용 학교연극 대본 집필을 막 시작했다고 밝혔다.

산소를 처음 쓸 때 주라시 교수는 노벨상에 얽힌 비화에, 호프만 박사는 산소발견에 얽힌 얘기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전체 대본 중 95%는 말없이 메일만 주고받으면서 작성됐는데, 내용전개나 결론과 관련해 의견이 다를 때마다 제3자에게 익명으로 각자의 원고를 보여주고 더 좋은 내용을 선택하기로 합의서까지 작성했다고 한다. 이는 마치 과학자들이 서로 자신의 연구결과를 두고 논쟁하다가 다른 동료의 판단을 구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그러므로 과학연극의 마지막 의미는 연극 대본을 쓸 때부터 철저하게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한다는 것이 아닐까.
 

연극‘산소’는 미국, 영국, 독일 등에서도 공연돼 호평을 받았다. 사진은 라부아지에 부부가 기존의 화학이론을 반박 하는 내용의 극중극을 하는 장면.



진정한 발견자는 누구인가, 연극 산소

노벨상 제정 1백주년을 맞이한 2001년 노벨상 위원회는 1901년 이전의 과학적 업적에 대한 ‘거꾸로 노벨상’을 주기로 한다. 거꾸로 노벨상 선정위원회는 첫번째 상을 산소의 발견에 주기로 하지만, 산소의 발견에 관련된 3명의 과학자 중 누구에게 상을 줄 지에 대해 논란을 벌인다. 스웨덴의 약제상이자 화학자였던 셸레는 누구보다 먼저 산소를 추출해냈지만 아무도 그의 발견을 알지 못했다.

이에 비해 영국의 목사이자 역시 화학자인 프리스틀리는 새로운 실험을 통해 산소를 독자적으로 발견하고 이를 책으로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세무 관리, 경제학자이자 화학자인 라부아지에는 산소가 프리스틀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기존의 ‘플로지스톤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새로운 기체임을 밝혀내, ‘Oxygen’이란 이름을 새롭게 부여한다. 플로지스톤이론은 물체가 탈 때 산소가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플로지스톤이 빠져나온다고 설명한다. 연극은 수상자를 결정하지 않은 채 끝난다.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 먼저 발표했는가, 먼저 이해했는가 가운데 어디에 강조점을 줄 것인지를 관객에게 묻는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산소는 3명의 과학자의 아내를 통해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주라시 교수는 “라부아지에의 아내는 남편의 실험을 돕기도 했으며 책의 삽화와 번역을 담당한 진정한 ‘근대 여성’의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반면 프리스틀리의 아내는 교육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남편의 반대로 집안에 머물러야 했다. 셸레의 아내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당시의 보편적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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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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