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년간 우리 생활에 불어닥친 인터넷과 이동통신의 혁명이 이뤄질 수 있었던 기반은 어디에서 왔을까. 올해 노벨물리학상은 그 기반이 바로 물리학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종접합구조(hetero-junction structure)라는 새로운 반도체 구조를 이용해 고속전자학과 광전자학을 발전시킨 러시아 이오페 연구소의 조레스 알페로프(Zhores I. Alferov) 박사와 미국 산타바바라 소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허버트 크뢰머(Herbert Kroemer) 교수, 그리고 집적회로의 개발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은 미국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사의 잭 킬비(Jack S. Kilby) 연구원이 올해의 노벨물리학상의 영예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구조의 새로운 장 이종접합구조
반도체의 종류는 크게 실리콘과 같이 주기율표의 4족 단일원소로 이뤄진 ‘단원소 반도체’와 갈륨-비소(GaAs)나 인듐-인(InP)과 같이 3족과 5족 물질을 결합해 형성한 ‘화합물 반도체’로 나눌 수 있다. 실리콘 반도체는 규소로만 이뤄진 균질의 구조로서 기판 윗면을 가공해 각종 전자소자들을 제작한다.
반면 화합물 반도체는 주로 MOCVD나 MBE와 같은 특수 장비를 이용해 갈륨-비소와 같은 화합물 반도체 기판 위에 알루미늄갈륨비소(AlGaAs)나 인듐갈륨비소(InGaAs)와 같은 기판 물질과는 다른 혼합화합물을 여러 개의 단결정 박막층으로 성장시키는데 이를 ‘이종접합구조’라고 한다. 이때 각 층의 두께는 수나노미터(1nm=${10}^{-9}$m)에서 수마이크로미터(1μm=${10}^{-6}$m)까지 정밀한 두께 조절이 가능하다.
때문에 화합물 반도체는 실리콘 반도체와 달리 빛을 발할 수도 있고, 이종접합구조를 이용하면 전자의 흐름을 더욱 원활하게 만들 수 있는 등 여러가지 물리적 특성을 인위적으로 좋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종접합구조를 처음으로 제안하고 응용한 사람이 다름 아닌 금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알페로프 박사와 크뢰머 교수이다. 이를 바탕으로 크뢰머 교수는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걸쳐 기존의 소자보다 동작 속도와 성능을 크게 향상시킨 새로운 트랜지스터와 반도체 레이저 구조를 이론적으로 제안했고, 알페로프 박사는 1969년에 최초로 실온에서 작동 가능한 반도체 레이저를 연구, 개발했다.
실온발진 반도체 레이저는 오늘날 보편화된 레이저 프린터, CD 플레이어, 슈퍼마켓의 바코드, 초고속 광통신 등에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고주파 트랜지스터의 경우에는 현재 1GHz(${10}^{9}$Hz)대의 이동통신을 가능하게 했으며, 미래에는 우주 연구 등에 사용될 1백GHz 대역의 초고주파 소자 개발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화합물 반도체를 이용한 이종접합구조는 정보 통신의 속도를 획기적으로 증가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한편 킬비 연구원은 오늘날 손바닥만한 컴퓨터가 존재할 수 있게 한 기술인 반도체 집적회로의 초기 구상과 구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알다시피 초기의 컴퓨터는 대부분 진공관으로 만들어져 집채만한 크기에 전력 소모도 엄청났던 데 비해, 이후 개발된 트랜지스터가 진공관을 대체하면서 큰 변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집적회로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모든 회로 구성이 개개 소자들을 PCB 회로기판 위에 부착시킨 후 일일이 납땜해야 하는 진부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고 따라서 더 이상의 소형화는 한계에 부닥친 상태였다.
1958년 킬비 연구원은 초보적이기는 했지만 한개의 실리콘 반도체 칩 위에 여러 개의 소자를 집적시켜 회로를 구성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가공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오늘날 메가 또는 기가 바이트 용량의 D램 기억소자나 고성능 컴퓨터프로세서의 출현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즉 킬비 연구원의 업적은 정보 처리와 저장량을 비약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게 만든 견인차인 셈이다.
수상자들은 해당 분야에서 수상에 걸맞는 지대한 공헌을 한 과학자임은 틀림없다. 또한 다른 대부분의 역대 수상자들이 그랬듯 자신이 이미 30-40여년 전에 이룩한 업적을 뒤늦게 인정받은 경우이다. 따라서 일반인이 보기에는 예년과 별다름 없는 평이한, 매년 있어온 연례적 수상자 발표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상업성과 실용성에 무게 실어
하지만 면밀하게 선정 이유를 들여다보면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오늘날 빠르게 우리 현실을 뒤바꿔 놓고 있는 정보통신 혁명의 중요성이 급기야는 순수물리학의 아성으로 여겨져 왔던 노벨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역대 노벨물리학상의 수상 내역에 따르면 수상업적은 대부분 학문적 차원에서 인류 지식의 한계를 넓히는 데에 크게 공헌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올해의 수상자 선정은 인류 문화를 선도하는 기술적 진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학문의 현실성 또는 응용성이 크게 강조됐다는 점이다. 그간의 노벨물리학상은 현상이든 소자이든 최초의 아이디어를 제안·개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통례였다. 1957년 쇼클리, 바딘, 그리고 브래튼 3인이 트랜지스터 개발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경우가 그 실례이다.
그러나 알페로프 박사는 반도체 레이저의 최초 개발자가 아니라 처음으로 실용화가 가능한 구조를 제안해서 이를 구현하는 데에 공헌한 인물이다. 학문 차원의 연구가 아니라 상업성이나 현실성이 있는 소자 개발에 무게를 실어준 셈이다. 크로머 교수도 정통 물리학을 추구하기보다는 응용에 기초를 둔 소자물리학을 연구해온 과학자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킬비 연구원은 전공 분야조차도 물리학이 아닌 전기공학이었다. 아울러 그의 최종학력이 박사가 아닌 석사이며 평생을 산업체에서 근무했던 현장맨이었음은 전통적인 분위기의 학문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러한 응용성의 강조는 올 노벨화학상에서도 전도성이 강한 고분자 물질에 대한 연구 업적이 수상 대상이 됐다는 사실과 맥락을 같이 한다.
오늘날 21세기 물리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섣불리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만큼 전통 순수물리학은 내외적으로 도전을 받고 있으며,변화를 요구받고 있다.개개 학문의 영역이나 경계는 점차 모호해지고 학문간 또는 학제간의 연계와 공동 연구가 새로운 학문의 조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따라서 다양하게 분화된 물리학이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타분야와 다양한 접목을 시도하는 것은 의미 있고 필요불가결한 일이다.인간 본연의 호기심에 기초한 순수물리와 현실을 직시한 응용물리가 조화롭게 겹쳐질 때에 비로소 21세기에도 건강함과 다양성을 겸비한 물리학을 지켜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올 노벨물리학상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