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눈썹, 수염, 체모, 음모, 그리고 온몸에 난 솜털. 털은 사람의 몸 구석구석에 있다. 드러난 털이 있고 감춰진 털이 있듯이 털에 대해서도 이미 아는 사실이 있고속설로 잘못 알려져 있는 내용도 있다. 털의 이모저모를 들춰보자.
오늘도 출근 전에 털 때문에 고민하는 K씨. 머리를 감고 나서 한움큼씩 빠지는 머리털을 보면 이런 걱정이 앞선다. 왜 이렇게 머리칼이 많이 빠지는 걸까. 이러다 대머리가 되는 것은 아닌지. 또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다 드는 생각. 왜 젊은 나이에 내 머리털은 벌써 하얗게 눈을 맞은 걸까. 눈썹은 왜 이렇게 없는 거야. 누구는 숯검댕이라 멋지던데.
출근길에 나선 K씨는 주위를 둘러보자 온통 다양한 색깔로 염색한 머리를 만날 수 있었다. 외국이 따로 없군. 붉은색, 노란색, 심지어 푸른색 머리를 둘러보며 길을 건너다 다가오는 차를 보지 못했다. 갑자기 급정거하는 자동차, 그리고 엄청 놀란 K씨. 그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지하철을 탄 K씨는 퇴근 후 오늘부터 운동삼아 수영장에 갈 생각에 잠겼다. 난 가슴에 털이 많아 고민인데. 깎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깎으면 더 많이 난다고 하던데….
과연 몸 이곳저곳에 난 각종 털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그렇게 다양한 특징을 갖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속설도 있다는데 털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어보자.
털주머니 모낭 수는 선천적으로 결정
몸 곳곳에 난 털에는 머리털처럼 기다란 것이 있는가 하면 솜털처럼 보일락 말락 아주 짧은 것이 있고 뻣뻣한 것이 있는가 하면 곱슬거리 것이 있다. 겉보기에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털이 있기 때문에 털마다 형태가 서로 다르다고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털의 기본구조는 동일하다.
털은 피부에 딸린 피부 부속기관으로 모낭이라 불리는 주머니에 둘러싸여 있고, 모낭에 있는 특수한 상피세포로부터 만들어진다.
털을 이루는 여러 부분 중에 유일하게 살아서 성장하는 부분은 모근 또는 모 진피라는 구조인데, 모낭의 가장 밑부분에 있다. 모근에 있는 모낭세포가 위로 가면서 분화해 딱딱한 케라틴이라는 단백질을 만들면서 세포 자신은 죽는다. 바로 이런 케라틴들이 모여서 털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털은 모낭에서 피부 표면쪽으로 하루 0.3㎜씩, 한달에 약 1㎝ 정도씩 자란다.
모낭은 출생 전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형성된다. 임신 9주째인 태아에서 눈썹, 턱, 윗입술 부분에 모낭이 가장 먼저 등장하기 시작해 임신 4개월경에는 거의 전 피부에 나타나며, 임신 7개월경에는 거의 성숙한 모양을 갖추게 된다. 사람의 머리에는 보통 8만-12만개 정도의 모낭이 있는데 이 숫자는 이미 유전적 요인에 의해 태생기에 결정되며 출생 후에는 새로 모낭이 생기지 않는다.
표피 가까이 모낭 벽에는 피지선이 붙어있는데 여기서 분비되는 기름성분(피지)이 털에 붙어 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기름기가 적은 경우 털은 쉽게 부러지거나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기름기가 너무 많은 경우에는 지루성 피부염이 발생한다.
모낭에는 입모근이라 불리는 작은 근육이 연결돼 있다. 긴장하거나 추울 때 이 근육은 수축하기 때문에 털은 곧게 선다. 재미있게도 몹시 무서움이나 공포를 느낄 때 흔히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털갈이 동물과의 차이
양이나 푸들 같은 동물의 털은 항상 쉼없이 자라지만, 사람의 털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털은 성장기, 퇴행기, 휴지기를 반복하면서 주기적으로 자란다(그림2). 털이 성장하는 시기가 길수록 털이 길게 자라지만, 이런 성장주기는 유전적으로 이미 결정돼 있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두피에 있는 털은 보통 2-6년 정도 성장한 후 2-3주의 퇴행기를 거쳐 휴지기로 들어간다. 휴지기의 머리털은 모근과 분리돼 2-6개월 지나면 결국 빠지게 된다. 이후 새로운 성장주기가 시작되면서 남아있던 모근으로부터 새로운 털이 자라난다.
새로운 털이 자라나는 과정은 태생기에 모체의 자궁 속에서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 동일하다. 즉 각 성장주기에서 털의 발생과정은 태생기와 똑같다는 말이다. 이것은 털만이 갖는 특징으로 태아기에 발생해서 자란 다른 세포의 성장과정과는 전혀 다른 점이다. 또한 개개의 모낭은 평생 동안 10-20회 정도의 성장주기를 거치게 된다.
