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역사 속에서 여성은 왜 소수일까.
여성과학자들을 둘러싼 사회문화적인 배경 속에서 그 답을 구할 수 있다.
남성 중심의 과학계에서 여성이 과학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를 살펴보자.
전세계적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여성 활동을 진작시키기 위한 각종 정책들이 줄을 잇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들 추세에 발맞춰 여성 과학자에 대한 각종 정책이 실시된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물론 과학 내 여성 불평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미 반세기 전에 시작됐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야' 하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말이다.
우리 사회는 과학 내 여성의 불평등 문제를 제대로 담론화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 사람들은 "여자가 과학을 해봐야 얼마나 하겠느냐"는 의구심을 갖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과학사가 론다 쉬빙어는 최근 저서에서 이미 르네상스 때에도 과학기술과 여성과의 연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여성이 있었다고 밝혔다. 1405년에 최초로 펜으로써 생계를 꾸려간 여성으로 알려진 크리스티안 드 피잔은 빵, 모직물 염색 기술, 양탄자의 발명은 여성의 독창성이 이뤄낸 산물임을 주장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과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등장한다. 1786년에 프랑스 천문학자 제롬 드 라랑드의 저서 '여성을 위한 천문학'에는 여성 천문학자들이 연대순으로 소개되고 있다. 여성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일환으로 이들이 소개됐던 것으로 보인다.
찰스 다윈, "천재는 남성의 독점 영역"
1830년대 독일 생리학자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할레스의 저서에는 과학 전분야에 걸쳐 여성 역할이 소개됐다. 여기에서 할레스는 여성과 남성이 과학에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그는 남성들은 현상 저편에 숨겨져 있는 원인들을 밝혀서 생명과 과학에 내재해 있는 법칙을 찾고자하는데 반해 여성은 사랑의 표현으로 자연을 연구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과학적 업적에 대한 조명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1880-1920년대였다. 이는 당시 부흥했던 유럽 여성 운동의 결과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저서인 알퐁스 르비에르의'과학 속의 여성'과 엘리제 욀스너의 '독일 여성의 업적'은 여성의 과학적 능력을 드러내주는 데 초점을 뒀다.
이에 대한 당시 보수 진영의 반응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은 "천재란 남성들의 독점 영역"임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시, 미술, 조각, 음악, 역사, 과학, 철학 분야에서 저명한 여성과 남성들의 이름을 성별로 적어보면, 두목록이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이 명백해질 것이다."
이탈리아의 반여성주의자 지노 로리아는 "아무리 뛰어난 여성들을 찾아봐야 그 명단이 3백 페이지를 넘지 않겠지만, 남성 명단을 작성하면 수천페이지는 넘고도 남는다"고 하면서 "어떤 여성이 피타고라스 또는 아르키메데스, 뉴턴 또는 라이프니츠에 견줄 수 있을 것인가"는 말을 남겼다.
여성의 과학적 업적에 대한 조명 작업을 통해 소수 여성의 업적을 아무리 부각시켜봐야 여성 전반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유럽과 미국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과학 활동을 막는 장애를 밝혀내는 작업으로 옮아갔다. 그러나 이 작업들은 1920-1930년대 탄생한 과학사의 한 분야로 승계되지 못하고, 1940-1950년대의 개인적인 연구 작업으로만 머무르고 만다.
과학 속의 여성사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는 여성 운동이 성숙단계에 접어든 1970년대에 와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단순히 여성의 자취를 찾는 것에서 벗어나 과학 분야에서 여성을 소수로 머물게 하는 사회제도적 배경, 과학사회의 문화에 대한 연구로 옮아갔다.
이 연구들은 과학자 아버지나 남편의 조수로 밖에 자신의 과학적 재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근대 여성 과학자들을 과학사의 무대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대학과 연구소로 과학 활동의 장이 옮겨가면서, 여성들이 과학교육에서 제외되기 시작한 현대과학 형성기의 제도적인 여성 배제 양식을 드러내주었다. 여성과학자의 생애는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남성과 달리 과학자 사회로 들어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여성만의 경험에 따라 재조명되고 있다. 즉 과학 내 여성의 역할은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관련없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능한 과학적 능력 소유?
그러면 이제 이같은 문제 의식에서 구체적으로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과 삶을 통해 과학 내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살펴보도록 하자.
