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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미국 시사주간지 ‘라이프’가 뽑은 지난 1천년 동안 가장 중요한 발명 1백가지 중에서 첫번째를 차지한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였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 저렴한 책을 보급하기 시작하자마자 책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결국 중세의 암흑시대를 마무리짓는 계기가 됐다. 곧이어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결국 현대 문명이 유럽에서 일어났으므로 서양인들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정하는 일도 무리는 아니다.

인쇄장치 개발에 게을렀던 고려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보다 2백년 앞서 고려시대에 이미 발명됐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고려는 금속활자를 제일 먼저 발명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인쇄물의 보급에 있어서도 당시 세계 최고였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의 인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구텐베르크가 발행한 라틴어 성경과 비교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성경은 총 1천2백페이지였다. 그런데 이보다 20년 앞서 조선은 갑인자로 ‘자치통감강목’ 5-6백부를 인쇄했다. 이 책의 한권은 76페이지로 1부가 2백94권이므로 모두 합하면 2만2천3백44페이지가 된다. 이것을 5-6백부나 인쇄했으니 5백부로 계산해도 총 1천1백17만페이지가 넘는다. 이는 구텐베르크의 인쇄본에 비해 1만배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유럽 사회를 획기적으로 변모시켰지만 고려는 이를 적절히 이용하지 못했다. 고려는 지적 혁명과 문화적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놓쳤다는 뜻이다.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되는 것은 한자가 알파벳이나 한글과는 달리 인쇄술의 덕을 크게 볼 수 없는 문자라는 점이다. 간단하게 생각해 26자 내외로 이루어진 라틴어 계열의 문자를 주조하기 위해서는 수십개의 거푸집만 만들면 되지만 한자는 적어도 10만여개의 거푸집을 만들어야 한다. 더구나 한자는 습득하기 어려운 문자이므로 일반 백성이 글을 익힐 수 없었기 때문에 책의 수요 또한 많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세계 최초로 개발된 고려의 인쇄술이 지식 전파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책을 찍어낼 수 있는 도구, 즉 인쇄장치를 개발하는 데는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인쇄장치가 개발되지 않았으므로 고려에서는 한번에 수십장 이상을 인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역으로 말하면 인쇄작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활판에 활자를 고정시키는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금속의 접착틈 없애라

이와 반대로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를 만들고 금속활자에 잘 달라붙는 잉크를 개발한 후, 성경을 대량으로 찍으려면 대량의 책을 인쇄할 수 있는 인쇄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로운 개념의 인쇄장치란 어느 누구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어떻게 제작해야 할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구텐베르크는 올리브 기름을 짜는 장치를 떠올렸다. 기름을 짜는 방법으로 금속활자 위에 종이를 놓고 누른다면 인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발명품인 인쇄기는 당시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던 기름 짜는 기계를 그대로 활용해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당시 인쇄기는 큰 통에 작은 원통을 삽입해 접착면을 밀착시킨 금속 제품을 이용했다. 그러나 두 금속의 접착면이 밀착되도록 성형해 붙이는 일은 매우 어렵다. 아무리 정밀하게 금속을 깎더라도 두 금속간에 틈이 없도록 깎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 사용하는 방법이 열가열법이다. 정밀하게 두 통을 만든 후, 외부 통을 가열시킨 상태에서 내부 통을 삽입하는 것이다. 열에 의해서 외부 통이 확대되므로 내부통을 간단하게 넣을 수 있으며 외부통이 식으면 축소돼 접착면의 틈이 사라지는 것이다. 열을 주면 금속이 확대된다는 간단한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발명가는 평상시에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원리를 두루 섭렵할 필요가 있다. 상식으로 생각하는 원리 중에서 자신에게 꼭 필요한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01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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