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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통나무배 중 하나가
2004년 경남 창녕 비봉리에서 발굴됐다.
우리 전통배는 신석기시대 비봉리 통나무배 외에 통일신라 안압지배,
8척의 고려 한선이 발견됐다.
바닥이 평평해 서해나 남해 연안을 다니기에 적합한 우리 배가
놀랍게도 중국 산둥성까지 왕래했다는데….

“2004년 봄 태풍의 피해를 막기 위한 양배수장을 건설하던 중 조개껍질, 토기 조각, 나무 동강이 확인됐다. 어렵사리 지표에서 6m 이상을 내려가서야 배를 찾았다.”
지난해 9월 중순 국립김해박물관이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신석기시대 유적 발굴성과를 정리해 공개한 정식 보고서 ‘비봉리’(飛鳳里)의 일부다. 주변 산세가 봉황이 나는 모양을 닮은 덕분에 비봉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 마을의 유적에서 통나무배 2척이 출토됐던 것. 2척 중 하나(1호)가 발견된 층의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8000년 전까지 올라간다.

1호 배의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가 310cm, 최대 폭이 62cm, 그리고 두께가 2~5cm이다. 이 배는 큰 나무 하나를 파내면서 전체적으로 균일하게 잘 다듬었으며, 제작 시 쉽게 가공하기 위해 불에 태운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또 돌 자귀(도끼)로 깎은 뒤 마석(돌)으로 곱게 간 흔적도 보인다. 이는 선박 발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조방식이자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통나무배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이다.

비봉리 통나무배는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발굴된 선박 중 가장 오래됐다. 이 배는 2000~2002년 중국 저장성 신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통나무배(기원전 6000년), 네덜란드에서 발견된 통나무배(기원전 6300년경)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통나무배로 손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선박 중 비봉리 통나무배 다음으로 오래된 배는 통일신라시대 ‘안압지배’다. 고려시대 선박은 지금까지 모두 8척이 발견됐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조가 단순해지고 날렵해졌다. 우리 전통배를 과학으로 들여다보자.

한선의 기틀 보인 안압지배
문명이 태동하던 시기에 강가에서 살던 인류는 통나무, 파피루스 같은 갈대, 돼지 껍질 같은 가축 표피로 배를 제작했다. 이런 배는 물고기를 잡고 사람이나 물자를 실어 나르며 때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쓰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해양활동이 활발했다. 예를 들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좌우에 궁인 10여 명을 데리고 현재 우리 삶의 터전인 삼한 땅으로 이주해 올 때 그 일행은 배를 이용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소백산 넘어 서라벌에 머물던 신라가 끝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경기만과 중국을 잇는 해상로를 확보해 대당외교를 독자적으로 펼치고 당과 공동으로 군사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진평왕 8년에 선부서(船付署)를 설치해 선박을 건조하고 관리했다.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통나무배인 안압지배는 통일신라시대에 연못이나 강에서 사용된 놀이배로 보인다. 길이가 5.9m에 앞쪽 폭이 0.6m로 좁지만 뒤쪽 폭이 1.5m로 비교적 넓고, 높이가 0.35m이다. 폭에 비해 길이가 길어 이전 배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었던 안압지배. 하나의 나무통을 파내 만든 비봉리 통나무배와 달리 나무 3개를 깎아 서로 잇대어 만들었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안압지배는 단순 통나무배에서 본격적인 구조선(構造船)으로 발전하는 중간단계(준구조선)다. 여러 목재를 사용해 배 폭을 크게 하며 원하는 모양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안압지배는 바닥이 평평하다는 사실이 또 다른 특징이다. 또 이 배는 가운데판에 사각형 구멍을 여러 개 내고 여기에 기다란 나무못을 박아 양옆의 다른 두 개의 선편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배의 형상뿐 아니라, 긴 나무못을 이용해 배의 바닥재를 연결하는 건조법은 우리 배의 기본 틀이다.

우리 배에 대한 연구에서 큰 업적을 남긴 김재근 전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통선인 ‘한선’(韓船)은 종류나 연대와 상관없이 모두 바닥이 평탄한 평저선(平底船)이다. 사실 평저선은 중국이나 일본의 전통배처럼 바닥 중앙을 길게 차지하는 사각 목재인 용골이 있어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에 비해 성능이 떨어진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첨저선이 속도가 빠르고 똑바로 진행하는 직진성이 뛰어나다.

