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은 어떤 사람에게든 대단한 영광이다.하지만 노벨상의 화려한 얼굴 뒤에는 또다른얼굴이 있다.잘못된 수상이 있는가 하면 파렴치한 수상자도 있고 로비를 벌인 자가 있는가 하면 수상을 고사하던 천재도 있었다.
알프레드 노벨이 세계주의적인 이상을 품고 유언으로 남긴 노벨상은 그의 기대 이상으로 매년 전세계인의 가슴 속에 감동과 경외의 순간을 안겨주는 인류 최고의 행사로 자리잡았다. 결코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노벨에게 자신의 이름이 최고의 가치로 후세에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노벨은 평생 연구와 사업으로 정신없이 바빴지만 마음은 늘 우울하고 자조적이었다. 여성에게 소심했던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다. 54세때 형 루드비에게 쓴 편지의 한구절을 보면 그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불쌍한, 생기다만 알프레드 노벨은 태어났을 때 인도적인 의사가 목졸라 죽였어야 했다. 장점: 항상 손톱을 깨끗하게 다듬고 남의 짐이 되지 않았다. 단점: 가족, 명랑한 정신, 식욕이 부족했다. 소망: 생매장 당하지 않는 것. 죄: 돈을 숭배하지 않은 것. 일생에서 중요한 사건: 없다.”
다행히도 그의 막대한 재산을 위임받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노벨상은 제창자의 어두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런 뛰어난 운영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과 관련해서 가끔씩 지하의 노벨도 미간을 찌푸릴 만한 불미스런 일들이 생기곤 한다.
‘암의 원인 기생충’에 수여
가장 심각한 경우는 잘못된 수상. 1926년 심사위원회는 기생충이 암의 원인임을 밝힌 덴마크의 병리학자 요하네스 피비거의 불멸(?)의 업적을 인정해 생리·의학상을 수여했다. 그러나 이 결과는 실험에 쓰였던 특정 품종의 쥐에서만 발견되는 희귀한 현상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다행히도 그때는 이미 피비거가 죽은 뒤였다.
천연색 사진으로 1908년 물리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리프만의 경우도 선정위원회의 오류로 기억되고 있다. 리프만은 소르본느에서 수리물리학을 가르친 물리학자. 1891년 그는 빛의 간섭현상을 이용해서 최초로 컬러사진을 만들었다. 그의 수상이 구설수에 오른 것은 그의 발명품이 실용화되지 않았다는 것. 오늘날의 컬러사진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원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위원회는 심오한 자연의 법칙을 발견한 것도 아니면서 인류의 삶에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업적에 상을 준 셈이다. 이때 이후로 선정위원회는 발명에 대해서는 수상을 꺼리게 됐다. 20세기를 바꾼 발명왕 에디슨이나 라이트형제가 노벨상을 타지 못한 이유이다.
1912년 물리학상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 경우는 자국인(스웨덴)에 대한 배려가 상의 권위를 떨어뜨렸다고 볼 수 있다. 가스 축압기 회사의 공학자였던 닐스 댈런은 등대의 불빛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기구를 만든 업적으로 물리학상을 받았다. 물론 이 발명으로 무인등대가 선보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노벨상감은 아닌 것 같다.
펄사 먼저 발견한 여류학자 수상 제외
수상부문간의 미묘한 관계가 수상자 선정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물리와 화학, 화학과 생리·의학의 경계에 걸친 업적인 경우 대상자의 분야가 영향을 주었다. 오스트리아의 유태계 여류 물리학자였던 리제 마이트너는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과 함께 원자폭탄을 가능케 했던 핵분열의 발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1944년 화학상 수상자 명단에 물리학자인 그녀의 이름은 빠진 채 오토 한만 올라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조만간 물리학상을 타게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국 그녀는 수상의 영예를 안아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여성 차별로 노벨상을 놓친 경우도 있다. 1974년 물리학상은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천체물리학자인 안토니 휴이시 교수에게 돌아갔다. 수상업적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중성자별인 펄사를 발견한 것. 하지만 1967년 펄사를 처음 발견했던 사람은 그의 지도학생이었던 조셀린 벨이었다. 세인들은 조셀린 벨도 노벨상을 공동 수상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휴이시의 독자 수상은 여성 차별이라고 주장해 당시 큰 사회적 이슈가 됐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업적의 하나로 평가되는 DNA 이중나선구조의 발견. 이 일을 해낸 물리학자 프랜시스 크릭과 미생물학자 제임스 왓슨은 당시 풋내기 과학자들이었다. 이들과 경쟁했던 사람은 바로 구조화학의 대가인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 크릭과 왓슨은 당시 폴링의 명저 ‘화학결합의 원리’를 뒤적이며 DNA 구조를 연구하는 수준이었다.
