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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의 명강의로 소문난‘과학과 문화’.한학기 동안 자신이 맡은 토론 주제 발표를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종강이다. 전체 수업에서도 특별한 과학지식을 암기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학기가 끝날 무렵이면 가슴속에‘뭔가’남는다. 왜일까.


‘친절하고 자세한 수업이 문과생인 나도 수업을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시간. 정말 대학공부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 교수님의 부드러운 강의 진행 덕분에 토론수업이 있는 날이면 수업이 더욱 기다려지는 학기였다.’

‘인문대 학생으로서 과학에 대해 자세하고 체계적으로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런 기회를 갖게 돼 정말 기쁘다. 앞으로는 과학 얘기가 나오더라도 피하지 않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화여대가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학생들이 올린 강의평가서다. 평가대상은 물리학과 모혜정 교수의 ‘과학과 문화’강의. 한학기 강의가 끝나면 강의평가 사이트는 모교수 강의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찬다. 인기의 비결이 뭘까.


극단의 조치에도 성황 이뤄

정년을 3년 앞둔 모교수의 강의실은 항상 만원이다. 지난 1월 이화여대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발표한 ‘베스트 티처’ 7명의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스승에 대한 제자의 평가. 동양권에서는 좀처럼 용인하기 어렵지만 이화여대는 공부 안하는 교수들에 대한 견제수단으로 당연시된다.

모교수는 ▶강의 자료가 체계적이고 도움이 됐나 ▶준비가 충실했나 ▶교수가 질문에 명확·성실하게 답변했나 ▶성적평가는 공정하고 적절했나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강의인가의 5개 항목에 걸친 설문에서 학생들로부터 우수한 성적을 받아 베스트 티처로 선정됐다. 이번 베스트 티처에 뽑힌 교수들은 하나같이 엄격하고 과제를 많이 내기로 소문난 교수들이었고, 모교수도 그 점에선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다.

모교수의 강의에 학생들이 워낙 몰리다보니 학교측은 신입생부터 수강신청을 할 수 있게 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학기 모교수의 ‘과학과 문화’ 강의에는 1백여명 이상의 학생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교수와 학생 한몸 되는 일체감

모교수는 이화여대 62학번으로 학부때부터 물리학을 공부했다. ‘여자가 무슨 물리냐’는 주의의 만류와 비난 속에서도 ‘해내고 말리라’는 오기로, 미 루지애나 주립대에서 결국 물리학 박사학위를 따냈다.

1971년 모교수의 귀국은 화려했다. 국내 여성 첫 물리학박사가 플랫폼을 내려서자 카메라 플래시는 연신 터졌고, 방송과 언론에서도 연일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하지만 모교수의 관심은 오직 연구. 바로 자신의 연구실이 마련된 이화여대로 향했다.

‘과학과 문화’ 강의가 개설된 것도 이런 모교수 특유의 고집과 오기 덕분이었다. 국내에서 아직 본격 토론식 수업에 대한 이해가 자리잡기 전, 모교수는 학교 당국을 설득해 결국 강의를 개설했다.

모교수는 가장 좋은 강의는 ‘느낌’이 있는 강의라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느낌’은 학생과 교수가 공통의 목적을 향해 함께 가고 있다는 수강생과의 ‘교감’이다. 1백명이 넘는 수강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진행하려면 아무래도 주의를 집중시키기 힘들다. 이때 모교수는 공동의 목표를 정해놓고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교수와 학생이 한몸되는 ‘일체감’을 찾아간다.

‘과학과 종교는 어떤 관계일까.’ 딱히 정해진 정답은 없을 것이다. 수강생은 전공과목에 따라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한다. 각양각색의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어떤 경우에는 담당 교수조차 놀랄만한 상큼한 이론이 나오기도 한다. 정해진 결론이 없는 과학과 문화 강의에서는 제자와 스승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교수와 학생이 모두 같은 문제를 놓고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어느새 이들은 한몸이 된다.

과학과 문화 수업에서는 특정한 과학지식을 배울 수 없다. 교수가 벽을 보고 말하듯, 일방적으로 사실 위주의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은 없다는 말이다. 대신 수강생은 교수가 준비해온 그날 강의의 토픽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전개한다. 더욱 특이한 점은 자신의 생각을 굳이 이 시간에 발표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수강생은 그날 토픽에 대해 좀더 깊이 조사하고 연구한 다음, 더욱 발전되고 구체화시킨 자신의 의견을 별도로 존재하는 토론수업 시간에 발표하면 된다.

