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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과의 시간여행

물로 쪼개고 지레와 통나무로 굴려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큰돌문화의 상징,고인돌.언뜻보면 그저 덩치만 큰 돌 같지만 조금만 생각하고 보면 옛사람들이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만든 과학적인 구조물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인돌과 함께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봄나들이 철을 맞이해 문화유적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한반도의 문화유적 중 대표적인 선사유적이 고인돌이다. 사람들은 고인돌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옛날 무덤? 연재만화?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밑에 굄돌로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매우 커다란 돌을 덮어 만든 과학적인 구조물이다. 지금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축조 기술을 알게 되면 옛사람들이 자연의 원리를 깊이 깨닫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고인돌은 역사에서 어떤 위치와 성격을 갖고 있을까. 이것은 후손들이 풀어야 하는 숙제다. 고인돌은 선돌과 함께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큰돌문화(巨石文化)의 상징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르며, 중국에서는 석붕(石棚)이나 대석개묘(大石蓋墓)라고 한다.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는 돌멘(Dolmen)이나 거석(巨石, Megalith)이라 부른다.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청동기시대).탁자식 고인돌의 전형이다.


바다 인접한 세계 전역에 분포

큰돌문화의 상징인 고인돌은 선돌과 함께 북유럽과 서유럽, 지중해연안, 인도와 동남·동북아시아 등 주로 바다에 인접한 세계 전역에 분포한다. 그 가운데 동북아시아의 경우 중국 절강성 40여기와 요령성 3백여기, 일본 큐슈에 6백여기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대동강 유역의 1만여기와 전남지방의 2만여기 등 수만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내륙은 물론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지역에 퍼져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우리나라 고인돌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주로 강을 낀 구릉지대나 산기슭, 고갯마루 등에 떼를 지어 분포한다. 구릉지대에서는 구릉방향으로, 산기슭에서는 산줄기방향으로, 강가에서는 강흐름방향으로, 골짜기에서는 골짜기방향으로 자연 지세에 따라 규칙성 있게 떼를 지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는 고인돌에 관해서는 바다를 통해 동남아시아나 중국 동북부지역에서 전해졌다는 전파설과 주변지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은 고인돌과 그 축조연대가 이르다는 점에서, 주변지역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자생설이 있다.


충북 제천 황석리에서 발굴된 고인돌 무덤방과 사람뼈 출토 모습.알칼리성 토양이라 뼈가 오래 보존됐다(청동기시대).
 

돌은 영원불멸의 상징

고인돌은 주로 죽은 사람을 묻기 위해 만든 것으로 말해지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제사를 위한 제단고인돌이나 집단의 묘역을 상징하는 묘표고인돌도 있다. 흔히 계곡이나 산기슭의 약간 높은 곳에 단독으로 세워놓은 것이 제단고인돌이고, 고인돌이 몰려있는 곳의 무덤방이 없는 것이 묘표고인돌이다.

돌로 무덤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현상이나 자연환경의 변화에 민감했던 당시 사람들은 돌을 영원불멸의 의미로 받아들인 듯하다. 그런 까닭에 큰돌을 이용해 죽은 사람의 영생을 기원하며 고인돌을 만든 것이 아닐까. 고인돌 주변에는 50-2백여기에 이르는 집터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큰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인돌과 같은 큰돌을 옮길 수 있는 인력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물로 돌을 쪼갠다

고인돌의 형태는 밖으로 드러난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굄돌에 따라 탁자식(북방식)·바둑판식(남방식)·구덩식(개석식)으로 나누어진다. 덮개돌 밑에 있는 무덤방의 짜임새도 만든 방법과 재료에 따라 구덩·돌널·돌덧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힘과 발달된 기술이 필요하다. 고인돌을 축조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당시의 채석과 운반기술이 오늘에 못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큰돌을 구해야 한다. 고인돌로 쓴 돌을 잘 살펴보면 켜를 이루고 있는데 대개 잘 쪼개지는 특성을 지닌 편마암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잘 쪼개지는 돌의 성질을 알고 골라썼다는 얘기다.

큰돌을 구하려면 큰 바위를 결에 따라 일정한 간격의 홈을 파고 그 홈에 나무를 박아 물을 붓고 며칠 밤을 지내거나 얼음을 얼린다. 그러면 물에 불은 나무나 얼음이 팽창하면서 바위가 쪼개진다. 이러한 방법은 지금도 쓰인다. 강기슭에 있는 바윗돌에서 돌을 떼어내기 위해 파놓은 홈을 볼 수 있다. 쐐기로 쓰는 나무로는 부피 팽창률이 높은 박달나무가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나무 바퀴와 지레

그렇다면 쪼개놓은 큰돌은 어떻게 옮겼을까. 바퀴 역할을 하는 곧은 통나무 위에 튼튼한 줄로 묶은 고인돌을 올려놓는다. 그런 다음 여럿이 지렛대로 밀고 앞에서 당기면서 움직였다. 겨울철에는 얼음과 눈의 미끄러운 성질을 이용해 옮기기도 한다. 실제로 50t의 돌을 옮기는데는 체중 60kg인 사람 50명이 지름 20cm의 통나무를 깔고 굴려 옮길 수 있다.

돌을 옮긴 뒤에는 받침돌을 먼저 세운다. 받침돌은 구덩이를 판 후 끈과 지렛대를 이용해 밀어 넣어 세우면 된다. 받침돌이 마련되면 그 높이까지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다. 덮개돌은 통나무 바퀴를 이용해 받침돌 위에 올려놓는다. 묻힌 흙을 파내고 받침돌이 드러나면 고인돌이 완성된다. 그러고 보면 옛 사람들이 돌의 성질과 지렛대의 원리는 물론이고, 굴림 막대가 바퀴의 역할을 한다는 것, 그리고 나무가 물을 흡수하면 팽창한다는 점 등을 훤히 다 깨닫고 있었다는 얘기다. 여기에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 생활도 큰 몫을 했다. 강화도 부근리에 있는 고인돌 덮개돌은 무게가 무려 1백여t이나 된다. 이렇게 거대한 고인돌을 세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협동했음은 물론이다.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

고인돌을 발굴해보면 사람뼈와 껴묻거리(부장품)가 나온다. 부장품으로는 여러 가지 토기와 화살촉 같은 석기 등이 출토된다. 드물게 청동유물이나 옥으로 만든 장식품이 나오기도 한다. 또한 사슴이나 돼지 등의 짐승뼈, ‘X’자를 새긴 자갈돌이나 자갈돌에 새긴 얼굴 등도 보인다. 이것은 묻힌 사람의 영생을 바라는 내세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고인돌은 늦은 신석기시대부터 만들어졌음이 확인됐다. 그 뒤 청동기시대에 널리 퍼졌고, 이른 철기시대까지도 가끔 쓰였다.

고인돌이나 선돌을 직접 보려면 이미 발굴돼 알려져 있는 곳을 찾으면 된다. 아울러 마을 명칭이 괸돌이거나, 마을에서 칠성바위, 삼태성, 거북바위, 떡바위, 괸돌이라 부르는 곳에 가면 고인돌을 볼 수 있다. 현재 발굴된 대표적인 고인돌은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 충북 옥천 안터 고인돌과 선돌, 전북 고창 지동리 고인돌, 전남 승주 고인돌공원이다. 이곳에 가서 고인돌을 타임머신 삼아 선사시대로 시간여행을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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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정동찬 연구실장
  • 진행

    강선욱
  • 사진

    정경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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