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은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과학 용어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왜 그토록 블랙홀에 열중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Why Science’ 코너에 원고청탁을 받으니 ‘Why’가 많이 들어가는 흘러간 팝송‘The End of the World’가 생각난다.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 …
Why do the birds go on singing?
Why do the stars glow above?
… ….
참 질문도 많은 노래다.
첫 질문, 해가 왜 빛나는가에 대한 답은 핵융합이고 다음 질문, 왜 파도가 밀리는가에 대한 답은 기조력이다. 따라서 질문이 하나 끝날 때마다‘nuclear fusion(핵융합), tidal force(기조력), …’하고코러스로 정답을 달아주면 이 노래는 과학적으로 완벽해진다. 마지막 질문의 경우 해가 하나의 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첫 질문과 중복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이 이러한 답이 궁금해서 이렇게 작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래 제목도 애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끝난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지, 빅뱅 우주론의 대함몰(Big Crunch)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이렇게 평범하고 애절한 노래가 본의 아니게, 왜 천문학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게 됐을까.
우리는 여기에서 기초과학의 본질을 깨닫게된다.‘ 별은왜빛날까.’아이들도 어른들에게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는, 어떻게 생각하면 한심하게까지 들리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20세기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핵융합의 기본 공식, E=mc2을 발견한 것이 1905년이고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닫기까지는 또 몇십년이 걸렸으니까. 하지만 바로 이 공식이 현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현대 천문학에서 블랙홀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흥미로운 천체이기 때문이라기보다‘블랙홀은 왜○○할까’, 아니면‘블랙홀 주위에서는 왜 ○○할까’같은 질문에 대한 정답을 추구하다보면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이 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 망원경으로만 관측 가능
블랙홀이라는 말은 어지간한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라면거의알고있다. 그리고‘물질은 물론이고 빛조차 빨아들여 검게 보인다’같은 수준에서의 설명은 그 동안 과학동아는 물론 보통 일간지에서도 수없이 다루어져, 이제는 진부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블랙홀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짚고 넘어가자.
★ 대기가 없는 천체의 표면에서 물체를 던졌을 때 그 물체가 천체의 중력권을 탈출하게 만드는 최저 속도를 탈출 속도라고 한다. 우리 지구의 경우 탈출 속도는 초속 11.2km다.
★ 천체의 탈출 속도는 천체의 질량뿐만 아니라 크기에도 관련된다. 만일 지구가 수축해 작아지면 탈출 속도는 점점 커져야 한다. 마침내 지구의 반지름이 1cm보다 작게 되면 탈출 속도는 광속, 즉 초속 30만km를 넘게 된다. 해의 경우 이러한 반지름 값은 3km다.
★ 빛조차 천체를 탈출할 수 없게 되면 블랙홀이 된다.
즉 블랙홀 주위를 지나는 빛은 휘어서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사건의 지평선은 더 이상 빛이나 물질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블랙홀 외부와 내부를 나누는 경계선이다. 이 현상은 뉴턴의 중력이론으로는 설명이 안되지만 아인슈타인
의 상대성이론으로 정확히 설명된다.
★ 블랙홀이 쌍성을 이루고 있을 경우에는 블랙홀이 동반성으로부터 물질을 빨아들이는 과정에서 고에너지를 갖는 X선이 나온다.
1970년대까지만해도, 블랙홀이 뭐냐고물었을때‘별의시체’라고 대답해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별의 진화 이론이 만들어지면서 질량이 큰 별, 특히 해보다 30배이상 질량이 큰별은 블랙홀이 돼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0년대 샐피터(Salpeter) 같은 학자들에 의해 우주에는 거대한, 질량이 우리 해보다 수백만배 더 큰 블랙홀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조용히’제기됐다. 물론 이 주장은 나중에 사실로 밝혀졌고, 오늘날에는 별의 시체로서의 블랙홀보다 거대한 블랙홀이 오히려 더 각광을 받게 됐다.
어쨌든 1960년대의 천문학자들은 일단 별의 시체로서의 블랙홀을 찾기에 주력했다. 블랙홀은 이름 그대로 아무런 빛도 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주공간에 홀로 있으면 관측할 방법이 거의 없다. 하지만 블랙홀이 쌍성을 이루고 있을 경우에는 방출되는 X선을 관측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 지구의 대기는 X선을 투과시키지 않으므로 우주 궤도에 망원경을 올리는 일은 불가피하다. 즉 인공위성을 올릴 수 있는 선진국만이 블랙홀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블랙홀을‘보기’위해서는 엄청난 예산이 든다.
1970년 미국은 소형 X선 우주망원경 우후루(Uhuru)를 발사한다. 그리하여 1999년 우주 궤도에 올려진 대형 X선 우주망원경 찬드라(Chandra)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찬드라 X선 우주망원경은 유명한 허블(Hubble) 우주망원경에 견줄 수 있는 것으로 블랙홀 연구만을 위해서 설치가 된 것은 아니지만, 주 관측대상은 블랙홀이다. 그 이름은 백색왜성의 한계 질량을 구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겨 198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인도계 미국 천문학자 찬드라세카르(Chandrasekhar)에서 따온 것이다.
