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건국초기에 경주의 숲은 잘 보존됐고 박혁거세와 김알지의 탄생설화로 이어질 만큼 풍성했다. 하지만 통일을 이룬 뒤, 울창했던 삼림은 고급 연료인 숯을 만드는데 이용돼 파괴되기 시작했다. 천년왕국 신라도 경주 주변의 숲을 가꾸고 보전하는데 소홀했기 때문에 멸망했다고 하는데….
약 5천년 전 인류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에는 길가메시라는 전설적인 영웅이 있었다. 그가 먼저 시작한 일은 숲을 지키는 신 훔바바를 죽이고 울창한 삼나무를 베어버린 것이다. 곧이어 닥쳐온 가뭄의 신은 용케 물리쳤으나 엄청난 홍수는 피하지 못했다. 인류최초의 환경파괴에 의한 자연재해 기록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고대문명의 발상지는 생활편의를 위해 분별없이 숲을 망가트린 탓으로 찬란한 역사를 접어야했다.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천년왕국 신라가 멸망의 과정을 밟게 된 이유도 경주 주변의 숲을 가꾸고 보전하는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숯 이용한 기막힌 사기극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4대왕 석탈해는 어린시절 토함산에 올라 성안에 살만한 곳으로 호공이라는 고위관리의 집을 점찍었다. 그는 속임수를 써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았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조상이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마을에 간 동안, 호공의 조상이 그 집을 빼앗아 살고있는 것이라는 거짓말로 호공의 집을 차지했다. 이를 지켜본 남해왕은 석탈해가 지혜롭다고 여겨 맏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한다. 바로 이 자가 아니부인이다. 부인의 이름대로 석탈해의 등장은 ‘아니! 이럴 수가’였다. 분명 사기죄에 해당할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집을 탈취하고도 감옥은 커녕 남해왕의 사위가 돼 나중에 임금으로 출세한 것이다.
이 설화에서 당시 신라에는 쇠 만드는 산업이 발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장장이라는 제철기술자가 이웃마을에 스카웃 당해 불려다닐 만큼 대접을 받았으니 말이다.
쇠를 만드는 첫걸음은 섭씨 1천도가 훨씬 넘는 온도에서 쇠를 녹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무슨 방법으로 1천도가 넘는 온도를 얻을 수 있었을까. 석탄은 알려지기도 전이니 아마 숯을 이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숯 굽는 기술이 질 좋은 쇠를 만드는 기본인 것이다. 그래서 신라는 ‘두화탄전’이라는 부서를 따로 둬 숯을 관리했다.
신라 초기부터 제철의 연료이던 숯은 삼국통일의 전성기를 거쳐 후대로 내려오면서 차츰 다른 용도로 변해갔다. 전쟁에 이긴 나라로서 얻어지는 부는 삶의 안락함을 추구한다. 고급 숯은 연기가 나지 않고 열량이 높아 화로라는 난방기구에 제격이며 집의 아궁이와 벽을 그을리지 않아 밥 짓는 연료로도 그만이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 기록이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은 어느 날 신하들과 월상루라는 망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서 시중 민공에게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다 는데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저도 일찍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즉위하신 이후로 태평성대가 계속돼 해마다 풍년이 듭니다. 백성들은 생활이 안정되고 저잣거리에는 기쁨이 넘칩니다”라고 대답한다. 숯이 연료로 쓸 만큼 일반화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숯은 고급연료임에는 틀림없으나 자원 낭비가 심하다. 무게로 따져 질 좋은 숯은 원료가 된 나무의 1/10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산업용으로나 아껴 써야 할 숯이 고급관리는 물론 민가에까지 쓰임이 확산된 것이다. 당연히 숲은 파괴되고 수많은 나무가 잘려야 했다.
아! 신라의 숲이여!
숯은 주로 무슨 나무로 만들었을까. 사용 목적에 따라 여러 종류의 나무가 쓰였다. 귀신을 쫓는데는 뽕나무를, 고운 가루로 만들어 연마할 때는 버드나무를 주로 숯의 원료로 썼다. 하지만 역시 화력이 좋은 대표적인 숯은 참나무를 이용했다. 참나무는 비중이 크고 수분이 적어 숯을 만들면 단단하면서 열량이 높다. 신라 때의 숯은 대부분 참나무로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됐다. 1996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경주 경마장 건설 예정부지를 발굴한 결과, 숯을 굽던 피리모양의 여러 가마가 확인됐다. 신라 중기 것으로 짐작되는 이 숯가마는 대량공급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 중 한 가마에서는 안쪽에 많은 숯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분석해보니 짐작한 대로 참나무로 만든 숯이었다.
당시의 숲은 발굴되는 유적 자료와 기록, 그리고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뤄봐 지금의 경주와는 달리 소나무가 아니라 참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넓은잎나무가 대부분을 이뤘다. 참나무는 숯으로 없어지고 다른 종류의 나무는 불 때는 나무로 써버려 경주 부근의 숲은 계속 파괴돼 갔을 것이다.