사람의 털은 털갈이를 하는 동물들의 경우와 다르다. 털갈이하는 동물들은 모든 모낭의 성장주기가 같은 시기에 속하므로 털이 일시에 빠지고 일시에 다시 나오는 과정인 털갈이가 일어난다. 반면 사람의 경우는 이와 다르게 인접한 털마다 성장주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털의 성장주기는 신체 부위에 따라 차이가 있고 성장기, 퇴행기, 휴지기에 속한 털의 비율도 신체부위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머리털의 경우는 85-90%가 성장기에 속할 정도로 성장기 털이 많고 성장기도 다른 털에 비해 길기 때문에 다른 털보다 길이가 길고 자라는 속도도 빠르다. 반면에 눈썹의 경우 짧은 성장기를 거쳐 휴지기를 맞는데 40-50%의 털이 6개월-1년 정도로 비교적 긴 휴지기에 머물기 때문에 길이가 짧고 잘 빠지지 않는다.
단면이 타원형일수록 곱슬 정도 심해져
털이 곱슬거리는 정도는 털의 단면 모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단면이 동그랄수록 털은 곧게 자라며 단면 모양이 계란형일수록 털은 더 곱슬거린다. 동양인의 머리털은 단면이 원형이므로 곧게 뻗은 머리칼인 직모이고, 서양인의 머리털은 타원형으로 길쭉하기 때문에 동양인보다 웨이브가 심한 곱슬모다. 흑인의 머리털은 서양인의 털보다 타원인 정도가 더 심해서 거의 납작하거나 심한 경우 리본모양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곱슬모가 된다.
어떤 경우에는 모낭 자체가 곧바로 펴있지 않고 휘어져있기 때문에 털이 자랄 때 곱슬거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직모냐, 곱슬모냐를 결정하는 원인은 키가 크냐, 작으냐의 문제처럼 유전적인 이유다.
신체부위별로도 털이 곱슬거리는 정도에 차이가 있다. 대개 겨드랑이털과 음모가 다른 털보다 유난히 곱슬거리는데 이것은 유전적인 요인보다는 후천적인 요인이 크다. 이들 털은 주로 옷과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에 원래 곧았던 모양이 휘어지게 된다. 또한 겨드랑이털의 경우에는 겨드랑이가 팔과 몸통이 만나는 부분이기 때문에 털이 살과 자주 닿는 일도 휘어지는 원인이 된다. 만일 원시시대처럼 옷을 벗고 산다면 음모와 같이 옷이 닿지 않는 부위의 털은 지금처럼 곱슬거리지 않을 것이다.
털이 곱슬거리는 정도와 마찬가지로 털이 몸에 많고 적음에도 인종적인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인은 턱수염, 겨드랑이털, 체모, 음모가 동양인보다 많다.
머리가 금발이면 체모도 금색?
요즘 주위를 둘러보면 남녀를 불문하고 머리털을 염색하거나 코팅한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색깔도 붉은색에서부터 푸른색, 심지어는 흰색까지 정말 다양하다. 이런 유행의 물결 탓인지 검은색이 아닌 컬러의 머리색이 어색하지 않다. 반면 서양인의 경우 머리털에 특별한 처리를 하지 않더라도 적색모에서 금발까지 천연색의 다양한 머리색깔이 나타난다. 이런 머리털의 자연색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털의 색깔은 모낭의 멜라닌세포에서 멜라닌색소를 만들어 모낭세포로 전달시킴으로써 나타난다. 멜라닌세포는 두가지 종류의 멜라닌을 만든다. 하나는 일반 피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흑갈색 멜라닌(eumelanin)이고 또하나는 적황색 멜라닌(pheomelanin)이다.
흑갈색 멜라닌은 멜라닌 함유농도에 따라 흑색, 갈색 또는 금색 모발을 띠게 한다. 반면 적황색 멜라닌은 적색 모발을 만드는데, 적황색 멜라닌의 원래 색깔이 적색이기 때문에 색소가 많은 경우 짙은 적색 모발이 되고 적은 경우 옅은 적색 모발이 된다. 서양인의 경우에는 이런 멜라닌 색소의 종류와 농도에 따라 적색, 금색 모발이 많이 나타난다. 한국인은 대부분 흑갈색 멜라닌의 함유농도가 크기 때문에 흑색 모발을 가진다.
머리털이 금색이면 몸에 난 다른 털도 금색일까. 오래 전 미국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원래 금발이 아니었는데 염색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몸에 난 털도 금색으로 염색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 신체부위별 털의 색깔은 서로 다를 수 있다. 머리털이 금발일 경우 몸의 다른 털이 금색이 아닐 수도 있고 금색일 수도 있다. 또 금색일 경우도 진한 정도가 다를 수 있다.