폴링은 DNA의 X선 회절사진이 많았던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방문하려 했다. 하지만 반전·반핵운동에 참여한 경력으로 출국이 금지됐기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의 방문이 이뤄졌다면 아마도 DNA 구조의 발견은 화학상의 목록에 올라가 있을 것이다. 물론 1962년 생리·의학상은 크릭과 왓슨에게 돌아갔다.
공교롭게도 1953년 크릭과 왓슨의 발견 이듬해 폴링은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폴링의 노벨상 수상을 두고 말이 많다. 풋내기들에게 대발견을 빼앗긴 거장을 위로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선정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폴링은 1962년 반핵운동의 공로가 인정돼 평화상까지 수상하게 됐으니 그때의 아쉬움을 이중으로 보상받은 셈이다.
때로는 업적이 시대를 너무 앞서가 수상이 늦어진 경우도 있다. 1926년 양자역학의 기초가 되는 파동함수의 통계적 해석을 창안한 유태계 독일인 물리학자 막스 보른이 대표적인 경우. 당시에는 아인슈타인 등 학계 거물들이 그의 해석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28년이 지난 1954년에야 보른은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직까지도 보른의 후손들은 스웨덴 아카데미에 반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스승의 수상에 대해 표절 주장
종교도 수상자 선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화학계에는 화학반응이론의 대가였던 미국 유타대의 헨리 아이링 교수가 노벨상을 타지 못한 이유가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아이링 교수는 우리나라 이학박사 1호인 이태규 교수와 오랫동안 공동연구를 벌여왔다. 유체의 흐름을 기술한 ‘리-아이링 이론’을 비롯해 두사람은 반응의 활성화 에너지와 속도 등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1969년 두사람이 공동으로 노벨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독실한 몰몬교도였던 아이링 교수가 걸림돌이었다는 후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상자가 나올 뻔한 순간이었다.
수상자 선정의 공정성을 놓고 과학자간의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33년 생리·의학상은 미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모건에게 돌아갔다. 그러자 그의 제자였던 허먼 멀러는 초파리 염색체의 유전자 지도를 만든 것은 자신의 업적이라며 스승을 표절자라고 비난했다. 그후 그는 십수년간 외국을 떠돌았지만 마침내 초파리 염색체 지도를 가능케 했던 기술이 인정돼 1946년 생리·의학상을 타게 됐다.
말많은 올해 화학상수상자 시라카와
올해 화학상에서는 한국인 과학자가 전도성 고분자의 발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밝혀져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변형직 박사(74).
원자력연구소의 연구원이었던 변 박사는 1967년 일본 도쿄공업대로 연수를 가게 됐다. 올해의 수상자 히데키 시라카와 쓰쿠바대 명예교수(65)는 그 당시 이께다 교수 밑에서 같이 연구하던 조교였다. 당시 이 연구팀은 실리콘반도체를 대체할 유기반도체의 후보물질인 전도성 폴리아세틸렌을 만드는 일에 몇년째 매달려 왔지만 진전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변 박사는 관련 논문을 읽고 흥미가 생겨 자신이 직접 이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촉매의 양을 바꿔 가며 전도성을 띤 고분자를 만드는 실험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반응기를 가동하던 중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돌아와보니 반응용액의 표면에 찬란한 은빛의 막이 생겼다. 이것이 계기가 돼 1977년 도핑된 전도체 폴리아세틸렌(올해 화학상 해설기사 참조)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당시 그 사실을 보고 받은 이께다 교수는 변 박사에게 자기 연구나 제대로 하라며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그뒤 변 박사는 모든 자료를 시라카와 박사에게 넘겨주고 귀국해버렸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요즘 시라카와 교수의 수상소식에 변 박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했지만 그의 업적을 선선히 인정했다. 처음 발견은 자신이 했지만 그뒤 10여년 간 계속 이 연구에 매달린 사람은 시라카와 교수였기 때문이다. 다만 시라카와 교수가 당시 상황을 얼버무리는 것이 섭섭하다고 한다.
