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제2회 고등과학원 천체물리학회에서 이에 관해 국내외 저명학자들의 열띤 연구 발표와 토론이 9월 3일부터 6일간 이어졌다. 블랙홀에 대한 최신 연구 동향을 생생한 현장스케치를 통해 만나보자.
여러차례 국내외 학회를 운영하면서 한가지 소원 아닌 바람이 있었다.다름아닌 한국의 풍속화를 한번 학회 포스터로 활용하고 싶은 것. 우여곡절 끝에 이번 학회를 주관하게 됐는데, 이번 학회의 주제는 한국의 풍속화와 너무나 동떨어져 보이는 블랙홀.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김홍도의 ‘춤추는 아이’(무동, 舞童)의 한복판에 블랙홀이 살아 움직이는 학회 포스터가 완성됐다. 단순히 블랙홀을 토론하는 학회가 아니라,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뛰어노는 아이처럼, 블랙홀과 함께 삶을 즐길 수 있는 학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학회가 시작됐다.
허블과 찬드라가 만났을 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비롯된 블랙홀 연구는 급속히 발전하는 인공위성과 전자장비의 기술에 힘입어 21세기에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 블랙홀은 주로 블랙홀로 유입되는 물질에서 방출되는 X선에 의해 그 존재가 확인된다. 이때 유입되는 물질은 블랙홀 주위의 가스나 원반에서 흘러들어온 것이다. 이런 X선은 지구 대기를 통과하지 못하므로 블랙홀에 대한 연구는 인공위성에 탑재된 우주망원경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현재 가시광선 분야의 허블우주망원경을 비롯해 X선 관측위성인 찬드라(Chandra), XMM-뉴턴(Newton) 등이 우주공간에서 활동중이다. 특히 1999년 발사돼 현재 활동중인 찬드라는 고밀도별(백색왜성, 중성자별, 블랙홀) 연구의 업적으로 198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찬드라세카르 박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현재까지 블랙홀은 크게 두종류가 발견됐다. 첫째가 은하의 중심부에 있는 거대 블랙홀. 우리은하의 중심에도 태양의 수백만배 질량을 가진 거대 블랙홀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다음으로 은하내부에 산재해 있는 태양의 7-10여배 질량을 가진 블랙홀이다. 지금까지 우리은하에서 이런 블랙홀이 14개가 관측됐고, 이 외에도 수십개의 블랙홀 후보(블랙홀로 추정되나 질량을 모르는 별)가 관측됐다.
이런 국제적인 연구동향에 맞춰 제2회 고등과학원 천체물리학회가 9월 3일-8일까지 고등과학원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됐다. 이번 학회에서는 블랙홀 주위에서 일어나는 X선이나 감마선 방출현상의 관측 결과와 이론적 규명에 초점을 두었다.
이번 학회에서 발표된 논문 가운데 블랙홀 관측과 관련해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미국 럿거스대 페라리스교수의 블랙홀 질량에 관한 최근 업적이었다. 그녀는 최근 연구 결과를 통해 허블우주망원경에서 관측된 은하내부 별들의 속도분포와 찬드라에서 X선으로 관측된 은하중심에 있는 거대 블랙홀의 질량이 서로 비례관계가 있음을 밝혔다. 이로써 은하중심의 블랙홀 형성과 은하내부 별들의 운동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였다. 이 연구는 허블과 찬드라 우주망원경의 관측결과를 동시에 이용한 것으로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추구해가는 현대 천체물리학의 흐름을 대변한다.
빅뱅 이후 최대 폭발현상
블랙홀과 관련한 여러가지 의문이 있겠지만, 이번 학회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됐던 최대 관심사는 블랙홀이 과연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짧은 시간에 방출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고 알려진 블랙홀이지만, 블랙홀이 자기장을 갖고 빠르게 도는 경우 회전에너지의 일부를 강력한 에너지로 방출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최근엔 이를 이용해 감마선 폭발현상이나 하이퍼노바 폭발현상과 같은 ‘빅뱅 이후 최대 폭발현상’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블랙홀에 의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까지 감마선 폭발현상이나 하이퍼노바 폭발현상의 증거가 많이 나타났다.
감마선 폭발현상은 우주공간에서 태양의 질량을 전부 감마선으로 바꾼 것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수십초의 짧은 시간에 방출하는 현상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아있지만, 거대한 에너지의 저장체인 블랙홀이 가장 강력한 후보다. 하이퍼노바는 초신성 폭발때보다 10여배 이상의 강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천체 폭발현상이다. 감마선 폭발과 맞먹는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폭발 때 방출되는 것으로 추정돼 이 또한 블랙홀이 가장 강력한 후보다. 이번 학회에서는 이런 주제에 대한 다양한 연구 발표가 있었다.