우리 선조들은 왜 평저선을 고집했을까. 수심이 얕고 밀물과 썰물의 변화가 심한 서해안과 남해안에서는 배 밑이 평평할수록 균형 잡기 좋고 이동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평저선은 썰물 때 개펄에 내려앉기 좋고 물에 덜 잠겨 얕은 연안에서도 움직이기 좋다. 또 풍랑을 피해 육지로 끌어올리기 쉽다.

한선은 넓고 두꺼운 저판을 밑에 깔아 맞붙이고 이들을 나무못으로 연결해 고정시킨 뒤 양쪽 가장자리에 외판을 각각 짜 맞추며, 쇠못 대신 피쇠라는 나무못을 이용해 외판을 연결한다. 또 중국 배나 일본 배에서 볼 수 있는 격벽 대신 가룡목이란 긴 나무로 양쪽 외판을 연결해 옆에서 오는 힘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었다. 뱃머리인 이물과 배 뒷부분인 고물에는 비우라는 판재를 배 진행 방향과 수직으로 저판과 외판에 연결시켜 선체를 완성시킨다. 끝으로 맨 꼭대기 외판 위에 멍에를 설치하고 갑판을 깐 뒤 돛대를 세운다.

시속 13km 넘지 못한 완도선

한선의 전형적인 모습은 1983년 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바다에서 발견돼 그 이듬해에 인양된 11세기 중·후반 배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완도선은 이물과 고물이 썩어 없어져 그 형태를 알 수 없으나 남은 잔해의 형태로 판단하면 이물은 곧고 넓으며, 고물은 비교적 좁고 배꼬리 쪽으로 길게 뻗은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배 밑과 일부 외판이 남아 있었고 가룡목의 흔적도 뚜렷했다. 배 밑에는 선체 중앙 부근에 돛대를 꽂는 구멍이 하나 남아 있어 이 배는 돛 하나로 항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흙 뻘에서 인양한 선체의 잔해로부터 선형을 비교적 소상하게 어림할 수 있어 배를 실제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

완도선은 배 밑 저판에 5재(材, 목재를 세는 단위)의 두터운 목재를 옆으로 나란히 잇댄 다음, 목재 옆구리에 구멍을 내 사각형의 긴 나무못(장쇠)으로 연결한 전형적인 평저형 한선이다. 가장 눈에 띄는 구조는 저판과 외판 사이에 끼워 넣은 커다란 ㄴ자형 목재다. 이를 ‘만곡종통재’라 한다. 맨 바깥쪽 저판 윗면 끝단에 턱을 파 만곡종통재와 연결하고 이 만곡종통재 위로는 외판을 연결했다. 외판은 5재로 짜 나갔는데, 나무로 만든 피쇠로 연결시킨 뒤 핀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연결방식은 우리 전통 한선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소위 클링커(clinker, 반턱이어붙임)식이라 부르는 턱붙이 겹이음이다. 즉 아랫판의 바깥쪽을 반턱으로 파낸 뒤 윗판을 그 위에 얹는 식이다.

저판 하나는 두께가 18~20cm, 너비가 30~35cm이며, 저판 폭은 선체 중앙면에서 1.65m이지만 만곡종통재까지 포함하면 2.3m가 된다. 또 5번째 외판 끝에서 배 폭은 3.5m, 깊이는 1.7m 정도며, 배 밑면의 길이는 약 6.5m다.

컴퓨터그래픽과 현대적 선박계산법을 이용해 완도선을 분석해보면 흥미롭다. 이 배는 화물을 10여t까지 실을 수 있어 총 18.6t이 나가고 물 위에 떠 있을 때 대략 1m가 물에 잠길 것으로 추정된다. 전산유체역학을 이용해 저항을 계산한 결과를 보면 7노트(시속 13km) 근처에서 전체 저항이 급격히 증가는 것으로 나타나 이 배의 항해속도는 7노트 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만곡종통재 사라지다
완도선을 비롯해 지금까지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 8척을 시기에 따라 살펴볼 때 중요한 부분은 바로 만곡종통재다. 만곡종통재는 통나무배를 제작할 때 저판과 상판을 이을 때 습관적으로 사용하다가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전북 군산 앞바다 십이동파도에서 발견된 11세기 배(십이동파도선)는 구조가 독특하다. 잠수부가 현장에서 조사한 결과 청자 2만여 점을 실은 이 배는 길이가 약 7m, 폭이 약 2.4m인 평저선으로 드러났지만, 특이하게도 좌현에 만곡종통재가 2개나 있었다. 완도선과 달리 저판 3개로 구성된 십이동파도선은 돛대 받침구멍이 완도선처럼 하나여서 연안을 다니던 소형 해선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2005년 전남 신안 앞바다 안좌도에서 발굴된 13세기 배는 완도선이나 십이동파도선과 달리 만곡종통재가 없었다. 즉 안좌도선은 외판이 바로 저판에 붙는 구조였다. 선박사에서 보면 고려시대에 만곡종통재는 2개(십이동파도선)에서 1개(완도선)로 줄었다가 아예 사라졌음(안좌도선)을 알 수 있다. 만곡종통재를 사용하면 배 폭이 넓어지는 효과는 있지만 만곡종통재 없이 저판과 외판을 잇는 방법을 개발한 일은 배를 간단하게 제작하는 기술적 발전이다. 선조들이 이 방법을 깨닫기까지 수백 년이 걸린 셈이다.

