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년 남성의 반 이상이 걸렸다는 일 중독,안 겪어 본 네티즌이 없다는 인터넷 중독.'중독증'이란 단어는 복잡한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지칭하는 중심 단어로 자리잡았다.과연 중독이란 어떤 현상일까.
‘중독증’이란 단어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마약중독이나 알코올중독에 관한 지독한 이야기들처럼, ‘중독’은 흔히 사회로부터 일탈된 소수 낙인찍힌 집단에 관한 암울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머라이어 케리의 ‘사랑에 중독되어’(Intoxicated with love)와 같은 애절한 사랑중독 예찬가도 있고, 한국 중년 남성의 반 이상이 걸렸다는 일 중독, 안 겪어 본 네티즌이 없다는 인터넷 중독, 일부 유한 계층의 벤처나 주식 투자 광풍에서처럼, 이미 ‘중독증’이란 단어는 복잡한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지칭하는 중심 단어로 자리잡은 듯하다.
내성과 금단증상이 기준
정신의학적으로 ‘중독증’은 주로 약물 중독을 의미하며, 동일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그 양을 늘려가야 하는 ‘내성’과, 그 약물의 체내 농도가 어느 수준 이하로 줄어들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불안, 초조, 식은 땀, 그리고 각종의 신체증상이 일어나는 ‘금단증상’이라는 두 가지 ‘생리적 의존성’이 생기는 경우를 말한다. 내성과 금단이라는 무서운 의존 증상은 당신의 신경세포들을 완벽한 포로로 만들어, 그 약물만 얻을 수 있다면 어떠한 범죄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게 당신의 인격을 파괴하는 것이다.
애절한 사랑에 빠져보았거나, 무언가에 간절히 몰두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면 누구나 느끼셨겠지만, 분명 심리적인 의존도 존재한다. 권력의 마력에 중독된 사람들은 점점 더 큰 권력을 찾아 안절부절을 못하고(내성), 권좌에 대한 조금의 위협만 느껴도 극도의 불안과 초조증상을 보이고 심지어 이성을 잃고 광기를 휘두르기도 한다(금단). 엄밀성을 추구하는 정신의학에서는 생리적 의존이 결여된 심리적 의존만으로는 ‘중독’의 진단을 내리지 말기를 권한다. 그러나 정밀한 생리 계측 기법의 발전으로 약물 사용과 무관한, 병적 도박, 색정광증(일종의 성 중독), 도벽 등과 같은 몇 가지 행동장애에서도 이러한 생리적 의존 징후들이 발견된다. 사람의 마음과 몸은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경전달물질과 관련
중독 현상의 생물학적 기전은 크게 뇌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 가설과 세로토닌 가설로 설명된다. 신경세포의 신호 전달 기전은 신경 세포의 전기적 활동으로 매개되는 ‘세포내 전달’과 신경 세포와 세포 사이에 있는 시냅스라는 작은 간극에서 신경전달물질을 주고받아 화학적으로 매개되는 ‘세포간 전달’로 나눌 수 있다. 도파민과 세로토닌은 가바, 노어에피네프린 등과 함께 대표적인 신경전달물질이다. 대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각각의 신경해부학적 세포군, 예를 들어 도파민 세포계, 세로토 세포계 등을 형성하고 있다.
도파민 가설은 학습과 행동강화에 대한 동물실험의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실험적으로 알코올, 필로폰, LSD 등 많은 중독물질이 강력한 도파민계 자극효과를 보일 뿐 아니라, 도파민계의 자극은 중독의 생리현상과 유사한 매우 강력한 ‘행동 강화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실험실에 흰쥐와 흰쥐 대뇌의 도파민 신경원에 연결된 전극을 자극하도록 설계된 페달을 설치해 놓으면, 우연히 그 페달을 밟아서 자신의 도파민계가 자극되는 것을 학습하게된 흰쥐는 자극 횟수를 늘리기 위해 점점 더 페달 밟기 횟수를 늘려가며(내성), 먹이를 먹는 것도 잊고 페달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못한 채 밟기만을 계속하다가(금단) 결국은 지쳐서 사망하기까지 한다. 얼마 전 온라인 게임에 몰두하던 PC게임방 주인이 사망했다는 한 일간지의 기사는, 이 흰쥐 실험을 연상시켜 끔찍하기까지 하다.