현대 과학의 성립, 발전과 관련돼 여성과 학자들의 공헌을 정리해보면, 여성의 '저능한' 과학적 능력이라는 표현에 의구심이 들 것이다. 여성 과학자의 대명사로 알려진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는 방사성에 관한 연구와 방사성 동위원소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두번 수상했고 현대 물리학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그의 딸, 이레네 졸리오-퀴리(Irene Joliot-Curie, 1897-1956)는 퀴리의 뒤를 이어 인공 방사성 연구의 토대를 쌓았고, 1935년 새로운 방사성 원소 합성으로 남편 프레데릭 졸리오와 노벨 화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독일 최초의 물리학부 여교수로 임명됐던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는 오토 한, 프리츠 슈트라스만과 함께 최초로 핵분열 과정을 발견했다. 이 최초의 발견에 핵분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에 대한 물리학적 해명을 한 사람은 마이트너였다. 비록 나치 정권으로 인해 오토 한과 노벨상을 공동으로 수상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마이트너를 이어 마리아 괴퍼트-마이어(Maria Goeppert-Mayer, 1906-1972)는 핵물리학의 기본이 되는 이론을 창시해낸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는 핵자수인 'magic number'를 발견하고, 이를 강력 스핀 궤도 커플링을 지닌 핵 껍질 모델로 설명한 공로를 인정받아 하이델베르크대 물리학 교수 엔센과 함께 1963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로써 이론 물리학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 여성으로 기록됐다. 이밖에도 그는 '초우'라는 원소의 원자 성질을 밝혀낸 최초의 연구자, 이중 양자 방출 현상, 이중 베타 붕괴를 최초로 연구한 연구자라는 칭호가 붙는다. 그의 업적을 기려 미국 물리학회는 마리아 괴퍼트-마이어 상을 지정, 여성 물리학자에게 수상하고 있다.
천체 물리학자 죠셀린 벨 버넬(Jocely Bell Burnell, 1943-)은 24살의 젊은 나이에 최초로 4개의 펄사를 발견해 중성자별 이론의 기반을 마련했고, 지도교수인 안쏘니 휴위쉬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줬다.
현대 분자생물학의 기반이 되는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구조 이론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 1920-1957)은 DNA의 나선 구조를 실험적으로 처음 입증한 여성이었다. 그는 철저한 실험에 근거해 왓슨과 크릭의 초기 모델의 허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1983년 81세의 나이로 여성 단독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바바라 맥클린톡(Barbara McClintock, 1902-1992)은 유전학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던 1951년에 처음으로 일명'튀는 유전자'(jumping genes)를 발견한 사람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유전자들은 염색체 내에서 위치가 바뀔 수 있으며, 주위를 이동할 수 있다. 이는 20년 뒤에나 입증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당시로는 획기적인 연구결과였다.
고등교육 받기 위해 허위 결혼까지
이처럼 소수이기는 하지만 여성의 과학자로서의 업적은 남성 못지 않게 눈부시다. 그렇다면 소수의 여성에게나 과학이 의미가 있는 것이었까. 즉 과학 내 여성의 문제는 소수의 특별한 여성에게나 적용되는 것일까. 아니다. 이들을 둘러싼 사회∙문화적인 조건에서 여성과학자들을 바라보면 소수의 여성이 문제되지 않는다.
여성과학자들이 과학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넘어야했던 장애를 생각해보자. 우선 과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했다. 마리 퀴리는 바르샤바 대학의 굳게 닫힌 문을 뒤로하고, 당시 여성에게 입학이 허용된 파리 소르본느 대학의 입학 시험을 따내기 위해 어려운 파리 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최초의 러시아 제국 과학협회의 회원으로 선출된 수학자, 소피아 코발레브스카야(Sofia Kovalevskaya, 1850-1891)는 고등교육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 허위 결혼을 했다. 그는 이를 통해 독일로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1869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코발레브스캬야에게 겨우 청강생 자격증만을 줬을 뿐이었다. 다행히 그는 베를린 대학의 유명한 수학교수의 개인강의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수학할 수 있었다.
리제 마이트너는 빈 대학 물리학부에 처음으로 입학할 수 있었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마이트너가 당시 최신의 과학이론을 배우고자 1909년 베를린 대학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청강생으로 받아들인 막스 플랑크의 예외적인 관대함을 기다려야만 했다. 막스 플랑크는 여성의 대학 수업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당시 대학 강사는 자신의 수업에 여성이 참관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처럼 여성과학자는 제도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상황에 직면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제도적인 어려움에 부딪치면서까지 과학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부모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대개 이들의 부모는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교육관을 지녔다.
고등학교 물리 교사였던 퀴리의 아버지는 여성도 고등교육을 받아야만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고, 마이트너의 부모 역시 여성이 직업을 갖고 독자적인 생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부모와 가정의 영향은 후대 여성과학자들에게는 자연과학 분야에 대한 관심을 어려서부터 키울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직업까지 연결시킬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버넬은 어려서부터 건축학자 아버지가 세운 천문 관측대를 따라다니면서, 천문학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비타민 B12의 구조 해명으로 196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도로시 호지킨-크로풋(Dorothy Hodgkin-Crowfoot, 1910-1994)은 아버지 친구의 영향으로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는 집에 자신의 실험실까지 갖춰놓고 있었다고 한다.
교육과정을 거쳐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일단 시작하면 남성 위주의 과학사회라는 벽이 여성과학자를 기다린다. 최초의 업적을 세운 대개의 여성과학자는 과학사회에서 남성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경우다. 때문에 남성 위주의 문화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개 다음과 같은 괴퍼트-마이어의 입장에 동의한다. "자연과학은 원래 여성들이 학문하는데 탁월한 분야다. 특히 물리학이나 화학은. 내게 물리학은 어떤 다른 학문 분야보다 즐거움을 선사한다. 여성들이 이 분야에서 남성보다 능력이 떨어진다거나 지성적이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여성은 중요한 과학적 업적을 남길 수 없다는 말을 믿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기자의 질문 "남자 친구는 있나요?"
