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지갑 속에 카드 서너장을 기본으로 갖고 다닌다. 카드로 볼록해지는 지갑이 불편하지만 다양한 혜택과 기능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이 모든 혜택을 단 한장으로 누릴 수 있다는 스마트카드가 출시돼 화제다. 그 개념과 원리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건무는 버스의 빈자리에 앉자마자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안경에 서린 김을 닦았다. 같은 반 친구인 현수가 “건무야, 넌 좋겠다. 자그마치 문화상품권이 얼마니?”라며 건무를 툭 친다. 건무는 기분이 뿌듯했다. 얼마 전 환경보호 전국학생 글짓기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고, 오늘 아침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그 상을 받았다. 상장과 상패 외에도 문화상품권을 20장이나 받았다. 며칠 후면 겨울방학이고, 이 상품권으로 갖고 싶은 책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행복했다.
2004년 12월. 방학을 앞둔 건무와 현수는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다. 지금도 대학 입시준비에 바쁘긴 하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는 편이다. 건무는 왼쪽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자신의 학생증을 쳐다봤다. 학생증 오른쪽에는 사진이 붙어있고, 아래에는 ‘김건무’라고 쓰여 있다. 왼쪽에는 금색으로 반짝이는 IC칩이 붙어있다. 오늘 아침에 받은 상품권은 이 카드로 만들어진 학생증 속에 들어 있다.
건무는 조금 전에 이 카드로 버스를 탄 것을 새삼스레 기억했다. 학생증이 들어있는 수첩 채로 버스 탑승구에 있는 단말기에 살짝 대면 버스요금이 지불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주 금요일에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할 때에도 이 카드를 사용했다. 그런데 버스를 탈 때는 카드를 수첩에 넣은 채로, 도서관에서는 수첩에서 꺼내 사용했다.
의문이 들자 카드를 이용한 다른 일들이 이것저것 생각났다. 용돈을 주실 때, 어머니가 컴퓨터 앞에서 은행을 연결한 뒤 컴퓨터에 붙어 있는 작은 단말기에 어머니의 카드를 넣고 금액을 정한다. 그리고 다시 그 속에 건무의 카드를 넣어 용돈을 넘겨주신다. 건무가 용돈을 확인하려면 어머니의 화장대 서랍에 있는 잔액표시기라고 된 작은 계산기만한 기계에 자신의 카드를 넣으면 남은 용돈이 얼마인지 알 수 있었다.
병원에 갔을 때도 몇해 전까지 사용하던 건강보험카드 대신 학생증 카드를 간호사 누나에게 건넸고, 안경점에서는 컴퓨터 옆의 단말기에 카드를 넣어 확인한 다음 안경을 만들어줬다. 건무가 초등학교나 중학시절만 해도 시력검사표를 받아서 안경을 맞췄는데, 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학생증 카드를 꺼내 이용하게 됐고, 그것이 전혀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 작은 카드에서 그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일까.
IC칩에 달린 8개의 접촉점
최근 인증, 지불, 보안 등 다양한 기능을 자랑하는 스마트카드가 급부상하고 있다. 스마트카드란 말 그대로 카드를 이용해 신분을 증명하고 돈을 지불하며 자신의 정보를 보호할 수 있는 ‘똑똑한’ 카드를 말한다. 기존의 마그네틱 카드보다 제조비용이 10배 이상 비싸지만, IC칩이 장착돼 대용량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스마트카드는 1974년 프랑스의 롤랑 모리노에 의해 탄생했다. 그는 스마트카드를 최초로 형상화하고 특허를 출원한 후 회사를 설립했고, 특허를 판매한 덕분에 상당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선 1968년에는 제르겐 데쓰로프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사용하는 스마트카드에 대한 개념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스마트카드는 동작원리와 방법에 따라 크게 네종류로 나뉜다. 접촉식 카드, 비접촉식 카드, 접촉식 카드와 비접촉식 카드 각각의 기능을 한장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물리적으로 결합시킨 하이브리드 카드, 이 두 기능을 상호연동하면서 쓸 수 있도록 논리적으로 결합한 콤비 카드가 그것이다.