과학과 문화 강의는 모교수가 전체수강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전체수업과 몇개의 분반으로 나눠 진행되는 토론수업으로 구성된다.


토론 없이 수업 없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학생들은 학원에서 미리 배울 것을 배우고, 학교에서는 아예 자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이런 습관은 대학와서도 고쳐지지 않는다. 대학의 과학교육에 새로운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토론수업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모교수는 이렇게 답한다.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획일적으로 나눠진 고등학교 과학내용을 대학에서도 별반 다를 것 없이 가르친다. 이래서야 과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없다고 모교수는 생각한다.

과학과 문화 강의에서는 특정 과학이론을 그것이 나온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하려 한다. 우리 생활에 미치는 과학의 영향이 큰 만큼, 과학도 거대한 문화현상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도입한 제도가 바로 토론수업이다. 한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하려면 토론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모교수는 전체수업을 통해 과학을 거대시각으로 바라보는 통합적 사고를 강조한다. 자세하고 깊이있는 내용은 모두 토론수업에 맡긴다. 학생 스스로 찾아 깨닫도록 하자는 취지다. 흥미위주의 단편적 과학지식의 전달보다는 수강생이 과학에 대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모교수의 목표다.

토론수업은 전체 수강생을 15명 내외의 분반으로 나눠 진행한다. 한 학기당 5-6개의 분반이 생기는데, 토론수업은 좀더 원활한 진행을 위해 토론 전문조교에 의해 진행된다.

토론의 주제는 다양하다. 전체수업에서 제시된 특정 토픽에 대해 심도있는 주제발표와 토론이 진행되지만, 여대의 특성상 기발하고 재밌는 주제발표도 이어진다. ‘그리스 과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반페미니즘’‘자연과학의 발전과 패션의 진보’‘생리학의 출현과 피임의 역사’ 등 여대생 특유의 관심과 섬세함이 베어있는 주제가 그 예다.


발표 준비하며 밤새는 학생들

수강생은 주제발표 준비를 하며 비로소 소극적이고 피동적이던 그동안의 굴레를 벗어나 진정한 대학생으로 거듭난다. 자신의 주제발표 준비가 허술할 경우, 나쁘게 나오는 학점은 고사하고 토론수업에서 동료 학생들의 쏟아지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주제발표를 맡은 학생은 각종 참고서적과 외국문헌, 인터넷 등을 조사하다 도서관에서 밤을 새기 일쑤다.

지난 학기 법학과 한 수강생은 ‘과학수사의 발전경향과 범죄심리학’이라는 주제를 발표했다가 그 내용이 너무 좋아 전체수업에서 다시 발표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과학과 문화 강의는 이처럼 다양한 전공의 학생이 함께 듣는 강의인 만큼,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토론수업은 명강의를 유지하는 비결 중 빼놓을 수 없는 원칙이다. 외국의 명문대는 모두 자신만의 토론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모교수는 요즘 토론수업을 좀더 활기차게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중이다. 하지만 교수 대 학생의 비율이 높은 국내 대학의 형편 때문에 이를 실현하기 쉽지 않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과학과 문화 강의는 토론수업에 대한 가능성 있는 대안을 마련해가고 있는 셈이다.


자신만의 수료증

깨닫는다는 것은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중요한 새로운 원리를 처음으로 깨닫는 특권은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발견된 원리는 누구에게나 깨닫고 이해하도록 열려있는 인류 보편의 자산이다. 이런 새로운 원리를 깨닫는 데는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바로 ‘과학과 문화’ 강의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인류가 발전시켜온 물질세계의 원리는 무수히 많고 또한 다양하다. 복잡한 수식과 난해한 실험결과 해석에만 매달려 과학을 이해하려다 보면 정작 중요한 원리는 지나치게 된다.

하지만 과학을 인류 전체의 문화적 자산 일부로 바라보면, 무심코 지나쳤던 중요한 과학원리를 깨닫게 된다. ‘자신만의 과학관’이 생기는 것이다.

수소와 헬륨으로 이뤄진 태양은 우주의 축소판이고, 산소가 풍부한 지구는 우주에서 아주 특이한 환경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매일 대하는 태양도 새롭게 보인다. 그리고 지구의 환경이 고맙게 느껴진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평생 새롭게 깨달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과학과 문화 강의가 수강생에게 수여하는 가장 큰 수료증은 어쩌면 학생들의 마음 속에 새겨진‘과학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잣대’일지도 모른다.

2002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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