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물은행에 맡기세요.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해 드립니다.”
국내에서는 매년 1만-1만2천개의 새로운 화합물이 합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 화합물은 아직도 고전적인 신물질개발 방식에 따라 한가지 약효를 목적으로 한 약효검색을 거친다. 검색 후 약효가 검색되지 않은 화합물은 방치되거나 폐기된다. 많은 예산을 투입해 어렵사리 합성한 화합물의 상당수가 행방불명되거나 불량하게 보관되며, 심지어 싼값에 외국 화합물 수집기관에 팔려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고효율약효검색’(HTS, High Throughput Screening) 기술의 발달로 하루에도 수천-수만개의 화합물을 검색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의약·화학적 유효물질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고효율약효검색은 수만개의 화합물을 완전 자동화된 로봇시스템을 이용, 이 중에서 생물학적 약효가 있는 신약 후보물질(히트물질)을 추려내는 장치다. 한 대에 수억원이 넘는 고가의 장비로, 신약개발 주기를 단축시킨 일등공신이다. 선진 제약회사들은 이미 HTS 시스템으로 일주일에 수십만개씩 신물질을 검색해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구조의 히트물질을 도출하고 최적화과정을 거쳐 선도물질을 창출하고 있다.
HTS 시스템으로 하루에 검색할 수 있는 화합물 수는 약 5천-1만개 정도다. HTS가 도입되기 전에는 연구원 1인이 1년 간 약효를 검색할 수 있는 화합물 수는 2-3만개 정도였으나, 현재는 자동화된 HTS를 이용해 연구원 1인당 1년에 약 2백50만개의 화합물 약효를 검색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조합화학 등을 이용한 수십만개의 화합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새로운 라이브러리의 구축이 더욱 절실해졌다. 검색할 새로운 물질을 대량으로 만드는 기술과 초고속으로 검색하는 기술이 완비됐으니, 이제는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설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화합물은행은 방치되고 있는 화합물을 위탁받거나 매수해 DB작성 등 화합물의 종합적인 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수집한 화합물을 대상으로 HTS를 지원하기 위한 기관이다. 국내에는 지난 2000년 3월 28일 한국화학연구원 내에 ‘한국화합물은행’(Korea Chemical Bank)이 설립돼 운영중이다.
화합물은 신약연구에서 마치 자본주의 사회의 돈과 같은 역할을 한다. 돈은 사회라는 거대한 생명체를 움직이는 혈액과 같다. 어느 순간 돈의 흐름이 막히면 사회가 마비되듯 화합물의 공급(합성)과 수요(약효시험) 간에 흐름이 원활하지 않으면 신약연구는 중단될 수밖에 없다. 돈의 흐름을 조절하고 효율적인 투자를 통해 돈의 가치를 증폭시키는 시중은행의 역할을 신약연구에서는 화합물은행이 담당한다. 즉 화합물은행에서는 조합화학 등을 통해 확보된 다수의 화합물을 저축받아 실수요자인 약효시험기관에 대출해줌으로써 유효물질 발굴을 지원하고 화합물의 가치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약으로 개발되면 대박
돈은 은행에 맡기면 투자를 통해 이자를 벌 수 있지만 화합물은행에서는 어떻게 가치를 창출할까. 화합물은행에 화합물을 예금하거나 대출받은 사람은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로열티를 나눠 갖는다.
순도 90% 이상의 합성화합물은 1mg당 1-10달러. 금값의 수십배지만 신약으로 개발되면 최소한 1조원 이상의 가치를 창출한다. 그러면 한국화합물은행의 자산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현재 약 5만개의 화합물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화합물은행은 국제적인 화합물 시세를 고려할 때, 약 2백50억원의 자산을 보유한 초우량 지주은행이다. 2007년까지 15만개 이상의 화합물을 수집해 5백억원 이상의 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화합물은행은 질환 단백질을 기반으로 한 신약 설계에도 큰 몫을 한다. 화합물은행은 화합물의 구조와 물성 등 화학적 정보와 활성과 독성 등 생물학적 정보를 데이터로 정리, 체계적으로 보관한다. 이 정보는 화합물과 단백질 간의 결합패턴을 파악하고 예측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냄으로써 구조기반 신약연구에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미래 신약후보의 온상지
화합물은행은 미래 독창적인 신약으로 성장할 씨앗인 화합물을 관리하고 보관하는 ‘온실’ 역할도 한다. 선진 제약회사들은 이미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화합물 수집 전담부서를 가동하면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수십만종의 화합물을 수집, 선도물질을 창출하는 씨앗으로 활용하고 있다.
최근의 신약개발연구는 숫자게임으로 인식된다. 미국과 유럽의 선진 제약사는 더 많은 화합물로 더 많은 검색이 이뤄져야 신약개발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확신 아래 무제한적인 화합물의 확보와 약효검색으로 선도물질을 찾아내는 연구에 신약개발의 사활을 걸고 있다. 화합물의 수가 신약개발의 관건이라는 생각이다.
보유 화합물 수가 많으면 원치않은(?) 부수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연구개발 도중 새로운 약효가 입증돼 애초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 약효의 신약으로 개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판매되는 세계적 신약 가운데는 연구개발 도중 나타난 부작용을 이용한 약도 다수 있다.
미국 화이자사에 수십조원의 매출을 안겨준 비아그라도 처음에는 화이자 화합물은행에 보관돼 있던 선도물질을 이용, 협심증 치료제로 개발하다가 우연히 만들어진 신약이다. 미국 머크사가 만드는 대머리 치료제 ‘피나스테라이드’도 애초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로 연구했다. 우울증 치료제로 개발하다 금연효과가 발견돼 금연치료제로 개발된 ‘자이반’도 있다. 이처럼 보유 화합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화합물은행은 신약개발에서 ‘노다지’의 역할을 한다.
최근 신약연구의 화두는 최단시간에 최저비용으로 최고의 약효를 갖는 독창적인 신약을 남보다 빨리 창출하는 것이다. 신약연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자동화·미세화 기술에 기반을 둔 고효율합성(조합화학)과 약효시험(HTS)기술이 도입됐고, 이를 중재할 화합물은행의 역할 또한 중요시되고 있다. 경제성을 앞세운 21세기 생명공학시대에 조합화학-화합물은행-HTS로 이어지는 고효율 신약연구시스템을 확립해 국내에서도 독창적인 신약이 개발될 날도 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