참나무가 줄어드는 현상은 숯 생산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서민의 배고픔과도 관련된다. 참나무의 도토리열매는 흉년이 들 때 대용식으로 먹을 수 있는 귀중한 식량자원이기 때문이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나무가 없어진 민둥산은 가뭄을 몰고 왔다.
이렇게 되면 인심이 흉흉해지고 나라의 기강은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헌강왕의 숯’이 기록된 해부터 불과 10여년이 지난 891년에는 궁예가 명주의 관공서를 습격했으며, 다음 해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다. 숯으로 밥을 지어 연기도 나지 않는 경주의 거리를 보고 임금을 비롯한 지배계층은 ‘아름다운 서울에서 살렵니다’를 열창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숯으로 나타난 신라말기의 호사스런 생활이 50여년 뒤인 935년에 나라가 송두리째 붕괴해 버리는 역사의 한가닥이 된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숯은 나무를 태운 후 남는 시꺼먼 탄소 덩어리를 말한다. 탄소가 90% 이상이며 약간의 미네랄과 회분이 들어있다. 숯은 미로처럼 얽힌 수많은 구멍을 갖고 있는데, 이를 모두 합치면 1g의 숯에도 정구장 넓이의 표면적이 있다. 이 구멍은 숯의 주요한 특징으로 여기에는 물 분자를 붙잡을 수 있는 ‘작은 손’이 수없이 많다.
약방의 감초, 숯
흔히 숯이라고 말하지만 그 종류는 다양하다. 장작으로 불을 지피고 나무가 벌겋게 타올랐을 때, 물이나 흙을 끼얹어 불을 꺼 만드는 검은 재가 ‘뜬숯’이다. 하지만 뜬숯은 불완전 연소된 부분도 있고 단단하지 않으며 숯의 특징인 구멍도 적어 엄밀히 말해 숯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전형적인 숯은 숯가마를 사용해 구운 흑탄과 백탄을 말한다. 숯가마에다 나무를 넣고 공기를 차단해 가열하면 완전 연소가 일어나기 힘들다. 이때 수분은 날아가고 나무의 화학성분은 탄소 덩어리로 변해 숯으로 남는다.
흑탄은 온도를 섭씨 6-7백도로 구워 숯가마 안의 공기를 막아 불을 끄고 며칠 뒀다가 자연적으로 식혀서 꺼낸 숯이다. 표면이 검게 보이므로 흑탄이라 한다. 백탄은 숯가마 내의 온도를 섭씨 1천도 이상 올려서 구운 다음 벌겋게 달아있는 상태에서 꺼내 흙, 재 등을 덮어 빠른 속도로 불기를 꺼버린 숯이다. 표면의 빛깔이 희끗희끗해 백탄이라고 한다. 흑탄은 주로 공업용이나 여과용으로 쓰고, 백탄은 두드리면 쇳소리가 날 만큼 단단하고 열량이 높으며 타는 시간이 오래가므로 주로 연료로 쓰인다.
인류가 처음 숯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불을 사용하면서부터이니, 흔히 쓰는 연료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구석기 유적인 석장리 유적, 충북 청원군 강외면의 청동기시대 유적, 경주의 천마총을 비롯해 수많은 유적에서 숯이 나오고 있다.
숯의 용도는 강력한 화력을 이용해 철을 만들고 고급연료로 쓰는 것 이외에도 다양하다. 그 자체가 탄소 덩어리이므로 숯으로 둘러싸면 안쪽은 썩지 않는 차단막을 설치한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신을 오랫동안 보존하고자 무덤에 숯을 사용했다. 중국의 경우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들어진 전한의 마왕퇴(馬王堆) 무덤은 나무관의 바깥둘레를 숯으로 두께 약 50㎝의 층을 만들어 시신이 그대로 보존되도록 처리했다.
또한 숯은 먹을 거리의 부패를 막을 목적으로도 쓰였다. 대표적 예로 된장을 담을 때 쓰는 숯을 들 수 있다. 된장독에 숯 몇개를 띄워 두면 된장은 썩지 않을 뿐더러 숯의 수많은 구멍은 발효미생물에게 서식처를 제공한다. 또 우리의 전통 민속에는 아이가 태어난 집 대문 앞에 금줄을 다는데, 여기에 사이사이 숯이 끼어있다. 신성한 곳임을 표시하고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막으며 잡귀가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숯은 변하지 않은 물건이며 숯은 ‘숫’과 같으니 아들을 염원한 것이요, 숯이 먹과 색이 같으니 선비가 되라는 주문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더욱이 숯은 예로부터 약제로 활용됐다. 조선초기의 의서인 ‘향약집성방’에는 파상풍과 타박상을 비롯해 숯을 이용해 치료할 수 있는 여러가지 질병이 소개돼 있다. 또 숯은 굽는 온도와 첨가물에 따라 거의 금속과 맞먹는 속도의 전기흐름을 얻을 수 있어서 전자파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그 외 요즘은 숯을 이용한 여러가지 건강상품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상당 부분은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에 불과하지만 바야흐로 숯 문화의 전성시대가 돌아왔다. 철을 만드는 연료뿐 아니라 고급연료로서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숯은‘건강’이라는 명제를 앞세우고 다시 살아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