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에 대한 연구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파블로프다. 그는 소화의 생리적 메커니즘을 연구해 19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파블로프보다 훨씬 앞서 소화 메커니즘을 연구한 학자가 있었는데….
19세기 초반까지 소화가 어떻게 되는가, 즉 소화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는 주로 새나 개 같은 동물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사람이 대상인 경우에는 식도로 역류한 위액을 채취해 음식물과 혼합해서 음식물이 어떻게 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제 위 속에 음식물이 들어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므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
끔찍한 총기 사고 발생
그런데 1822년 미시건주에 있는 미킬리맥키낙이라는 마을에서 문제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 해 6월, 모피 회사에서 사냥을 위해 덫을 놓는 일과 운반하는 일을 담당하던 18세의 마르탱이라는 직원이 총에 맞았다. 총기 오발사고 당시 총구는 마르탱으로부터 1m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왼쪽 옆구리를 뚫고 들어 온 총알은 5, 6번째 갈비뼈와 왼쪽 폐의 아랫부분을 파괴한 다음, 위의 앞쪽에 구멍을 냈다. 근처에 있던 맥키낙 요새의 군의관 중 유일한 외과 의사였던 버몬트가 즉시 달려왔다. 그는 상처부위에 남겨진 이물질을 제거하고 소독을 했지만, 마르탱이 20분도 채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르탱은 출혈이 심하지 않았고, 2차감염도 발생하지 않은 채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비록 섭취한 음식물이 위에 뚫린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4주가 지나자 그 구멍도 부분적으로 닫히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마르탱의 식욕과 소화 기능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위벽의 구멍은 음식물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는 됐는데, 손가락으로 밀면 위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사고 18개월 후에는 위 내벽이 자라서 구멍을 덮는 층이 형성돼 뚜껑처럼 열어볼 수가 있었다.
마르탱은 18개월 동안 행정 당국으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 후에는 버몬트가 생활을 도와주면서, 그들은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버몬트는 마르탱에게 소화 메커니즘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에 도움을 청했다. 결국 마르탱은 1825년 맥키낙 요새에서 시작해, 1829년 크로포드, 1832년 워싱턴 D.C., 1833년 뉴욕에서 등 모두 4차례에 걸쳐 버몬트가 연구를 진행하도록 협조했다.
음식물을 실에 매달아 관찰
버몬트는 공복 상태로 누워 있는 마르탱의 위에서 채취한 위액을 조사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의 위액, 즉 식도를 역류해 올라오는 위액과는 성분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소화시켜야 할 음식물이 위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만 산성의 위액이 분비된다는 사실도 밝혔다. 한편 음식물이 소화되는 순서를 확인하기 위해 음식물을 실로 매단 후 위 내부에 넣어 두고 시간경과에 따라 꺼내 관찰했다. 또 소화액을 위 밖으로 꺼내 온도를 바꿔가면서 실험하는 등 여러가지 조건에서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다.
여기에서 얻은 결과를 바탕으로 버몬트는 1833년 ‘위액과 소화생리의 실험과 관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버몬트의 연구는 특별한 기구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조건에서 진행됐다. 이와 같은 연구방법은 생리학 분야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었으며, 후대의 과학자들에 의해 실험생리학이 탄생하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는 실험생리학의 창시자인 프랑스의 베르나르, 소화 생리 연구자인 러시아의 파블로프 등의 연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저명한 의학사학자인 탤보트는 "의학역사상 버몬트와 마르탱보다 더 유명한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없다"면서, 그들이 협력한 연구를 높이 평가했다. 1832년 하사관으로 입대한 마르탱은 1834년 이후 버몬트의 실험 요구에 응하지 않았으며, 82세에 사망했다. 훗날 여러 의학자들이 마르탱의 시신을 육군 의학 박물관에 기증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유족들은 이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