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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30억개 염기쌍이 흩어져 있다면

유전정보 담는 DNA존재 불가능

인간의 30억개 염기쌍이 흩어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는 인 덕분이다.인은 인산이라는 3양성자산을 만들고,인산은 당과 교대로 결합하면서 당-인한 골격을 만들어 염기가 일정한 순서에 따라 결합하도록 한다.유전정보를 기록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한다는 얘기다.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사회아래 미국 국립인간게놈연구소장 프랜시스 콜린스와 유전공학회사 셀레라 대표인 크레이그 벤터가 인간게놈지도의 초안을 발표한 2000년 6월 26일은 생명과학의 세기가 되리라고 믿어지는 21세기의 서막을 장식한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미국 록펠러 연구소의 에이버리가 유전정보는 DNA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증명한지 채 60년이 되기 전인 시점이다.

사람의 몸에 들어있는 60조개의 세포 하나하나에는 30억개의 염기쌍이 23개의 염색체에 나누어져 들어있다. 물론 부모에게서 각각 23개의 염색체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60조개의 세포 하나하나에 각각 60억개의 염기쌍이 들어있는 셈이다. 60억개의 염기쌍이란 도대체 얼마만한 양의 정보인가. 그만큼의 정보는 어떤 방식으로 기록돼 있는 것일까.

우선 간단한 박테리아의 경우를 살펴보자. 대장균의 유전자 수는 4천2백88개, 염기쌍 수는 4백64만개로 알려졌다. DNA의 염기 서열은 결국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로 바뀌어 생체 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자연은 오랜 세월의 시행착오 끝에 3개의 염기 서열을 1개의 아미노산으로 읽어나가는 유전암호를 개발했고, 그 유전암호를 태초의 생명체로부터 지금까지, 또 단세포 생물로부터 고등동물까지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장균은 4백64만개 염기 서열 안에 약 1백50만개 아미노산 서열에 관한 정보를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4천2백88가지의 유전자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단백질을 만들어낸다면 대장균은 약 4천가지의 단백질을 가지고 있고, 이 4천가지 단백질에 관한 정보가 약 1백50만개 아미노산 서열에 기록돼 있다면 이들 단백질은 평균적으로 3백50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미노산의 평균 분자량을 1백20이라고 하면 단백질의 평균 분자량은 4만 정도가 되는 것이다.

염기가 30억개라도 꿰어야 DNA

인간은 박테리아보다 얼마나 더 복잡한 존재일까. 인간의 단백질 하나가 박테리아의 단백질 하나보다 고차적인 구조나 기능을 가질까. 흥미롭게도 박테리아와 사람에게서 어떤 특정한 기능을 가진 단백질을 분리해 조사해보면 단백질의 크기, 즉 평균 분자량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아미노산 서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분자 단위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날 때 그것이 박테리아에서 일어나는지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지, 분자들이 알 방법도 상관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박테리아의 4천에 비해 사람의 유전자 수는 대략 8만이라고 한다. 8만대장경의 경판 수와 비슷한 숫자다. 그러니까 유전자 숫자 면에서, 다시 말해서 필요한 단백질의 종류 면에서 사람은 대장균보다 약 20배 복잡한 존재다. 그런데 사람이나 대장균이나 단백질의 크기, 즉 유전자의 크기는 비슷할 테니까 사람이 대장균과 유사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면 약 9천만 개의 염기쌍만 있으면 족할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30억개의 3%에 불과한 숫자다.

DNA를 지름이 1cm 정도 되는 밧줄로 확대하고, 30억개 염기쌍에 해당하는 DNA를 공 모양으로 빈틈없이 감는다면 그 공은 사람 키의 두배나 될 것이다. 그 중에서 3% 정도가 의미 있는 유전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 염색체에 들어있는 30억 개의 염기 중에서 97%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은 단백질을 만드는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어떤 이유에서인가 3%에 해당하는 유전자 사이에 끼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대장균의 4백64만개 염기이건 사람의 30억개 염기이건, 이 염기들을 특정한 순서로 연결해서 소위 염기 서열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이 엄청난 숫자의 염기들은 아무런 정보를 가지지 못한다. 8만대장경의 글자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으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염기가 30억개라도 꿰어야 DNA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유사이래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흙판, 석판, 파피루스, 죽간, 짐승의 가죽 등 다양한 재료를 정보 기록에 사용해왔다. 이제는 종이가 필요 없는 컴퓨터 세상이 돼가고 있다. 그런데 인류가 지상에 등장하기 약 40억년 전부터 생명체는 정보 기록의 밑바탕으로 당-인산 골격(sugar phosphate backbone)을 개발해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방식은 아미노산 자체의 카르복시기(-COOH)와 아민기(-${NH}_{2}$)가 펩티드 결합을 통해 한줄로 연결돼 단백질을 만드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염기의 서열을 기록하는 데는 당-인산이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골격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인산은 필수적이다. 인산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DNA뼈대의 핵심 인


사람의 몸에 들어있는 60조개의 세포 하나 하나에는 30억개의 염기쌍이 23개의 염색체에 나눠져 있다.


