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춥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적막한 분위기가 천지에 가득하면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가까운 이들과 다과상에 정담을 나누는 것이 상책이다. 이 분위기에 무척 잘 어울리는 그림이 추사가 제주 유배생활중에 그렸다는 세한도(歲寒圖, 1844년)다.
세한도는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화제도 그렇지만,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추사의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는 듯한 간결하면서도 쓸쓸한, 그리고 꿋꿋한 선비의 기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한편 세한도를 자세히 보면 아무리 문인화라고는 하지만 한가운데 있는 집의 생김새가 여간 어색하지 않다. 단층의 길쭉한 일자집에 삼각형의 박공지붕을 이고, 박공면으로 원형의 출입구 겸 창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집은 긴 변을 정면으로 삼아 출입구를 뒀고, 몇몇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고서는 원형의 창호를 갖지 않는다. 또 벽체도 나무골조로 만들고 그 사이 빈 공간을 흙벽으로 마감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어서 이 그림에서와 같이 밋밋한 담집은 보기 힘들다. 이런저런 이유로 세한도의 집은 아무래도 우리나라 집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당시 우리나라 문화전반에 많은 영향을 줬던 중국의 일반적인 집을 그린 것은 아닐까. 실제로 조선시대 그림 중에는 그림 속의 풍경이나 동식물, 심지어 집마저 중국 대가의 작품을 그대로 모방한 작품이 많다. 또한 추사는 동지사로 북경에 가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을 방문한 일이 있고, 그곳 학자들과의 교류가 돈독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세한도에 나타난 집은 중국풍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일부 학자는 세한도 가옥의 중국풍을 지적하면서 추사를 사대주의자로 몰아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중국의 집은 주요 구조부를 나무 골격으로 짰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집과 같지만, 양측벽과 후면벽을 벽돌로 두껍게 쌓아올리고 정면에만 창호를 두는 매우 폐쇄적인 모습을 갖는다.
따라서 전체적인 외관이 세한도의 집처럼 벽돌담에 박공지붕을 단촐하게 올린 단정한 모습이다. 측면벽의 원형 창호 역시 벽돌담에 어울리는 요소다.
벽돌과 나무의 절충식 구조
벽돌이나 돌을 쌓아서 만든 구조를 조적조라 하고, 나무를 가로세로로 엮어서 만든 구조를 가구조라고 한다. 이 외에 요즘 많이 사용하는 철근콘크리트나 진흙으로 지은 집과 같이 전체가 한덩어리로 되어 있는 일체식 구조가 있지만, 앞의 두가지가 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다. 역사적으로 서구 문명권에서는 조적조가 많이 사용됐고, 동아시아에서는 가구조가 주로 사용됐는데, 세한도의 담집은 그 중간쯤 된다.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동북부지역은 나무가 많지 않은 황토지역이다. 따라서 집 전체를 나무로만 짓기보다는, 집의 주요한 구조체는 나무로 하고 외벽은 벽돌로 쌓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에 이같은 절충식의 구조가 발전했다. 또한 벽돌로 외벽을 두텁게 하면 화재에도 잘 견디고 추위에도 강한 집이 되는 장점이 있다.
한편 세한도가 그려진 19세기 전반의 조선 그림은 영·정조대의 이른바 ‘진경산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자연을 직접 답사해 그 실제풍경을 그리는 화풍이 정착했다. 또한 세한도가 그려진 시기는 우리 풍속화의 대가인 김홍도가 활동했던 시기와도 겹친다. 추사가 과연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도외시한 채 관념으로만 그림을 그렸을까. 당시의 실제 건축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양한 조류 속에서 가치 발하는 전통문화
세한도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창덕궁 후원의 선향재(善香齋)는 이 같은 의문에 해결의 단서를 제공한다. 선향재는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경당의 서재로 지어진 집이다. 연경당은 당시의 사대부가를 본뜬 형태로, 조선후기 사대부의 권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다. 그러나 연경당은 사대부가를 모방하기는 했지만 살림을 하는 집이 아니었던 만큼 일반적인 주거건축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안채나 사랑채, 부엌 등이 없고 ‘반빗간’이라고 하는 별도의 주방 건물을 뒷마당에 설치했다. 또한 서재격인 선향재를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당당한 규모로 지은 점도 예사 집에서 볼 수 없는 일이다. 선향재는 전면에 설치한 차양도 특색있지만, 측면벽과 후면벽을 모두 벽돌을 쌓아올려 마감한 집으로 세한도의 집과 같이 중국의 제도를 본따 지은 집이다.
이처럼 중국풍으로 지은 집은 선향재가 지어지기 이전인 1820년대 초반의 ‘동궐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실물로 남아있는 것으로 경복궁의 집옥재와 자하문 밖 부암동에 있는 석파정의 사랑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집의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집들이고 당시 왕실과 세도가의 중국취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한도에 나타난 집이 중국풍을 띠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관념이 아닌 당시 조선 사회에 유행하던‘중국풍’을 쫓은 것뿐이다. 세한도의 집이 중국풍이라고 해서 세한도를 중국의 문화자산이라고 할수는 없으며, 그 가치가 평가절하돼서는 안된다. 흔히 우리는 전통문화를 주장하며 그 독자성과 고유성만을 강조하는 일이 흔한데, 어느 시대이건 문화는 순수한 자국내의 동인만으로는 추진력을 갖지 못한다. 활발한 문화교류를 가질 때 그 문화는 더욱 풍부해지고 심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