아인슈타인, 상금을 전처에게
노벨은 연구가답게 수상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상금은 의미가 없다며 수상자에게 상당액수의 금액이 돌아가게 유언장을 만들어놓았다. 그 뜻을 기려서인지 대다수의 수상자들이 상금을 연구비나 후학의 양성에 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때로는 전혀 엉뚱한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시절부터 사귀던 아내 밀레바 마리치와 1919년 마침내 정식 이혼했다. 그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면서 가정을 소홀히 한 결과 아내와의 관계에 금이 가버린 것이다. 자식 둘을 밀레바에게 맡기며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노벨상을 탈 경우 전액을 그녀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1921년 마침내 물리학상을 수상하자 그는 약속대로 상금을 전처에게 주었다. 돈으로 마음의 부담을 털어낸 셈이다.
노벨상이 연구를 중단시킨 사례도 있다. 1986년 42살에 중합효소연쇄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PCR)법을 개발해 분자생물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미국의 카리 물리스는 이 업적으로 1993년 화학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화학적 편견을 가진 일반론자”라고 부를 정도로 만능재주꾼. 그는 자외선을 쬐면 색이 변하는 플라스틱을 발명했고 생화학을 공부하던 대학원 시절에 영국 과학전문지‘네이처’에 ‘시간 전도의 우주론적 의미’라는 기상천외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벨상을 탄 뒤에는 아내와 함께 통나무집에서 글을 쓰며 소일하고 있다고 한다.
동분서주한 풀러렌 발견자
노벨상이 사람을 바꿔놓은 경우도 흔하다.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찾아온 명성과 권위를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왓슨이 대표적인 경우. 그는 미국 하버드대 생물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학과를 주무르며 독선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당시 생물학과에서 벌어졌던 상황은 20세기 20대 인물로 뽑힌 바 있는 미국의 저명한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자서전 ‘자연주의자’에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최근에는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타기 위해 노골적으로 로비를 펼치는 사례도 흔히 발견된다.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매년 전세계 저명한 과학자들에게 수상자 후보추천서를 보낸다. 그러면 어떻게 그 소식을 알았는지 이들 추천서를 받은 과학자들에게 자신을 추천해달라는 편지나 팩스를 보내거나, 심지어는 인맥을 동원한 압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또 해외강연에는 인색하면서도 스웨덴이라면 자비로라도 날아가는 과학자들도 있다. 노벨상 심사위원이 오기라도 하면 과학자들은 최고의 접대를 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1980년대 후반 축구공과 똑같은 구조를 지닌 물질인 풀러렌을 발견해 화제가 됐던 리차드 스몰리 등이 대표적인 경우. 사실 실제 크기의 1억분의 1인 초미니 축구공 분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희한한 일인데다, 풀러렌이 기존에 분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성질이 많아 응용범위가 매우 넓다는 사실도 곧 밝혀졌다. 따라서 이들의 노벨상 수상은 어차피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조급함을 못이겨 전세계 주요 과학자들에게 이 발견의 중요성을 알리는 편지와 팩스를 보내는가 하면 각종 강연회에 부지런히 참석해 자신들의 업적을 알리느라고 동분서주했다. 결국 이들은 1996년에 화학상을 탔다.
업적에 만족한 천재물리학자
모든 과학자들이 이처럼 노벨상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1965년 물리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천재 물리학자 리차드 파인만은 자신의 수상소식을 듣자 오히려 상을 받지 않으려 했다. 평소 파인만은 노벨상이 사람을 망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의 아내 그외네스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을 바꾸게 된다. 그녀는 만일 그가 수상을 거부할 경우 “대중의 관심이 훨씬 더 높아질 것”이라고 겁을 줬던 것이다.
파인만은 훗날 한 인터뷰에서 “노벨상 수상 때문에 연구를 잠시 중단해야 했다. 내 인생을 되돌아볼 때 그것은 분명 귀찮은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나는 이미 상을 받았다.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기쁨과 많은 물리학자들이 내 연구결과를 이용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