세로토닌 가설은 정신 약물학적 연구 결과에 기반한 것이다. 최근에 개발된 세로토닌 차단 약물들이 우울증과 다양한 강박증에 신뢰할만한 치료효과를 보이며, 병적 도박과 같이 몇가지 중독성 행동의 완화에 도움이 되고 있다. 약물 중독이 약물 탐닉과 같은 특이한 중독 행동을 유발한다는 앞의 이야기와 대비해 보면, 중독성 행동을 보이는 몇가지 행동장애들이 약물로 치료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약물중독과 정신적중독 사이의 긴밀한 관련성을 반증하여 무척 흥미롭다.
중독의 생리학은 사회문화적 측면도 소유한다. 중독에 관한 최신지견의 하나로 ‘행동의 총체적 변화’라는 현상이 있다. 대표적 마약류의 하나인 코카인은 금단증상이 적어서 한 때 그 심각성이 과소평가 되었던 일이 있다. 그러나 코카인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무척 정교하고 교묘하게 사람의 ‘행동양식 전반’을 변화시키는 신경생물학적 기전이 학계에 보고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중독자의 모든 행동이 코카인 섭취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향으로 재조직화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중독자가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진 후, 비탄에 빠져 끊었던 코카인을 마구 사용하였다고 하자. 이때 실상은 무의식적으로 약물사용이 필요한 상황에 빠져들고자 하는 욕구가 우선이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연인과의 관계를 교묘한 방식으로 비틀어서라도 헤어져 비탄지경에 빠지고야 만다는 것이니 섬뜩치 않을 수 없다.
이견 분분한 사이버 중독
그런데 과거에는 수치스러운 통제 능력 상실과 구제불능 낙인을 의미하여 혐오스럽게만 느껴지던 중독이란 단어가, 최근에는 더 이상 부정적 느낌만을 전달하는 것 같지 않은 것은 왜일까?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보급과, 자신의 정신적 고통도 용감하고 자연스럽게 공개할 수 있는 개방적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에 힘입어, 인터넷 중독과 같은 ‘사이버 중독’은 이미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 매우 중심적인 단어로 자리잡았다. 사랑도 중독, 일도 중독, 심지어 인생을 살아가는 것 자체도 결국 ‘중독의 힘’ 아니냐 하며, ‘아직도 중독 안 되셨어요?’ 하고 자신 있게 되묻는 이들조차도 생겨나고 있다.
허무하게까지도 들리는 이 담론은 실은 우리의 존재 의미를 묻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신화와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한 두 가지 중독된 것조차 없고서야 어찌 살아가시겠느냐?’ 하며 반문하는 것이기도 하고, 어쩌면 ‘무료하고 허무한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가느니, 사랑이든 일이든 깊이 중독되어 진하게 살아보겠다’는 외침이기도 한 것이다. 어느 시인의 글처럼, 달리다 넘어져 무릎이 깨어져도, 상처에 흐르는 빠알간 피처럼 진하게 달리며 살고 싶다는 것이다.
약물 중독과 같이 그 부정적인 측면이 너무도 뚜렷하여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계몽해야 하는 것이 명백히 필요한 경우와 달리, 사이버 중독의 경우 의미가 매우 복잡해 진단과 치료에 대한 정신의학자 사이의 이견이 끊이질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정보화라는 시대의 대세 앞에서, 과연 그것이 적응적 행동인지 혹은 부적응적 행동인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 정의에서조차 혼란을 보이고 있다. 컴퓨터에 중독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미래에는 모든 사람이 컴퓨터와 거의 한 몸이 되어 사람-컴퓨터 하이브리드가 되는 것이 올바른 진화의 방향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
대인관계 회피하는 방편
필자는 약물 중독의 연구를 통해 얻어진 지식과 견해의 작은 틀 속에, 복잡한 현대인의 삶의 형식 모두를 다 구겨 넣고 재단하려는 어리석음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상당수의 인터넷 중독증 환자가 사실은 우울증과 같은 다양한 정신적 장애의 한 표현이라고도 하고, 다양한 정서 장애와 연관된 경우도 많다고도 한다. 예를 들어 특정한 대인관계 장애 환자가 대인 관계 회피의 한 방편으로 인터넷에만 매달리면 인터넷 중독으로 오진되지만, 사실은 인터넷 중독증은 하나의 증상에 불과하고 그 원인이 된 정신장애는 전혀 다른 경우도 있다. 그런 분들이 겪고 있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부적응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가도록 돕고 치유해줄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이버 중독증은 다 정신질환이다’라고 (과잉:생략) 일반화하는 것은, 자신의 침대에 사람을 눕혀 침대보다 다리가 긴 사람은 다리를 잘라 침대에 맞추고, 짧은 사람은 다리를 잡아 늘린다는 한 신화의 이야기처럼 위험한 것이다.
