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가 나오기 전까지 세계최고로 평가되었던 지도를 조선초기의 학자들이 제작했다.
서유럽과 아프리카대륙의 존재를 한국인은 언제부터 알았을까. 사람들은 흔히 1603년에 이광정(李光庭)이 중국에서 가져온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1602년 세계지도를 보고 나서부터라고 생각해 왔다.
그 영향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조선학자들은 커다란 충격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사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세계는 뜻밖에도 너무 넓었다. 그들이 생각했던 세계, 알고 있던 세계보다 지도에 나타나 있는 세계는 훨씬 크고 다양했다.
그렇다고 조선학자들이 그때 처음 서유럽과 아프리카대륙을 안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놀란 것은 그 대륙들이 상상 이상으로 크고 중국도 그런 대륙 중의 하나일 뿐 결코 세계의 중심은 아니라는 사실에 있었다. 게다가 동해 저편에 있는 태평양이라는 바다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넓었고 아메리카대륙의 존재는 완전히 새로운 사실이었다.
그 충격은 새로운 사실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특히 중국에 와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과의 접촉은 놀라운 것이었다. 파란 눈에 노란 머리 그리고 큰 코를 가진 사람들이 이땅의 저쪽 편에 살고 있다니…. 그들의 언어와 글은 많은 새로운 지식을 알려 주었다. 중국은 분명히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지명까지 표기돼
그때까지 조선학자들이 서유럽과 아프리카대륙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인은 아마도 삼국시대 이후 중국의 서쪽에 여러나라가 있다는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역제국(西域諸國)이란 표현이 인도보다 서쪽에 있는 아랍 여러 나라들중 어디까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는가는 확실치 않으나, 그 지역을 그린 세계지도는 고려시대에 이미 등장하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지금 우리가 중동이라고 부르는 지역까지 다녀왔다. 고려시대에는 그 지역의 무역선이 빈번하게 드나들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그곳이 얼마나 넓은 땅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서유럽과 아프리카대륙, 그리고 아라비아반도가 한국인이 만든 세계지도에 등장한 것은 1402년(태종 2년)이었다. 그해 5월에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 이회(李薈) 등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는 길고 복잡한 이름의 세계지도를 제작한 것이다. 그것은 그때까지의 세계지도와 아주 달랐다.
중국의 서쪽에 여러나라를 포함하는 큰 대륙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는 1백여개의 유럽지명과 35개의 아프리카지명이 표기됐다. 인도는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았지만 아라비아가 커다란 반도로 튀어나와 있었다.
아프리카대륙의 한가운데는 사하라사막과 고비사막이 검은 색으로 커다랗게 표시됐다. 알렉산드리아는 유명한 등대가 있는 항구로 나타내졌다. 지중해는 잘 그려졌으나 바다를 나타내는 검은 색의 파도무늬 선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다른 큰 바다들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분명히 새롭고 놀라운 사실이었다. 중국의 서쪽에 1백30여개가 넘는 도시를 포함하는 넓은 땅과 나라들이 있다니. 더구나 그것을 제대로 그린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종전과는 다른 뚜렷한 변화임에 틀림없었다. 그때까지 한국인이 생각하고 알고 있었던 '세계'는 중국대륙과 거기붙은 인도와 서역(西域)뿐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조선학자들의 세계관의 변화로 보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유럽의 존재를 분명히 한 것은 조선초기 지리학자들이 전통적인 세계지도 제작의 틀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진취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계의 중심은 여전히 중국이고 중국은 가장 큰 나라였다. 그 동쪽에 조선이 있는데, 아프리카대륙보다 더 크다. 일본은 물론 왜소하다. 조선의 4분의 1도 채 안되는 작은 섬나라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지 않다는 걸 몰랐을리 없을텐데. 아프리카도 조선 땅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럽에 관한 자료가 부족해
아무튼 김사형 이무 이회 등 지리학자들은 중국 다음으로 조선을 크게 그렸다. 그 당시 사람들의 자기나라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다. 15세기 무렵까지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땅, 자기나라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화민족일수록 그런 의식이 더 강했다. 조선학자들은 중국이 세계에서 제일 크고 그 중심이 되는 나라이지만 그 다음으로 조선이라는 커다란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땅덩어리도 커야 한다는 생각을 지녔다. 적어도 지도상에서는 그래야 했다.
인도를 순례하고 돌아온 신라의 높은 스님들이 얼마나 오랜 고행의 나그네 길을 걸어야 성지들에 다다를 수 있는 가를 전했을 것이다. 따라서 인도가 엄청나게 넓은 땅이라는 것을 조선초기의 지리학자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지도에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다.
16세기까지 제작된 세계 어느 나라 지도를 보아도 다 마찬가지다. 과학으로서의 근대 지도학이 자리잡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려야 했다.
조선초의 유명한 학자 권근(權近)의 저서인 '양촌집'(陽村集)에는 이 지도제작의 자세한 경위가 적혀 있다. 그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 지도는 1399년(정종 1년)에 김사형이 명나라에서 가지고 온 원(元)의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 1330년경 작성)와 승려 청준(凊濬)의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 1328~1329년)등 두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 지도들은 당시 최신의 지도들이었지만 사실상 중국지도였다. 엄밀히 말해 세계지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서방과 요동의 동쪽 부분이 많이 생략돼 있었다.
김사형 이무 이회 등은 중국의 서쪽 부분을 다른 자료를 가지고 개정, 다시 그리고 거기에 조선과 일본을 그려넣었다. 보다 완전한 세계지도를 제작한 셈이다. 그것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고 이름지어졌다.
