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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마찰이 없다면?

걷기조차 힘든 세상

손을 비비면 손바닥 사이의 마찰로 열이 생긴다.자동차가 급정거할 때 길바닥에 흉하게 만들어지는 바퀴 자국도 마찰에 의한 것이다.마찰의 본질은 무엇일까.그리고 마찰이 없어진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마찰'이라는 말에 대한 느낌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마찰 때문에 에너지를 잃어버린다”,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는 관성이 있지만, 마찰 때문에 결국 멈춘다” 등등, 마찰 때문에 비효율적인 일들이 생기고 모든 현상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부자유스런 상태로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매우 비효율적인 기계다. 이상적인 조건에서도 연료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15% 이하만이 자동차를 움직이는 데 사용된다. 마찰 때문이다. 물론 시내에서처럼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상황에서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이제 자동차 연료 소비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자동차 연료의 14%

자동차에서 에너지를 잃어버리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연료에서 나오는 에너지 중 약 2/3 가량은 엔진에서 공기 중으로 열로 방출된다. 이 중 일부는 배기 가스를 통해 공기 중으로 나오고, 일부는 엔진 자체에서 방출된다. 연료를 태우면서 매우 큰 에너지를 열의 형태로 잃어버리는 것을 줄이고 싶지만, 이것은 열역학의 법칙 때문에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용 가능한 나머지 에너지 중에서 10% 정도는 자동차 엔진에서 바퀴까지 힘을전달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다. 즉 기어, 바퀴, 축의 베어링에서 마찰에 의해 에너지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엔진 내부의 움직이는 부품들 사이의 마찰로 6%의 에너지를 잃고, 4% 정도의 에너지는 연료를 보내거나, 냉방, 브레이크, 전자 제품을 이용하는데 쓰인다. 마지막으로 약 14% 정도의 에너지만이 자동차를 앞으로 가게 만드는데 사용된다. 14%의 에너지는 주로 길의 마찰력과 공기저항을 극복하는 데 사용된다. 이처럼 마찰이란 연료를 이용해 움직이려는 자동차의 목적을 방해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찰은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마찰 현상을 원자나 분자 수준에서 생각해 보자.

접착이론과 정전기 이론

맨 눈으로 보기에 아무리 매끄러운 표면이더라도 미시 세계에서 보면 매우 거칠다. 따라서 거친 두 표면이 만나면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방해하므로 마찰이 일어난다. 그러나 거친 표면에 의한 마찰 효과는 전체 마찰의 10%에도 미치지 않는다. 1950년에서야 보우덴 (F.P. Bowden)과 타보(D. Tabor)는 마찰력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 ‘표면 달라붙기 현상’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아무리 매끄러운 금속 표면이라도 이들 표면들이 순간적으로 접착되면 접합점들이 만들어진다. 미끄러지는 동안 이러한 결합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잘려 나간다. 마찰은 이러한 접합된 부분이 잘려 나가는 과정에서 생긴다. 접해있는 두 종류의 금속 중 더 부드러운 금속 내부에서 이러한 잘림이 생겨서 작은 부스러기들이 튀어나온다. 이것을 ‘접착이론’이라고 부른다. 진공상태에서 매우 깨끗한 표면에 아무런 압력을 가하지 않아도 이러한 접합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방법에 의해서도 이러한 현상이 드러났다. 이와 같은 마찰에 대한 미시적 이론을 ‘나노트리볼로지(nanotribology)’라고 부른다(그림1).
 

(그림1)접합이론^순간적인 접착으로 두 금속 표면 사이에 접합점들이 만들어진다.(위)금속 표면의 결합이 깨질 때 마찰력이 생긴다.약한 금속이 떨어져 나간다.(아래)
 

마찰에 대한 또다른 설명 중의 하나는 정전기적인 힘이다. 표면들이 서로 미끄러질 때 한 표면에서 다른 표면으로 전하가 이동한다. 그 결과 서로 반대의 전하를 갖게되는 표면들 사이에는 정전기적 인력이 발생해 마찰이 생긴다. 유리 막대를 모피 조각에 문지르면 마찰에 의해 유리 막대가 전하를 띠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전하가 분리되는 현상은 여러 종류의 물체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특히 하나가 부도체일 때는 더 잘 일어난다. 그러나 같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깨끗한 표면 사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마찰을 정전기적 인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몇 가지 경우에만 해당한다.

마찰 없는 세계로 출발!

지금까지 마찰의 원인을 미시적인 수준에서 살펴봤다. 이제부터는 마찰이 어떠한 경우에 나타나는지 분류해 보면서 마찰이 없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1. 음악을 즐길 수 없다


바이올린의 현과 활에서 생기는 정지마찰과 운동마찰의 주기적인 반복이 아름다운 선율을 만든다.