안좌도선은 길이 14.5m, 너비 6.1m, 깊이 0.9m로 지금까지 발굴이 끝난 우리 고선박 가운데 가장 큰 편이다. 특히 이 배는 만곡종통재 없이 저판 3개로 구성된 평저선인데도 저판이 5개이면서 작은 배인 완도선보다 경사각이 높고 날씬하다. 이는 고려 중기 이후 해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좀 더 크고 성능이 우수한 배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완도선은 이전 배보다 속도가 빠르고 조종성능이 좋다.

지금까지 발굴된, 만곡종통재가 없는 한선 중 가장 오래된 배는 대부도선이다. 2006년 12월 초 경기 안산 대부도에서 발견된 이 배는 함께 발견된 자기의 파편이 13세기 전반의 제품인 점을 감안하면 12세기 말 또는 13세기 초에 건조된 선박으로 보인다. 대부도선은 제작시기가 안좌도선보다 앞선다.

산둥반도서 발견된 봉래선의 비밀

놀랍게도 고려시대 선박 가운데 중국에서 발견된 배가 있다. 중국 산둥성이 2005년 7월부터 11월까지 봉래 옛 항구를 현대화하다가 남서쪽 구석에서 3척의 선박을 발견했다. 이 중에서 우리 관심을 끄는 배는 한선 구조를 한 봉래 3호선과 4호선이다. 특히 선체에서 길이 17.1m, 폭 6m에 이르는 상당부분이 남아 있는 봉래 3호선은 주목할 만하다.

봉래 3호선은 중국 배인 봉래 2호선과 나란히 발견됐는데, 두 배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한눈에 알 수 있다. 봉래 2호선은 이전에 발견된 명대 군선인 봉래 1호선과 모습이 같고 원대나 명대의 전선으로 추정된다. 가운데 매우 큰 용골이 이물에서 고물까지 뻗어 있고 많은 수의 외판이 완전턱맞춤 방식으로 맞물려 촘촘히 연결돼 있다. 반면 봉래 3호선은 선형이 안좌도선과 비슷하고, 가운데에 용골 대신 평평한 저판이 3개 놓여 있으며 폭이 비교적 넓은 외판 9개가 반턱이어붙임 방식으로 연결돼 있다. 즉 외판의 아래턱을 파고 나무못(피쇠)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봉래 3호선은 전체 길이가 20m가 조금 넘으며, 총중량이 160t, 실을 수 있는 화물의 최대중량이 90t으로 추정된다. 우리 한선에서 선원들이 물통과 소금통으로 사용하던 유물이 발견돼 고려 말에 한반도에서 제작한 것이 분명하다. 또 중국 배에 비해 뚱뚱하다는 사실도 평저형 한선의 특징이다.

하지만 봉래 3호선에는 격벽이 7개나 있고 쇠못이 사용된 점은 종래 한선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어찌 된 사연일까. 봉래 3호선은 원래 한반도에서 건조된 한선인데 산둥반도에서 항해하는 동안 파손돼 그곳에서 중국식으로 수리한 배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식으로 수리하는 바람에 가룡목을 제거하고 대신 중국식 격벽을 설치했으며, 이 과정에서 쇠못도 도처에 사용했다는 뜻이다.

평저형 한선은 중국이나 일본의 첨저선형에 비해 날씬하지 못해 파도를 헤쳐 나가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의 복건선은 인도나 아라비아까지 항해했으며, 일본의 견당사선은 당나라와 직접 교역했다. 이들은 길이 30m의 첨저선이라 성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봉래 3호선에서 보듯이 평저형 한선도 한반도에서 산둥반도까지는 어렵지 않게 항해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항순 교수는 독일 뮌헨공대에서 공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에서 해양구조물에 대한 교육과 연구를 담당해왔다. 틈틈이 우리 고대 한선을 연구해 국내외 학술대회에서 한선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같은 관련 서적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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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최항순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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