보통 나이가 들면 머리털의 색깔이 하얗게 센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은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각종 세포의 기능이 저하되는데 멜라닌색소를 만들어내는 모낭의 멜라닌세포도 예외일 수 없다. 노인의 멜라닌세포는 활동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털 속의 멜라닌색소가 부족해지기 때문에 털은 흰색 또는 회색으로 변한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의 머리에 새치가 나거나 머리털의 상당부분이 하얗게 변하는 경우는 왜일까. 이것은 생리적 또는 유전적인 요인이다. 물론 병 때문인 경우는 매우 드물고 사람의 얼굴이 제각각인 것처럼 유전적인 원인이 크다. 다시 말하면 멜라닌색소가 부족해지는 시기나 정도의 차이는 유전적인 차이란 말이다.
1만개 모이면 자동차도 끌어
동물과 달리 사람의 털은 체온을 보호하는 기능과 같이 특별한 생리적 기능을 갖지 않는다. 사람의 경우 그보다는 사회적·정서적인 면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옛날 훈장어른의 하얗게 센 긴 턱수염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엄의 상징이었고 삼단같이 고운 여인네의 머리칼은 여성스러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털에도 나름의 생리적 기능이 있다. 몸 전체에 난 솜털의 경우는 매우 예민하고 미세한 신경자극을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다. 또한 털이 자라나는 부위에 따라 기능이 확실하게 인식된 것들이 있다. 속눈썹과 코털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먼지나 이물질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고, 겨드랑이나 성기부위의 털은 마찰로부터 피부를 보호한다.
흥미롭게도 털은 일반적인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 털 한올은 약 80g의 무게를 지탱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털 1천개를 한데 모으면 유치원생 4명을 들어올리고 털 1만개를 모으면 자동차를 끌어당길 수 있다.
전체 피부에는 약 5백만개, 머리와 얼굴에는 약 1백만개의 털이 있으며 머리털은 8만-12만개다. 털은 한달에 1㎝ 정도 자라므로 한달 동안 자라는 털의 수를 평균 10만개로 잡으면 1년에 약 12㎞의 털이 새로 자라는 셈이다.
털은 성인기보다 성장이 활발하고 신진대사가 활발한 청소년기에 빨리 자란다. 하루 중에는 밤보다 아침에, 계절적으로 겨울보다는 여름에 몸의 신진대사가 활발하기 때문에 털이 빨리 자란다. 그리고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남성보다 여성의 경우에 털이 빨리 자란다. 한편 이발 또는 면도를 하거나 털을 깎으면 털이 빨리 자란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손상된 털은 회복 불가능
사람의 피부에는 손바닥과 발바닥을 제외한 몸 전체에 털이 있다(다른 동물에서와 비슷하게 손바닥과 발바닥은 원래 발생학적으로 모낭이 없기 때문에 털이 나지 않는다). 여성의 경우에도 얼굴, 팔, 다리, 몸통에 아주 짧고 가는 털인 솜털이 있는데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종종 이런 털들이 굵고 길게 자라서 눈에 잘 띄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은 인종적·가족적인 영향인데, 특히 지중해 연안지방의 여성들에서 두드러진다. 백인여성이 흑인보다 털이 많고 눈에 잘 띄며, 동양인과 미국 인디언 여성들은 가장 털이 적은 편이다.
가족의 내력에 털이 많지 않은 여성이 갑자기 털이 많이 나는 경우 호르몬 이상을 의심해봐야 한다. 하지만 이런 다모증 여성의 경우에도 거의 대부분은 호르몬이 정상이다. 단지 일부만이 질병이다. 예를 들어 부신이나 난소에 질환이 있는 경우 이들 장기에서 남성호르몬을 많이 만들어내 다모증이 생길 수 있다. 물론 모든 여성은 정상적으로 소량의 남성 호르몬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신건강상태와 털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다만 영양결핍이나 과도한 다이어트로 인한 단백질 부족상태, 호르몬 이상, 갑상선 기능 이상시에 털이 윤기없이 푸석푸석하고 길게 자라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신건강상태보다는 오히려 털 자체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과도한 자외선의 영향, 먼지, 파마약이나 염색약 등 과도한 모발용품의 사용, 드라이기로 인한 털의 열손상, 수영장의 약품 등 각종 외인성 손상이 모발을 건강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다.
털은 죽은 세포로 이뤄져 있어 스스로 재생하지 못한다. 즉 한번 손상받은 털은 영구히 그 상태를 지속한다. 따라서 윤기있고 건강한 머리카락을 얻기 위해서는 손상되지 않은 새로운 털이 자라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린스나 컨디셔너 같은 모발용품은 단지 일시적인 효과 밖에 없지만, 털이 더이상 손상되는 현상을 막아줄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