중독의 신경생리학적 현상은 무시한 채, 너무 사회심리학적으로만 해석하여, ‘현실’이 무엇인지 정의조차 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인터넷 중독증은 바로 ‘현실 도피’의 한 현상이라고 몰아세우는 것도 곤란하다. 매우 가볍고 일시적으로 중독증세를 겪고 지나가는 분들이 더 많고, 다른 정신적 정서적 장애 없이 순수하게 인터넷에 대한 중독 현상만을 보이는 분들도 많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영혼을 가진 정신적인 존재인 동시에 우리 몸이 유기물로 이루어져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사이버 중독의 문제도 그 정신적 차원과 생물학적 차원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 그리고 그가 속한 사회환경과의 상호작용은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뒤바뀐 수단과 목적
사이버 중독의 예를 통해 중독의 문제가 현대의 화두가 되어 가는 것은, 바로 중독이 복잡한 현대 사회를 이야기하는 매우 핵심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휘청거리는 현대인은 무엇인가에 중독되기를 소망하는지도 모른다. 역으로 신화를 잃은 현대인들에게, ‘(위대한 인간인) 내가 왜 하찮은 기계에 중독돼버리는가?’ 하고 스스로 물어 보게 하는 것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과 자신의 삶의 여정에 대한 매우 의미 있는 깨달음을 던져준다. 놀랍게도 그것은 내 일상의 주인은 누구이며,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어느 방향을 향한 것인가와 같은 것들이다.
중독은 목적 지향적 행동에 대한 변화를 수반한다. 사람의 행동에는 흔히 일정한 목적이 있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있다. 중독의 대상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던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사교 목적으로 술을 배우기도 하고, 사회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 권력에 도전하기도 한다.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일에 매달리기도 하고, 컴퓨터를 배울 목적으로 인터넷을 사용하기도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중독의 마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수단’에 불과했던 술과 권력을 숭배하게 되기도 하고, 일이나 인터넷 접속과 클릭 그 자체에 갇혀버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술이 자기 자신을 다 마셔버렸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중독성 강한 온라인 게임
정보화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우리에게 무한한 접속, 무한한 정보, 무한한 속도, 무한히 다양한 가상적 존재와 관계 양식 등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소품들을 선물로 가져왔다. 머지 않아 더 많은 선물에 우리가 포위될 것도 명백하다. 더구나 많은 미래학자들의 주장처럼, 이 모든 소품들은 우리와 우리 사회의 일반적 존재양식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이 금단의 땅에 우리가 매혹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기까지 하다.
사이버 중독증은 단순히 하나의 중독 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 사회 현상의 한 단면이다. 사이버 중독증을 막기 위해 전화선을 끊거나 컴퓨터를 팔아치우라고 권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먼저 자기 자신과 자기가 하려는 일을 이해하고 현실 세계에서의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정신적 활력을 얻음으로써, 중독으로 고통받지 않고도 가상 공간을 자유롭고 현명하게 드나들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사이버 중독증은 스스로 극복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중독 증상으로 친구관계나 가족, 직장, 혹은 학교일 등에 지장이 생기거나 건강상의 문제까지 생길 정도면 바로 전문의의 도움을 얻는 지혜가 필요하다. 때로는 심층 심리학적 처방이 필요하기도 하고, 약간의 약물 요법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머드류의 스타크래프트 같은 ‘온라인 게임’과 ‘온라인 채팅’은 다른 것들에 비해 중독성이 매우 강해서 주의가 필요함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가끔씩 체크(http://plaza1.snu.ac.kr/~psyber /check.html)를 확인해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평가해 볼 필요도 있다. 무엇보다도 ‘현실로 돌아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어울려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법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