초기의 스마트카드는 IC칩 내에 마이크로프로세서(CPU)를 내장하지 않은 단순한 메모리 카드의 개념으로 사용했다. 1977년 모토롤라와 불사가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독립된 메모리를 가진 카드를 생산해 프랑스 금융서비스 분야에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CPU가 내장된 본격적인 스마트카드의 시대가 열렸다. 2000년을 기준으로 전세계적으로 스마트카드가 보편화되고 있는 분위기이며, 아시아의 경우에도 1990년대 들어 매년 2배씩 성장하면서 주요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접촉식 카드부터 살펴보자. 접촉식 카드의 대표적인 사례는 수년 전 등장했지만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직불카드(Debit Card)다. 이 카드는 CPU를 내장하고 있으며 운영체제의 저장을 위한 ROM, 원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임시처리공간인 RAM, 애플리케이션을 저장하는 EEPROM, 외부의 단말기와 연결하기 위한 입출력 포트 등을 갖고 있다. 즉 카드 형태로 축소된 컴퓨터인 셈이다.
접촉식 카드는 IC칩 외부에 8개의 접촉점을 갖고 있다. 단말기에 카드를 삽입하면 이 접촉점에 연결된 전원공급 라인을 통해 외부에서 전기를 공급받아 그 힘으로 동작하게 된다. 단말기에서 동작을 요구하는 신호를 보내면 ROM에 저장된 운영체제에서 그것을 파악해 요구에 맞게 처리한 후 처리내용을 되돌려 준다. 이렇게 처리하는 운영체제를 COS(Chip Operating System)라고 부르며, 컴퓨터의 운영체제인 도스나 윈도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유도전류 발생시키는 원리
비접촉식 카드는 RF카드(Radio Frequency Card)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수도권에서 사용중인 교통카드가 대표적인 사례다. RF카드는 RF 주파수를 통해 근거리에서 정보처리가 가능하며, 메모리에 사용자의 거래정보가 기록되면 센터에서 결제하는 방식으로 처리된다. CPU가 탑재된 접촉식 카드에 비해 보안성은 떨어지지만 신속성이 매우 중요한 교통 분야에서는 용도에 딱 맞게 활용될 수 있다. 이미 신용카드형과 버스카드형을 합쳐서 1천만장 이상의 RF카드가 보급됐다. 비접촉식 RF카드는 어떻게 동작하며, 접촉식 카드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RF카드의 구조는 접촉식 카드와 달리 전원을 공급하거나 연결할 수 있는 단자가 없다. RF카드의 내부는 반도체칩, 콘덴서, 유도코일로 구성돼 있다. 카드를 읽어들이는 단말 장치에서는 지속적으로 자계를 발생시키면서 대기하고 있으며, RF카드가 단말 장치 부근으로 이동하면 카드 내부의 코일에 유도전류가 발생한다. 발생된 유도전류는 반도체칩의 제작시 함께 제작된 공간에 저장되고, RF카드가 단말 장치로부터 지시받은 일을 수행할 때까지 짧은 시간동안의 전원으로 이용하게 된다.
모네타카드, KTF멤버스카드, M-plus카드 등 최근 떠오르고 있는 통합형 카드는 접촉식 카드와 비접촉식 카드의 기능을 한장에 물리적으로 결합한 형태다. 즉 기능이 다른 두 종류를 단지 한장의 카드 위에 접합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두장의 카드를 지녀야 하는 불편함을 한장의 카드로 통합한 것을 하이브리드 카드라고 부른다. 여기서 한단계 발전한 개념이 콤비 카드다. 이 카드는 접촉식 카드와 비접촉식 카드를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결합시킨 경우다. 물리적으로 결합시킨 하이브리드 카드의 경우 각각의 기능이 상호연동할 수 없지만, 논리적으로 결합된 콤비 카드는 각 기능의 상호연동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접촉식으로 사용될 부분에 10만원을 충전했을 경우, 하이브리드 카드라면 비접촉식 기능으로 이 돈을 사용할 수 없겠지만, 콤비 카드의 경우라면 사용이 가능하다.
모든 기능을 한장에 통합한다
지금까지 별도로 사용해야 했던 신용카드, 전자결제카드, 전자식티켓과 입장권, 로열티카드, 회원카드, 학생증, 운전면허증, 전자식 주민등록증 등이 스마트카드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지갑이 불룩해지도록 현금을 넣어 다니거나, 현금으로 물건을 사고 잔돈을 거슬러 받는 일이 조만간 없어질 것이라는 전망처럼 스마트카드의 대표적인 이용분야는 전자화폐다. 전자화폐는 말 그대로 전자적인 기호의 형태로 화폐의 가치를 보관해둔 것을 말한다. 전자상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전자화폐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전자화폐를 현금과 비교했을 때의 가장 큰 이점은 각종 거래가 네트워크에서 전자적으로 간편하게 실행할 수 있으며, 유통비용이 절감된다는 것이다. 이미 대중교통요금 지불 분야에서 수도권 인구의 절반이 사용하고 있고, 이 교통요금을 지불하는 교통카드를 이용해 아무나 회사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하는 출입통제시스템에 적용할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자동판매기나 학교 내의 구내매점 등에서 결제의 수단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많은 이용 분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스마트카드는 카드마다 그 전문분야가 독립적인 기능을 갖고 있어 상호간 연결되지 않고 있다.