36만광년에 걸쳐 뻗어 있는 제트
2000년 1월 18일 찬드라는 블랙홀의 위력을 보여주는 은하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 은하 사진에는 왼쪽에 있는 은하 중심으로부터 방출된 강한 제트(jet)가 오른쪽 위의 밝은 점 방향으로 약 36만광년에 걸쳐서 뻗어 있다. 밝은 점은 제트로 분출돼 광속에 가깝게 흐르는 입자들이 우주 공간의 물질과 충돌해 빛나는 것으로, 은하 중심으로부터 약 80만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우리은하의 지름이 약 10만광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진의 제트가 얼마나 멀리까지 도달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은하 중심에서 어떤‘괴물’이 얼마나 강력하게‘쥐어짜기에’이렇게 거대한 제트가 형성될 수 있을까. 그럴듯한 정답은 거대한 블랙홀밖에 없다.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유입물질 원반의 플라스마와, 극단적으로 강한 전자기장의‘합동작전’에 의해 제트가 발생한다는 아이디어말고는 뾰족한 대안이 없는 실정이다. 참고로 이때 걸리는 전압은 보통 1억×1조V 정도가 된다는 사실을 첨언해둔다. 이 정도는 지구의 자연현상인 번개에 비해 무려 최소 10조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은하의 진화는 거대한 블랙홀과 상당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질량이 작은 은하는 우리 해보다 질량이 수백만배 더 큰 블랙홀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질량이 큰 은하는 우리 해보다 수십억배 이상 되는 블랙홀을 갖고 있다. 따라서 블랙홀의 질량은 처음 태어날 때의 질량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은하의 진화에 따라 그 질량이 결정되는 것으로 믿어진다.
최근 미항공우주국(NASA) 보고서는‘허블 우주망원경 통계에 따르면 대부분의 은하에 거대한 블랙홀이 있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제 블랙홀은 여느 은하만큼이나 흔한 천체가 된 것이다.
블랙홀의 반지름은 질량에 비례한다. 예를 들어 우리 해보다 1억배 정도로 질량이 큰 블랙홀의 반지름은 3억km나 된다. 해와 지구 사이의 평균거리는 약 1억5천만km이므로 이 블랙홀의 반지름은 해와 화성 사이의 평균거리보다 약간 더 크다. 따라서 은하 중앙의 거대한 블랙홀들은 그 크기가 대략 우리 태양계 만하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
별처럼 보이는 퀘이사(quasar)라는 천체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엄청나게 밝은 은하핵을 말한다. 이러한 퀘이사의 에너지 또한 거대한 블랙홀에 의해 공급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에너지의 크기다. 퀘이사의 밝기는 한 은하의 밝기에 버금간다. 즉 태양계 만한 은하핵의‘블랙홀 엔진’에서 수천억개의 별 밝기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빛보다 빠른 입자를 찾는다
우후루 이후 선진국들은 앞다투어 X선 망원경을 우주 궤도에 올리고 있다. 블랙홀의 연구가 단순히 국민의 자존심이나 천문학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선진국들은 도대체 왜 이런 경쟁을 벌이고 있을까. 그 답은 블랙홀과 같은 천체들이 21세기 기초과학의 열쇠라는데 있다. 즉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블랙홀이 관여하는 에너지의 크기는 인간이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엄청난 값을 갖기 때문이다.
우주가 벌이는 고에너지 실험들을 우리는 X선 망원경과 같은 우주망원경을 통해 구경만 하면 된다. 예를들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운동하는 입자가 발견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무너지거나 커다란 수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 만일 빛보다 빠른 입자가 있다면 어디에서 발견되겠는가. 당연히 우주에서, 그것도 블랙홀과 같은 천체 주위에서 발견될 것이다. 만일 상대성이론이 무너진다면? 다시 새로운 기초과학이 정립되고 E=mc2 못지 않은 공식이 나올 지도 모른다. 기초과학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고, 예측해서도 안된다.
현대 천문학에서 블랙홀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블랙홀은 왜 ○○할까’, 아니면‘블랙홀 주위에서는 왜○○할까’같은 질문에 대한 정답을 추구하다보면 이처럼 새로운 물리학이 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70년대 중반 호킹이 블랙홀도 여느 천체와 마찬가지로 빛과 물질을 내어놓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1970년대 후반 블랜포드(Blandford) 같은 사람들에 의해 회전하는 블랙홀의 에너지를 직접 꺼내 쓸 수 있다는 이론들이 주장되면서부터, 블랙홀은‘에너지탱크’로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유입물질 원반 속에 숨어서 강력한 제트를 분출하며 맹렬히 회전하고 있는 거대한 블랙홀은 천문학의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연구 범위가 블랙홀 사건의 지평선보다 조금만 더 커져도 바로 이론적 한계에 부딪히게 돼 있다. 예를 들면, 아직도 제트가 근본적으로 사건의 지평선 바로 바깥에서 형성되는지 아닌지조차 잘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측이 잘 돼 자료가 축적돼 있는 것도 아니다. 허블 우주망원경으로도 플라스마 원반의 거죽만을 겨우 관측해낼 수 있을 뿐이다. 그 거죽의 지름은 수광년 정도로, 태양계 만한 중심 블랙홀보다 1만배 이상 크다.
관측 한계와 이론적 한계 틈새의‘처녀림’에서 이론적으로 도전하는 일은 특히 우리 현실에 알맞은 연구과제다. 이 연구과제는 특히 관측 장비에 대한 의존도가 없기 때문에 아이디어만 좋다면 당장 선진국들과 경쟁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블랙홀 연구 풍토 조성이 시급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