어떻게 박테리아가 단세포 식물이나 동물로 진화했나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지금부터 약 20억년 전부터 10억년 전 사이는 지질학적으로나, 기후 변화에서나, 생물학적으로나 별로 변화가 없는 ‘지구 역사에서 제일 지루한 시기’라고 불리어진다.

지질학적으로 별로 변화가 없었다는 것은 기본적인 ‘생명의 연료’(biofuel)인 인(隣, phosphorus)이 침식 작용에 의해서 대양에 축적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지루한 시기에는 생물학적 진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章)이 열릴 준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옥스포드대학과 캔버라 대학의 지질학자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서 두께가 6km에 달하는 석회암 층의 약 15억년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10m 간격으로 인의 함량을 조사했는데, 화석 자료에서 유추했던 것과 같이 생물학적 정체 기간이 인의 결핍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들에 따르면 인의 부족은 박테리아들로 하여금 공생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했고, 이것이 진핵세포가 돼 단세포 식물과 동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물론 인은 당-인산 골격을 통해서 DNA의 구조를 만드는 일 외에 대사를 통해서 에너지를 저장하고 관리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세포 활동에서 인이 중요한 이유의 핵심에는 인은 질소와는 달리 3양성자산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산은 산해리 과정을 통해 양성자를 세개까지 내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질소와 인은 주기율표에서 같은 5족인데 질산은 ${HNO}_{3}$이고 인산은 ${H}_{3}{PO}_{4}$이다. 질산은 (OH)${NO}_{2}$로, ${H}_{3}{PO}_{4}$는 ${(OH)}_{3}$PO로 풀어 쓸 수 있다. 여기서 OH 부분은 당의 OH와 만나면 물(${H}_{2}$O)이 빠져나가면서 -O- 식의 결합을 이룬다. 그러니까OH 부분은 산과 당을 연결시켜주는 손이라고 볼 수 있다.

질산은 손(결합팔)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당과 결합하고 나면 더이상 결합을 만들 능력이 없다. 그런데 인산은 손이 3개나 되기 때문에 둘은 양쪽의 당과 손을 잡는데 사용하고 나머지 하나로 산의 성질을 나타낸다. 그래서 DNA는 RNA와 함께 핵산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최초의 생명체가 나타나는 과정에서 자연은 여러가지 산을 사용해서 DNA의 골격을 만드는 시도를 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산은 질산처럼 양성자를 하나만 내놓는 1양성자산이거나 탄산, 황산처럼 양성자를 두개까지 내놓는 2양성자산이다. 다행히도 인이라는 원소가 있어서 인산이라는 3양성자산을 만들고, 인산은 당과 교대로 결합을 이루면서 당-인산 골격을 만들어 염기를 일정한 순서에 따라 결합해 유전 정보를 기록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왜 질소는 인과 같이 3개의 OH를 가진 3양성자산을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 왜 인은 질소와 달리 3양성자산을 만들 수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인 원자가 질소 원자보다 크기 때문에 옥텟 규칙(과학동아 2000년 5월 호 참조)이 지정하는 8개의 최외각전자수를 초과해서 전자를 받아들일 여유를 가지기 때문이다. 질산에서 질소는 8개의 최외각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인산에서 인은 10개의 최외각전자를 가지고 있다. 2개의 전자를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약간의 여유가 인으로 하여금 생명의 핵심 화합물인 DNA의 뼈대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영광을 안겨준 것이다.

노자(老子)의 말에 ‘궁력거중 불능위용’(窮力擧重 不能爲用)이라는 말이 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무거운 것을 들고나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힘이 남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릇도 비어야 무엇을 담을 수 있듯이 원자도 허(虛)한 부분이 차있는 부분 못지 않게 중요할 수 있다. 하기는 모든 원자는 대부분이 빈 공간이다. 원자핵의 지름은 원자 지름의 10만분의 1 정도 밖에 안되고, 대부분의 공간에는 전자가 얇은 구름같이 떠돌고 있을 뿐이다. 그 허공 덕분에 전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원자들과 결합해서 2천만가지의 화합물들을 만들어내고, 신비로운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 한다. 원자의 허함이 물질 세계를 다양하게 만드는 근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소와 인 사이에서 나타나는 허함의 차이,이것이 인으로 하여금 DNA의 당-인산 골격을 가능하게 했고,오늘도 모든 생명체가 그를 바탕으로 생명의 정보를 기록하고 대물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인간의 30억개 염기쌍이 흩어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여유를 아는 인의 품성 덕분이라고나 할까.


염색체 조각들은 원심분리기에 의해 무게에 따라 분류된다.
 

2000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진행

    이경국
  • 김희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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