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쾅쿵쾅, 두근두근, 콩닥콩닥.
사람의 심장은 평생 약 20억 번 뛴다. 평소에는 ‘콩닥’거리며 뛰지만, 긴장하면 ‘두근’거리고, 달릴 때는 ‘쿵쾅’댄다. 이 과정에 참여하는 단백질만 약 100종류다. 이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유전자와는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알기 위해 학자들은 단백질 하나하나를 들춰 보기도 하고 유전자를 분석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찾지 못했다. 생명과학과 의학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엄융의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심장 박동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생물학적 정보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생체정보학, 수학, 물리학, 공학, 기초의학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연구하는 융합과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1월 12일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열린 ‘융합과학 학술교류회’에서는 엄 교수를 비롯한 석학 6명의 강연과, 국내외 융합과학의 새로운 흐름과 발전방안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다. 수백 명의 청중이 참석한 이 행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고 동아사이언스가 후원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국내에서 진행 중인 흥미로운 융합연구 사례들이 소개됐다. 분자안테나를 단 로봇이 좋은 예다. 이 연구가 성공하면 바이오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 디지털 광학영상기술로 나노 단위의 세포영상을 제공할 수 있는 연구도 공개됐다. 이는 신약 개발 및 차세대 의료영상 시스템 등에 활용할 수 있다. 이외에도 청각장애우를 위한 ‘소리지각 뇌기능 분석’, 친환경 염료 산업을 위한 ‘천연염색 표준화 기술 연구’ 등이 발표됐다.
엄 교수는 “정보기술과 공학, 의학을 결합해 컴퓨터에 가상 세포,가상 장기 등을 만들고 나아가 가상 인간을 만들 수 있다”며 “잘게 나뉜 현재의 과학체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융합과학 접근은 선진국에서도 다양하다. 일본은 국책과제로 생물 시스템을 컴퓨터로 연구하는 ‘바이오시뮬레이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은 국립보건원(NIH) 주도로 다양한 학문으로 생명을 이해하려는 ‘멀티스케일 모델링 구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유럽연합(EU)은 ‘환자 맞춤형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맞춤의약을 연구하고 있다.
고교 문·이과 구분 폐지해야
학술교류회의 하이라이트는 석학 6명의 강연이었다. 엄융의 교수를 비롯해 서울대 물리학과 임지순 교수, 포스텍 생명과학과 서판길 교수, 그린코리아21포럼 김명자 이사장, 이화여대 생명과학과 최재천 교수, (주)엔씨소프트 윤송이 부사장은 대부분 각자 주어진 20분을 넘겨가며 융합과학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전개해 나갔다.
“지금도 여전히 고등학교에 문과·이과 구분이 있다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구분을 없애면 뭘 가르쳐야 하느냐고요? 다들 지금 이과처럼 가르쳐야죠!”(청중들 폭소)
최재천 교수는 21세기에 과학기술을 모르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랍다고 말했다. 과학 내부도 마찬가지다. 한 분야를 좁고 깊게 파는 방식은 20세기가 끝나는 것과 함께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한 사람이 일생 동안 깊고 넓게 탐구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협력해야 새로운 분야, 즉 융합과학의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원활하게 이뤄지려면 여러 과학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교양’으로 갖춰야 한다.
윤송이 부사장은 ‘아이팟’에 이어 ‘아이폰’으로 오랜 침체를 극복하고 화려하게 부활한 미국 애플을 예로 들며 “애플은 기술 중심적, 폐쇄적 사고를 버리고 고객 중심적 융합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전환했다”며 “학문도 (학문의) 고객을 중심에 놓고 무엇을 어떻게 융합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6명의 강연이 끝난 뒤 관련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융합과학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정책방향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국가핵심연구센터(NCRC) 박영준 협의회장(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은 “융합부분 연구 과제는 지원 기간이 더 길어야 하며 후속 연구에도 투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는 “융합과학은 연구할 것도 많고 재미있다는 것을 학생들과 연구자들이 인식하고 이 분야에 많이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한국연구재단 융합과학단 박선희 단장은 미국 하버드대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통섭(Consilience)’의 구를 인용하며 융합과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환경이나 인구과잉처럼 우리가 부닥치는 대부분의 문제는 자연과학적 지식과 인문·사회적 지식이 통합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