교통 부분에 주로 사용되는 비접촉식 카드로는 전자화폐 부분에 이용하기가 어렵고, 전자화폐 부분에 시험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접촉식 카드는 교통부분의 신속성을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갖고 있다. 상호연동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사용자는 용도별로 서로 다른 카드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마다 서로 다른 카드를 발급하게 되고, 지갑 속에는 여러장의 카드를 지녀야 하는 불편함이 악순환된다. 스마트카드의 종류 가운데 하이브리드 카드처럼 신속성과 보안성을 동시에 충족할 수 없는 서로 상반된 기능을 가진 두 종류의 스마트카드를 하나의 카드에 복합시킨 카드를 시험적으로 운영하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카드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카드 한장으로 수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할 순 없는 것일까. 스마트카드를 연구하는 수많은 전문가와 스마트카드를 이용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러 사업자들은 개방형 스마트카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개방형 스마트카드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개방형 스마트카드란 카드 각각의 서비스 간에는 서로 침범할 수 없고 보호받을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이 할당돼 전자화폐는 전자화폐대로, 학생증은 학생증대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각각의 서비스인 응용 부분들은 해당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의 홈페이지 또는 단말 장치에 연결해 애플릿이라고 불리는 응용 부분의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아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마치 한대의 컴퓨터에서 워드프로세서와 스프레드시트, 그리고 이미지편집 프로그램을 한꺼번에 불러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경우 각 프로그램들의 로딩방법, 응용 프로그램의 독립된 영역 할당, 파일 할당 등을 운영체제인 윈도가 하듯 개방형 전자화폐에서의 각 애플릿의 로딩과 관리는 카드의 운영체제 역할을 하는 COS에서 관장한다. 다만 컴퓨터는 각각의 프로그램을 종료하거나 컴퓨터를 끄면 프로그램을 다시 로딩해야 하지만, 스마트카드에서의 독립된 응용 프로그램인 애플릿은 한번 로딩하면 그것을 지우기 전까지는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개방형 스마트카드에서 각각의 애플릿은 자신의 고유 ID를 갖고 있으며, 카드 내에서의 식별은 이 ID로 한다. ID의 식별방법은 국제표준에서 정하는 규약에 따르도록 돼 있다. 또한 우리가 컴퓨터에서도 메모리의 한계로 많은 프로그램을 동시에 로딩할 수 없듯, 스마트카드의 메모리 한계로 인해 사용할 수 있는 애플릿을 모두 로딩할 수는 없다.
돈의 흐름과 출처 파악이 문제
이처럼 다양한 요구에 대응하는 기술 개발의 이면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 있다. 바로 보안 문제다. 스마트카드를 이용한 전자화폐의 경우 카드 자체가 돈이며, 카드를 분실할 경우 돈을 잃어버린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전자화폐를 은행을 경유하는 경우를 제외한 카드와 카드 간의 거래를 허용하고 있지 않지만, 해외에서 통용되는 일부 전자화폐는 카드와 카드간의 이체를 기본으로 채택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카드와 카드 간의 이체란 용돈을 받을 때 현금으로 받고 가까운 사람끼리 적은 돈을 빌려주거나 받을 때 현금으로 빌려주고 받는 것처럼 은행을 경유하지 않는 방법이다.
전자화폐가 은행을 경유하지 않을 경우 익명성이 보장되고 돈의 흐름을 추적할 수 없게 된다. 각국마다 이러한 문제에 대비해 카드로 사용할 수 있는 전자화폐의 금액을 제한하고 있으며, 스마트카드로 사용하는 전자화폐의 범위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현재와 같이 은행의 온라인을 이용하여 이체할 수 있게 한다.
은행을 경유하지 않으면 돈의 흐름과 출처를 알 수 없으므로 불법으로 돈을 이용하려는 집단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폐의 위조와 가치의 불법적인 초과사용, 불법적인 현금 전달이나 불법적인 현금 인출 등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돈의 흐름이 네트워크를 통해 이뤄지므로 네트워크 해킹을 통해 동일한 문제들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한 문제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스마트카드는 점점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을 그만큼 더 편리하고 윤택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미래에 상용화될 스마트카드는 각 회사별, 서비스 내용별로 서로간의 연계성이 부족하고 호환성이 없었던 문제들을 해결하고 한장의 카드로 모든 지불과 기능을 통합하는 시대를 이끌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