붙었다가 미끄러지는 현상은 미끄러지는 표면 사이의 속도 차이가 작고, 한 물체가 진동할 수 있을 때 나타난다. 휘어질 수 있는 막대기가 표면에 끌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막대기를 잡아당기면 밑부분이 저항 때문에 휜다. 그러나 얼마 이상 휘고 나면 탄성 때문에 막대기는 갑자기 앞으로 빨리 움직인다. 곧이어 막대기는 다시 바닥에 끌리며 밑부분은 멈추고, 막대기가 휘는 과정이 되풀이된다. 붙어있을 때 생기는 정지 마찰과 미끄러질 때 생기는 운동 마찰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운동의 주기는 물체의 탄성에 관한 성질과 운동의 평균적인 속도에 의해서 좌우된다. 이러한 진동은 종종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만든다.

예를 들어 칠판에 손톱을 긁으면 효과적으로 학생들을 주목시킬 수 있다. 소리의 높낮이와 운동의 속도 사이의 관계는 목욕탕 욕조에 젖은 손가락을 문지를 때 쉽게 알 수 있다. 끽끽거리는 소리의 높이는 문지르는 속도가 빠를수록 높아진다. 그러나 훨씬 빠른 속도로 문지르면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것은 운동이 순전히 미끄러짐으로만 이뤄져 진동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붙었다가 미끄러지는 현상이 항상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바이올린이나 첼로와 같은 현악기에서 나는 소리도 붙었다가 미끄러지는 현상에 의해서 생긴다. 우리가 듣는 감미로운 현악기의 음색은 진동하는 줄의 소리를 악기의 통이 공명을 일으키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마찰이 없다면 우리는 바하나 모차르트의 곡들을 즐길 수 없을 것이다.

2. 스케이트나 스키는 목숨걸고 타야 한다


스키를 탈 때 스피드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마찰을 줄여야 한다.하지만 아예 마찰이 없다면 스키 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스키나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눈이나 얼음과 관련된 마찰은 커다란 관심거리다. 눈과 스키 사이에 생기는 마찰은 무게, 온도, 스키에 칠한 왁스, 스키재질 등 여러 가지 요소에 좌우된다. 또 눈이 어느 정도 푸석푸석한지도 관련된다. 우리가 스키나 스케이트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스키와 눈 사이, 혹은 스케이트와 얼음 사이의 마찰로 인해 생기는 열 때문이다. 이때 0.01cm 정도의 얇은 수막이 생긴다. 수막은 마찰력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물론 압력이 가해지면 얼음이 녹는 온도는 낮아지지만 스케이트를 탈 때 이것은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낮은 온도에서는 눈이 녹지 않아 수막이 생기지 못하므로 마찰이 매우 커진다. 금속 스키는 나무 스키보다 열전도율이 크기 때문에 발생된 열이 쉽게 방출되므로 수막이 생기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금속 스키가 마찰을 더 크게 받는다.

스키를 탈 때 우리는 마찰을 줄여 속도를 내지만 비탈을 다 내려와서는 멈춰야 한다. 이 때는 스키와 눈 사이의 마찰을 최대로 만들어야 한다. 마찰이 없다면 비탈 중간에서는 스릴 넘치는 속도감을 즐길 수 있겠지만 맨 끝에서는 사람들이나 바위, 건물들과 충돌해 몸이 부서지는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3. 자전거나 자동차를 탈 수 있을까?


자전거나 자동차를 탈 수 있을까?


물체는 정지해 있을 때 정지마찰력을, 미끄러지면 운동마찰력을, 그리고 구르면 구름 마찰력을 받는다. 구름 마찰력은 운동 마찰력보다 훨씬 작다. 구름 마찰력은 회전 운동에서 매우 중요하다. 구름 마찰력이 생기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바퀴가 구를 때 바퀴의 껍질은 표면에서 벗겨진다. 가끔은 미끄러지기도 하므로 운동 마찰력도 작용한다.

구름 마찰력이 생기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닥이 눌리기 때문이다. 바퀴가 구르는 표면은 바퀴 밑에서 움푹 들어가 바퀴가 땅에 닫는 지점은 마치 작은 화산의 분화구처럼 된다. 이러한 현상은 고무나 당구대 바닥의 천과 같은 매우 부드러운 표면 위에 딱딱한 공이 지나갈 때 관찰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바퀴 앞에 표면의 일부분이 쌓인다. 바퀴 앞부분이 닿아있는 곳은 바퀴의 중심보다 앞에 있다. 따라서 작용하는 힘은 중심 앞쪽에서 뒷방향으로 기울어져 작용한다. 고무 타이어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굴러가는 경우에도 알짜힘은 중심 앞쪽에서 뒷방향으로 향한다. 왜냐하면 바퀴의 앞부분이 바닥에 의해서 뒷부분보다 많이 눌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름 마찰력의 방향이다.

