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멀리하던 독신의 조각가 피그말리온. 로댕만큼이나 뛰어난 예술가였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지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상적인 미를 지닌 여인상을 조각한다.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지만 차가운 대리석일 뿐인 조각상을 사랑하게 된 피그말리온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조각상에 대한 연정을 호소했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조각상에 다가간 피그말리온은 조각상을 껴안고 냉기가 느껴지는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여인상의 얼굴에 혈색이 돌면서 차갑고 단단했던 대리석이 부드럽고 따뜻한 여인의 살결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온기가 점차 몸 아래로 퍼지면서 대리석상은 어느새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살아있는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갈라테아라고 불리게 된 이 여인과 피그말리온은 그 뒤 행복한 삶을 살았다.
접촉 결핍증을 앓고 있는 현대인
마녀의 사과를 먹고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졌다가 백마 탄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난 백설공주의 이야기도 있듯이, 키스처럼 친밀한 피부접촉은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는 이런 이미지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음이 보여준다. 스킨십, 즉 촉각의 자극은 남녀관계 뿐 아니라 사람이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살아나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 피부접촉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면 어른이 돼서도 사회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촉각은 다른 감각들과는 달리 감각기관이 몸의 특정한 부위에 따로 있지 않고 몸을 감싸는 피부 전체가 자극을 받아들인다. 피부는 뇌와 마찬가지로 외배엽에서 분화된 조직이다. 피부를 '제2의 뇌'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손을 꼼지락거리며 무언가를 만지려한다. 신생아의 뇌로 들어오는 정보의 대부분은 촉각을 통해서다. 만일 이 시기에 충분한 접촉 자극이 없을 경우 면역력이 떨어지고 뇌의 회로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는다. 실제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부모를 잃은 아이들 중 피부접촉이 결핍된 아이들의 조기사망률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영국 센트럴 런던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아버지와의 피부접촉이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유아시절 아버지가 목욕을 자주 시킨 아이들 중 3%만이 친구를 사귀는데 문제를 겪는데 비해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그 비율이 30%에 이른다. 아버지와 접촉이 부족했던 아이들 중 상당수는 친한 친구가 없으며 남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연구진들은 아이들이 아버지와의 신체접촉을 통해 어머니 이외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서구사회에서는 유아기 때의 접촉 결핍의 심각성을 인식해 피부접촉을 장려하는 '터치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미숙아나 버려진 아기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쓰다듬어 주는 자원봉사자들도 많다.
과도한 시각정보는 공격성 키워
최근 우리나라도 서구 이상으로 접촉 결핍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맞벌이 부부 증가와 지나친 조기교육 열풍으로 아이들은 부모의 품을 떠나 비디오나 TV의 자극적인 시각정보에 장시간 노출돼 있다. 한국뇌과학연구원 오미경 박사는 “요즘 아이들은 시각정보처리영역인 뇌의 후두엽이 발달한 반면 감정조절과 판단에 관여하는 전두엽은 위축돼 있다”며 “그 결과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공격성이 높은 아이들이 크게 늘었다”고 말한다.
촉각 자극의 결핍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20세기 후반 전자산업의 눈부신 발전은 사람들이 오감 가운데 시각과 청각, 특히 시각적 정보에 치우쳐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특히 PC의 보급과 인터넷의 등장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 평균 서너시간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
영국의 화학회사 ICI의 지원으로 감각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한 영국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찰스 스펜스 박사는 최근 제출한 결과 보고서 ‘감각의 비밀’에서 감각의 결핍은 현대사회의 질병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스펜스 박사는 “우리는 몸을 쓰는 야외 생활에서 멀어져 하루의 90%를 실내에서 지내는데, 그 중 상당시간을 TV나 컴퓨터 앞에서 보내고 있다”며 “이런 변화로 몸은 편해졌을지 몰라도 여러 감각자극을 골고루 받으려는 몸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시각이 정보를 독식하는 동안 촉각과 후각은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탐닉은 결핍에 대한 보상행위
스펜스 박사는 현대인이 무엇인가에 탐닉하는 경향이 강한 것도 이런 결핍에 대한 보상이라고 설명한다. 스펜스 박사는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경험의 대부분은 복합감각을 통해서 얻는다”며 “와인 한잔을 마실 때도 단순히 맛뿐 아니라 빛깔, 온도, 향기, 입안에서의 느낌이 복합적으로 전달된다”고 말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아로마테라피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사람들은 은은한 조명과 음악이 흐르는 실내에서 천연 향료의 향기를 맡으며 마사지를 받는다. 스펜스 박사는 “마사지는 긴장완화와 피로회복 뿐 아니라 몸의 자기 치유력도 높여준다”며 “마사지를 받는 여성들은 피부접촉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촉각과 후각처럼 한동안 무시돼 왔던 감각의 중요성이 밝혀지면서 제품이나 서비스에서 이런 측면을 강화하려는 기업체도 늘고 있다. 화학회사인 ICI가 스펜스 박사의 연구를 지원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촉각정보 재생 연구 시작
최근에는 촉각정보를 전송하고 재생하려는 연구도 활발하다. 감각정보 자체의 질을 높임으로써 부작용을 줄이고 사람들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몸 전체가 느끼는 감각인 촉각은 종류도 다양해 바늘에 찔렸을 때 아픔을 느끼는 통각, 얼음의 차가움을 느끼는 온도감각, 외부에서 가해오는 힘을 느끼는 압각 등이 몸의 부위에 따라 일정치 않게 분포해 있다.
따라서 우리 몸이 느끼는 모든 촉각을 정보화해 전송하거나 재생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촉각정보가 제한적이나마 전송과 재생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최근 입증되고 있다. 과학자들이 시각과 청각에 이어 촉각의 전송과 재생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이유는 촉각이 수치화가 가능한 물리적 정보, 즉 압력, 진동수, 온도 등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다만 촉각정보는 청각이나 시각정보에 비해 양이 방대하고 전달 과정도 복잡해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이를 실시간에 처리하기란 불가능했다. 감각 재생이 의미를 가지려면 원본과 가상본이 실시간에 구현돼야 하기 때문이다. 생방송 화면은 지나가고 있는데 뒤늦게 손끝에 느낌이 전달돼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컴퓨터 처리 속도가 눈부시게 향상됨에 따라 웬만한 정보량은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촉각정보를 재현해주는 햅틱스(haptics) 분야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김종호 박사는 “시청각정보가 아무리 완벽하게 재생되더라도 실제 상황의 70%정도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라며 “여기에 촉각정보가 더해져 85-90%의 정보가 전달되면 생생한 현실감이 느껴질 것”이라고 말한다. 머지않아 현대인의 고질병인 감각정보의 편식도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