이 지도는 중국에서 제작됐던 그때까지의 세계지도, 즉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에 입각한 중국중심의 세계지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조선초의 학자들은 시야를 넓혀 세계지도를 제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중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만큼 서유럽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5세기초 서유럽의 지적 수준은 조선학자들이 주목할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1400년 무렵의 서유럽은 문명사에서 아직도 어두운 시기였다.
오늘날 이 지도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저 유명한 '중국의 과학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의 저자인 니덤(J.Needham)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 당시 서유럽에서 만든 어느 세계지도 보다도 우수하다.
서유럽과 아프리카대륙에 관한 자료란 어떤 것이었을까. 연구결과 1320년에 원나라의 유명한 지리학자 주사본(朱思本)이 만든 '여지도'(輿地圖)가 많이 참고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분명히 서유럽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아라비아지도학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아라비아 유럽 아프리카의 해안선과 지명에 대한 지리학적 지식은 아랍 자료에서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도에 나타난 중국은 지명에 있어서는 그 바탕으로 삼았던 '여지도'와 일치한다. 그러나 중국 서쪽의 지형은 훨씬 정확하다. 결코 이것은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중국제 지도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특징이다.
동국여지승람보다 정확해
아랍지도학의 영향에 대해 지금까지 외국학자들은 지구의를 그 증거로 제시했다. 특히 1267년 북경에서 가져온 자말 알딘(Jamal al-Din)의 지도의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바다를 초록색으로 칠하고 검은줄의 파도무늬를 표현한 것, 그리고 인도반도가 없고 나일강 수원(水源)의 표현방법이 비슷하다는 점이 특히 주목되었다.
그런데 바다의 검은 줄 파도무늬는 11~12세기에 제작한 고려 청동거울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고려의 범선이 대양을 항해하는 광경을 생동감있게 표현한 그 거울에는 해와 달이 떠 있고, 바다에는 큰 바다짐승이 그려져 있다. 나머지 공간은 파도무늬로 채워져 있었다.
따라서 1402년의 세계지도 속에 나타난 파도무늬는 고려 때부터의 표현방법을 그대로 따랐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바다의 초록색도 푸른색과 초록색의 중간색을 즐겨 사용하는 한국의 전통회화기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으므로 꼭 자말 알딘의 지구의와 연결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반도의 해안선과 지형이 거의 정확하게 그려져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1960년대말 일본 교토(京都)의 류고쿠대학(龍谷大學)에서 이 지도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격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일본에서 간행된 지리학사 책에서 이 지도의 사진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이 그 앞에서 크게 증폭된 것이다.
그것은 16세기 경의 사본이라고 한다. 길이 1백71㎝, 너비 1백64㎝의 크기다. 명주종이에 채색해 그린 그 지도는 정말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었다. 크기도 상상외로 컸다. 필체도 훌륭했다. 그러니 그 원본은 정말 멋있는 세계지도였을 것이다. 1402년에 그렇게 우수한 세계지도를 제작, 당당하게 세계를 바라보았던 조선학자들의 기상이 가슴에 와 닿았다.
거기 그려진 조선반도와 일본열도가 무척 흥미로웠다.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깊은 뜻을 시사하고 있었다.
첫째로 14세기, 다시 말해 고려 때의 지리학자들이 한반도의 지형과 해안선을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1402년의 지도는 함경도의 동북관을 제외하고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팔도총도(八道總圖)보다 오히려 지형이 정확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섬들이 그려져 있었다. 명(明)의 나홍선(羅洪先)이 1555년에 제작한 '광여도'(廣輿圖)보다 한수 위의 지도였다. '광여도'는 훨씬 뒤에 나온 세계지도였지만 일본지도를 조잡하게 그려놓았고 조선지도도 평평한 해안선을 그리는데 그치고 있었다.
거꾸로 선 일본열도
1402년 지도에 그려진 일본지도는 또다른 점에서 우리의 흥미를 끈다. 남쪽과 북쪽의 방향이 거꾸로 그려지고, 조선반도의 동쪽에 있어야 할 일본열도가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지도를 그리는 과정에서 지도의 제작 공간과 그림의 균형을 조절하던 당시의 지도작성 관례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을 조선보다 작게 그리기 위해 동쪽의 공간을 늘려가다 보니 지도의 구성이 엉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부산에서 제일 가까운 규슈(九州)가 위에(북쪽에) 그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앞뒤가 바뀌다보니 일본열도 전체가 거꾸로 서게 된 것이다. 이 지도가 제작되기 1년 전인 태종1년(1401년)에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일본지도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의 조선학자가 일본의 지형을 제대로 알지 못해 거꾸로 그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 세계지도는 언제나 그 당시의 최신자료를 활용해 정확한 지도를 만들고자 했던 조선 지리학자들의 노력을 잘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지도제작의 전통적인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측면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15세기 초 지도제작술의 한계였다.
중국지리학사의 권위자인 일본의 아오야마(青山定雄)는 이 지도를 가리켜 동양최초의 우수한 세계지도라고 평가했다. 물론 이 지도의 가장 큰 결점은 중국과 조선을 너무 크게 그려 아시아대륙과 유럽 및 아프리카대륙 간의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 지도는 조선 초의 학자들이 서유럽과 아프리카에 대해서도 많은 지리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들은 그 당시의 서양인들이 동양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도는 조선학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사실상 유일한 세계지도다. 그것은 당시의 세계지리학의 지식을 결산한 것이었고, 17세기에 마테오 리치가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가장 훌륭한 세계지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