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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귀재 이윤기

'과학은 신화 따라잡기' 내달부터 과학동아 연재

‘신화 전문가’‘국내 최고의 번역가’로 알려진 문단의 귀재 이윤기. 이제 그가 과학에 눈을 돌려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풀어낼 채비를 갖추고 있다. 신화에 얽힌 흥미로운 얘기를 이해하면 현대 첨단과학의 흐름과 용어의 참뜻을 쉽게 알 수 있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내달부터 과학동아에‘과학은 신화 따라잡기’를연재하기 위해 준비가 한창인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문단의 귀재 이윤기


2000년 12월 17일 목성의 가장 큰 위성 ‘가니메데’의 표면 아래에 소금물 바다가 존재한다는 흥미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이 말은 곧 지구 외에서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기 때문에, 이번 발견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런데 ‘가니메데’라는 용어는 아무래도 우리에게 편치 않은 외래어다. 그래서 천문학에 초보인 일반인으로서는 이름을 금새 잊어버리기 쉽다. 가니메데가 목성의 위성인지 토성의 위성인지 혼동스러워질 수도 있다. 그래서 며칠만 지나면 도대체 어디에서 물이 발견됐다는 얘기인지 기억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이 낯선 외래어를 머리에 또렷이 남게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신들의 얘기, 즉 신화에서 그 묘책을 발견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인물이 있다. 소설가이자 번역가 이윤기(53)다.

“가니메데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소년 가뉘메데스에서 따온 말입니다. 그런데 가뉘메데스가 왜 목성의 위성인지 아십니까? 여기에는 신들의 우두머리 제우스의 ‘커밍 아웃’에 관한 얘기가 얽혀 있습니다.”

목성의 또다른 명칭인 주피터(Jupiter)는 제우스의 로마식 이름이다. 어느날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던 제우스의 눈에 예쁜 남자아이 가뉘메데스가 발견됐다. 동성애에 빠져있던 제우스는 이내 독수리로 변신해 가뉘메데스를 천상으로 납치해온다. 이후 가뉘메데스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으며 신들에게 술잔을 돌리는 시중을 든다. 주피터와 그 위성 가니메데의 이름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만일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가니메데에서 발견된 바닷물 소식을 훨씬 재미있고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과학동아의 신화적 이름은 헤르메스

이윤기. 사실 그의 직업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고 1998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으니 틀림없는 소설가다. 하지만 난해하기로 유명한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윤기를 ‘당대 최고의 번역가’로 기억한다. 그가 지난 20여년 간 내놓은 번역서는 무려 2백여권에 이른다.

그런데 국내에서 발간된 신화 관련 번역서나 저서의 대부분에 이윤기라는 이름이 붙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다소 어색한 표현이지만 그는 분명 독보적인 ‘신화 전문가’로 통한다. 현재 그가 필생의 업으로 삼고 집필을 시작하는 분야가 바로 신화다. 그는 50권 분량의 ‘세계신화전집’, 그리고 세계신화와 한국문화의 관계를 풀어내는 저술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세인에게 흔히 알려진 이윤기의 정체다. 하지만 또한가지 그가 마음 속에 오랫동안 숨겨놓은 관심거리가 있다. 바로 과학과 신화의 접목지점을 찾는 일이다. 과학과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문단의 귀재가 왜 과학 얘기에 흥미를 가질까.

의외로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과학은 결국 신화 따라잡기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의 염원을 그대로 담아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과학은 이를 실현시킨 구체적인 걸음걸이였습니다. 인간은 결국 과거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없는 셈이죠.”
과연 그럴까. 이 거대한 얘기에 동의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례가 필요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허리에는 마법의 띠가 감겨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남성들이 보면 즉시 흥분할 만한 온갖 음탕한 내용이 그려져있어요. 이를 과학이 재현시킨 것이 바로 비아그라 아닙니까?”

재미는 있지만 다소 억지스런 사례를 든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는 작가 이윤기의 유머감각과 기지가 순간적으로 발휘된 작은 얘기였을 뿐이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 속에서 과연 과학의 역사가 신화를 따라온 자취였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스의 아테네 신전 아시죠? 그 안에는 여신 아테나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테나는 원래 그렇게 중요한 신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기원전 432년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신전을 지으면서 위상이 높아진 것이지요. 아테나는 바로 공업의 여신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무수한 도시국가로 이뤄진 당시의 그리스를 아테네를 중심으로 삼아 정신적으로 통합하고 싶었다. 그 수단으로 공업을 상징하는 아테나를 으뜸 여신의 반열에 올린 것이다.

아테네 신전 옆에는 이 세상에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는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자리잡고 있다. 놀랍게도 헤파이스토스는 스스로 제 몸을 운전할 줄 아는 ‘퀴베르네테스’ 즉 방향감지장치가 내장된 로봇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얘기는 첨단과학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신화에서 비롯된 흔적이 의외로 많다는 쪽으로이어졌다.

“국내에서 구입한다고 알려진 군함 이지스는 메두사의 머리가 붙어있는 아테네 여신의 방패 이름입니다. 메두사의 머리를 보면 누구나 돌로 변한다는 얘기가 전해지죠? 그만큼 무서운 존재란 뜻입니다. 또 미국 핵잠수함 이름 트라이전트는 포세이돈의 삼지창입니다. 포세이돈이 누굽니까. 삼지창으로 비와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린 바다의 신 아닙니까. 만일 과학동아에도 신화적 이름을 부여한다면 과학의 신 헤르메스가 어울리겠지요."

아시모프 뛰어넘는 hot 과학 추구

이윤기의 ‘과학은 신화 따라잡기’ 얘기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그에 따르면 “엄청나게 많이 모아놓은 자료”가 작업실을 가득 메운 책상과 책꽂이에 수북이 쌓여있다. 다음달부터 과학동아 독자들에게 찬찬히 풀어놓을 계획이다.

‘신화 전문가’ 이윤기는 어떤 계기로 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을까. 지금은 작고한 세계적인 SF작가이자 과학자 아이작 아시모프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때 아시모프에 푹 빠졌습니다. 그의 자서전을 원서로 직접 구입했을 정도죠. 놀랍게도 아시모프가 신화에 대한 책을 썼더군요. 바로 제가 하고 싶었던 작업입니다.”

하지만 이윤기는 아시모프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다. “이번에 목성 위성에서 물이 발견됐다는 소식 보도가 바로 아시모프 방식이죠. 언제 무엇이 발견됐다는 사실 위주의 전달입니다. 이를 cold 과학이라 부르면 어떨까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은 hot 과학입니다. 제우스와 가뉘메데스 신화에 얽힌 설명을 곁들이는 것이지요.”

과학이 아직 일반인에게 딱딱하고 부담스럽기만 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국내 현실에서‘인문학 글쓰기 고수’의 이런 말이 무척 반가울 뿐이다. 문학에서 신화로, 그리고 마침내 과학으로 글쓰기의 방향을 옮기고 있는 이윤기. 그의‘hot 과학 강연’은 앞으로 독자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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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장성환 기자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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