이번 학회 중간중간 열띤 토론이 다양하게 있었지만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블랜포드 박사와 MIT 반푸턴 박사의 논쟁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두사람 모두 회전하는 블랙홀이 자기장을 가질 경우 X선이나 감마선과 같은 강한 에너지를 어떻게 방출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있다. 블랜포드 박사는 1977년 논문에서 블랙홀이 주위의 원반보다 두배 빨리 돌 때 가장 많은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음을 보였다.
반면 반푸턴 박사는 최근 자신의 연구에서 블랙홀이 주위의 원반보다 10배 정도 빨리 돌아야만 된다는 가설을 내세워 블랜포드의 기존 가설을 뒤집고 있다. 반푸턴 박사는 감마선 폭발현상과 같이 밀집된 지역에서 많은 에너지가 나온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면 블랙홀 회전에너지가 원반에서 내는 에너지보다 더 커야 하기 때문에 블랙홀이 훨씬 더 빨리 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랜포드 박사의 기존 가설로는 블랙홀의 에너지 대부분이 주위원반에서 나오기 때문에 감마선 폭발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블랜포드 박사는 반푸턴 박사가 제시한 다른 조건에 문제가 있다고 반박했다.
서로 상반된 이론을 주창하는 두사람의 열띤 토론이 이번 학회의 학문적 가치를 높여주었다. 과연 어느 이론이 좀더 자연에 가까운지는 미래의 판단에 맡긴다.
승무 프로세스 vs 대기만성
학문의 교류와 더불어 외국의 저명학자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풍습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번 학회의 이면에 숨겨진 중요한 목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블랜포드 교수는 자신의 학문적 업적과 더불어 또한번 학회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다.
블랜포드 교수는 자신의 블랙홀 강연에서 블랙홀 주위의 원반에 있는 물질이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면서 에너지를 방출하는 현상을 한국의 난방 시스템인 온돌에 비유했다. 이름해 ‘온돌 다이내믹스(Dynamics)’. 원반에 있는 물질이 ‘땔감’이고 블랙홀이 ‘아궁이’이라면, 블랙홀에서 에너지를 방출하는 현상은 땔감을 아궁이에서 태워 서서히 방을 달구는 ‘온돌’에 비유될 수 있다는 얘기다.
또한 블랙홀의 회전축방향으로 에너지가 방출되는 현상을 승무(僧舞)에 비유해 ‘승무 프로세스(Process)’라 명명했다. 비록 머리에 쓰고 채를 돌리는 상모를 승무와 혼동하기는 했으나, 한국의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과 한국인에 대한 배려의 단면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번 학회 기간 동안 뜻밖의 손님을 여럿 대하게 됐다. 서울 모교회의 목사와 미국 워싱턴주에서 청소년교육 유선방송을 운영하는 한 신사는 이번 학회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면서 블랙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대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은 참가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일은 도올 김용옥의 학회 참석과 특별 강연이었다. 동양의 고사성어인 대기만성(大器晩成)을 “큰 그릇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여기에서 언급된 큰 그릇(大器)이 바로 끝없이 물질을 삼키는 블랙홀에 비유될 수 있음을 강연했다. 도올은 대기만성의 고사성어와 본인의 낙관이 닮긴 서예 한점을 블랜포드 교수에게 선사했다.
도올의 강연은 딱딱해지기 쉬운 학회에 윤활유의 역할을 했다고 할까. 블랙홀이 도올의 관심을 끈 것을 보면, 도올의 관심 또한 채워지지 않는 블랙홀이 아닐까.
일본과 공동연구 구체적 논의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이미 수차례의 X선 관측위성의 발사에 성공했다. 그래서 최근 블랙홀 연구 분야에서 미국,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지금까지 X선 관측위성과 관련해 일본에서 배출된 박사만도 1백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발사된 X선 관측위성이 없을 뿐 아니라 X선 관측과 관련된 박사학위 소지자도 겨우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숫자다. 이 분야에서 일본과 공동연구는 필수적이라 하겠다.
이번 학회에 4명의 젊은 일본 천체물리학자가 참여해 논문을 발표했는데, 미래의 공동 연구를 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앞으로 공동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구체적인 논의가 현재 진행중에 있다. 이 논의는 이번 학회의 결실로 맺어진 최대 성과 중의 하나다.
학회를 무사히 마치고 블랙홀로부터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던 차에 뉴욕에서 들려온 세계무역센터의 붕괴 소식은 충격적이있다. 단 하루의 시간차로 이번 학회 참가자들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던 일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할까. 돌이켜보건데 이번 학회는 성공적이었다. 너무 번잡하지도 않았고, 꼭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일 수 있었던 점이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운 점이었다. 단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학회 기간이 새학기의 시작과 맞물려 바쁜 수업 일정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런 경험이 바탕이 돼 좀더 발전된 국내 천체물리학의 여건을 조성하는데 밑거름이 되길 바랄 따름이다. 무엇보다도 블랙홀에 대한 많은 젊은이들의 참여와 관심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