하지만 과학사회는 아직 남성 위주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버넬이 겪은 에피소드를 들어보자. 1968년 휴위쉬와 버넬의 펄사 발견이 외계문명과 관련된 것으로 기사화되면서 이 발견은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게다가 버넬이 '여성'천체물리학자였으니 언론에서 더욱 주시하게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버넬은 기자들로부터 자신의 발견에 대한 의견을 듣는 대신 "마가렛 공주보다 큰지, 남자 친구는 있는지"와 같은 질문 공세를 받았다.
프랭클린에 대한 왓슨의 개인평은 여성과학자들이 어떻게 '여성'으로 남성 동료들에게 평가되는지를 보여준다. 왓슨은 자신의 이중나선 저서에서 프랭클린을 '반항적인 신데델라, 여성적인 매력을 보이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한 여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로지(그램클린)는 날카로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아주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만일 옷차림에 조금만 신경을 썼어도 아주 멋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 31살의 나이에 영국의 10대 같은 옷차림…."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의 과학적 업적에 대해서는 그녀의 사후에 언급했을 뿐이었다.
남편의 도움과 가사의 최소화
남성 위주의 사회규범은 여성과학자들에게 가정과 연구 활동의 병행이라는 어려움에 부딪히게 한다. 연구 활동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가, 가사노동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호지킨-크로풋은 이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언급했다. "자연과학을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여성이라면, 가사보다는 자녀에게 더욱 신경을 써야 하며, 가사는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서 여기서 벌어들이는 시간을 자녀와 자신의 작업에 쓰도록 해야 한다."
괴퍼트-마이어는 "결혼한 여성이 자신의 경력을 도중에 포기할 정말로 중요한 이유란 하나도 없다. 아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몇년을 활동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하면, 적어도 학문 영역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새로운 발견이나 연구 진전을 계속 추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다시 하던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대개 이들 여성과학자들이 성공적으로 육아와 가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데는 남편이나 주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과 스스로 가사 활동을 최소로 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남성과 다른 조건에서 형성되는 여성과학자들의 삶은 한편으로 여성과학자 특유의 시선과 행동을 가능하게 해준다. 독립된 유전자 단위로 모든 유전 형상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맥클린톡은 옥수수 세포라는 복잡한 유기체 전체로 유전자를 해석하고자 하는 방법을 거의 홀로 고집했다. 결국 그는 유전자학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줬다.
맥클린톡이 과학자 사회에서의 고립을 장애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자 사회에서 언제나 소수였던 여성의 조건이었을 것이다. "자연을 전체로서 이해하기보다는 단면만을 이해하고자 하는 현대 자연과학적 인식 방법이 환경오염을 낳고 있다. 모든 생명체들의 얽히고 설킴, 세포로부터 유기체, 생태계에 이르는 연관들에 대한 느낌없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강요하는 현대 과학 시스템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핵폭탄의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한 마이트너는 당시로는 선구적으로 히로시마 투하 다음날 라디오 인터뷰를 했다. 그는 "여성들은 가능한 한 또다른 전쟁을 막는 일에 나서야만 한다. 원폭 제조가 잔인한 전쟁을 끝내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지만, 원폭 에너지는 궁극에는 평화적인 일로 쓰일 수 있어야 한다"고 호소한다. 2번의 전쟁, 나치 정권에 의한 수난을 유태 여성으로서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마이트너에게는 당시 즉각적인 호소가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그후 과학자들의 평화 운동은 푸궈쉬 회의로 정착되고, 여기에는 호치킨-크로풋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높은 지위와 후배양성은 아직 요원
여성과학자들의 선구적인 행보와 현대 사회의 과학기술화로 오늘날 여성 과학인력의 절대적인 양적 팽창이 이뤄졌다. 1994년 미국 통계에 따르면, 생물학 분야에서 배출되는 여성 박사의 비율은 41%, 문턱이 높기만 하던 물리학 분야에서도 9%에 이르고 있다. 정교수 비율도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11%를 넘어섰다. 과학교육을 받고 있는 여성 인력까지 생각해보면, 이제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여성은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무급직의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의 연구 활동을 보장받는 일에 급급해야 했던 과거 선배 여성과학자들과 달리, 최근 여성과학자들은 안정적인 자리에서 후배 과학자 양성에 몰두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199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크리스티안 뉘셀라인-폴하드(Christiane N sselein-Volhard, 1942-)는 독일에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막스플랑크 생물학 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그는 후배 양성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발생생물학계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뉘셀라인-폴하드로부터 지도를 받은 대부분의 여성 과학자들은 이미 발생생물학계에 선구적인 연구 업적들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과학계 전반에서 여성과학자들에게 이런 지위는 다만 꿈에 불과한 것 같다. 선배 과학자들의 발목을 부여잡던 '여성'이라는 수사는 여전히 여성 과학자를 남성 동료에 비해 낮은 지위를 감수하게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정책 노력들이 이런 질서를 깰 수 있는 방향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 여성과학자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