구름 마찰의 주된 원인은 바퀴와 바닥의 탄성적 성질에서 비롯된다. 무게가 커지면 표면이 눌림에 따라 변형은 일정한 과정을 겪는다. 어떤 물질도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지 않고 약간씩 변형된다. 이러한 효과를 ‘탄성 이력 곡선’으로 나타낸다. 이력 곡선 내부의 면적은 바퀴 내부에 일시적으로 저장됐다가 결국 열로 방출되는 에너지에 해당한다(그림2).


(그림2)탄성이력곡선^어떤 물질도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지 않고 약간씩 변형된다.자전거 바퀴와 같은 고무재료에 힘이 주어졌을 때 변형은 일정은 과정을 겪는다.힘이 증가하면 변형은 1의 경로를 따라가고,힘이 감소하면 2의 경로로 진행한다.이 효과를 탄성이력이라고 한다.


흔히 바퀴 축과 바퀴를 잇는 부분에 윤활유를 첨가하면서 구름 마찰력을 줄인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축과 바퀴를 잇는 부분의 운동 마찰력을 줄일뿐 구름 마찰에는 거의 효과가 없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 고무 바퀴가 있는 경우에 구름 마찰력은 눌리는 힘의 약 2% 정도다. 따라서 1톤 짜리 차의 구름 마찰력은 약 2백N(뉴턴)이다. 대개 성능이 우수한 래디얼 타이어를 사용하고 적절한 타이어 압력을 유지함으로써 구름 마찰력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마찰이 없으면 바퀴는 굴러갈 수 없다. 왜냐하면 바퀴가 바닥을 밀 때 이에 대한 반작용이 마찰력에 의해 생기고, 마찰이 없으면 바퀴를 앞으로 굴러가게 하는 힘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퀴는 앞으로 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미끄러지기만 한다. 그렇다면 마찰이 없는 바닥에 서 있다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찰이 없으면 바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발이 바닥을 미는 힘에 대응하는 반작용이 없다. 따라서 걸어갈 수 없다. 그렇다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입김을 내뱉으면 될 것이다. 운동량이 보존되므로 우리 몸은 입김이 가지고 나가는 운동량과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운동량을 가지고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입김의 질량이 작기 때문에 아무리 세게 불어도 우리 몸의 속도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더 빠르게 가고 싶으면 돌멩이를 주워 반대 방향으로 던지면 될 것이다.

4. 스카이다이빙? Oh no!


스카이 다이버에게 공기는 일종의 마찰 쿠션이다.


유체 안에서 물체가 움직일 때 물체의 뒷부분에는 와류라고 부르는 불안정한 유체의 흐름이 생긴다. 이것은 일종의 저항력을 만든다. 와류 내부의 유체의 속도는 정상 상태의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에 유체의 압력은 낮아진다. 따라서 앞부분의 압력이 뒷부분에서보다 커져 운동 방향에 대해 반대 방향으로 힘을 받는다. 이를 끌림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저항력은 운동 방향에 수직한 물체의 단면적에 비례하며, 속도의 제곱과 공기의 밀도를 곱한 양에 비례한다.

저항력을 크게 만들면 낙하하는 물체를 천천히 떨어지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스카이다이빙을 할 때 몸을 활짝 펼쳐 단면적을 크게 만들면 저항력이 커져서 떨어지는 속도를 줄일 수 있다. 한편 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잘 다치지 않는 것은 고양이는 떨어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저항을 크게 만드는 네 다리를 벌린 자세를 취하다가 바닥에 닿는 순간 다리를 모아 내리기 때문이다. 대기층이 없어서 이러한 저항 또는 마찰이 없다면 스카이다이빙은 낙하산 없이 몸을 던지는 자살 행위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마찰의 원인들을 살펴보았다.사소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마찰이 작용하고 있다.마찰은 주로 에너지를 소비하는 측면과 관련되지만 뒤집에 생각해 보면 마찰이 있기 때문에 걸어다니거나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현악기 연주를 즐기고,스카이다이빙으로 여가를 보낼 수 있다.하지만 지능을 가진 인간들이 마찰이 없는 세상에서는 어떠한 문명을 만들어 낼까를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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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최준곤 교수
  • 진행

    이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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