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여성은 모두 10명. 10년에 한명 꼴이다. 최근 영국의 주간과학지 '네이처'에서는 "왜 과학계에는 여성이 없을까"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 과학계에 종사하는 여성이 적기도 했지만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 또한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여성 과학자의 삶과 그 업적을 돌아본다.
1901년 노벨상을 처음으로 수여한 이래 지난 99년 동안 여성 과학자로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10명(횟수로는 11번). 1백59명의 물리학상 수상자 중 2명(1.3%), 1백32명의 화학상 수상자 중 3명(2.3%), 1백68명의 생리의학상 중 6명(3.6%)이 고작이다. 노벨문학상의 경우 지금까지의 수상자 94명 중 9명(9.6%)이 여성인데 비해 이에도 크게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1969년 처음 수상자를 낸 노벨경제학상의 경우 여성이 한명도 없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노벨상의 명가 퀴리
과학자로서 최초의 노벨상을 수상한 여성은 프랑스의 마리 퀴리(1867-1934)다. 그녀는 1903년 지도교수인 앙리 베크렐(1852-1908)과 남편 피에르 퀴리(1859-1906)와 더불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당시 여성은 아카데미에 참여할 수 없던 시절이었기에 그녀의 수상은 대단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마냐 스클로도프스카는 1883년 고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고등학교 물리교사였던 아버지는 그녀를 대학에 보낼 힘이 없었다. 그래서 마냐는 가정교사 겸 가정부로 일하다가 23살이 되서야 겨우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자 그녀는 ‘마냐’라는 폴란드식 이름을 버리고, ‘마리’라는 프랑스식 이름을 사용했다.
마리가 피에르 퀴리를 만난 것은 1894년 물리학 석사와 수학 석사 시험에 합격한 뒤였다. 가정부 시절 주인집 아들과 한차례 결혼소동을 벌인 후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에게 피에르는 따뜻하기 그지 없는 남자로 다가섰다. 비록 35살의 노총각이었지만 피에르는 18살에 물리학 석사학위를 받고 결정구조의 대칭원리와 압전현상을 발견한 촉망받는 과학자였다. 이듬해 마리와 피에르는 간단한 결혼식을 마치고 자전거로 신혼여행을 다녀올 만큼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고, 연구동료로서 우정과 사랑을 나눴다.
마리 퀴리는 남편과 더불어 베크렐이 발견한 방사선을 연구하기 시작해, 1998년 폴로늄과 라듐이라는 최초의 방사성원소를 발견했다. 폴로늄은 마리의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딴 것이고, 라듐은 방사성원소라는 뜻. 이 공로로 마리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두고두고 말이 많았다. 우선 노벨상을 홀로 받기로 돼 있던 남편 피에르가 적극적으로 탄원서를 올리지 않았던들 그녀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 마리는 과학아카데미 회원(여성이었기에 될 수도 없었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연구업적이 뛰어난 것도 아니라는 지적이다. 방사선을 연구하려면 몇십kg에 달하는 광석을 녹여 그 속에 1천만분의 1 정도 밖에 들어있지 않은 방사성물질을 분리해내야 한다. 이 과정은 거의 육체노동에 가까웠다. 따라서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한 것은 억척 여성이 이뤄낸 노력의 결과일 뿐 연구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하다는 비난이었다.
노벨상을 받은 이후에도 마리 퀴리에 대한 폄하는 계속됐다. 소위 ‘남편 잘 만난 덕이라는’. 그런 와중에 1906년 피에르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마리 퀴리는 그 자리를 물려받아 소르본대학 최초의 여성교수가 됐다. 그러나 1911년 프랑스의 이론물리학자 폴 랑주뱅(1872-1946)과 사귄다는 소문에 휘말렸다. 그해 겨울 그녀는 금속 라듐을 분리해낸 공로로 화학분야에서 두번째 노벨상을 받았다. 마리 퀴리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이제 (남편의 도움없이) 저 혼자 라듐을 분리해냈다는 것을 믿겠죠”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는 여전히 그녀를 회원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1923년에서야 마지못해 가입원서를 접수했다. 물론 첫번째 여성회원이었다.
마리 퀴리에게는 이렌(1897-1956)과 에브(1904-) 두딸이 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손에서 자란 두딸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렌 퀴리는 대학을 졸업한 후 어머니의 조수가 돼 일했다. 1차대전 때에는 어머니를 따라 전쟁에 참가해 X선장치로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지도를 받아 폴로늄의 알파선을 연구해 1925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에 어머니의 권유로 어머니 밑에서 조수로 일하던 세살 연하의 장 프레데리크 졸리오(1900-1958)와 결혼했다.
장은 성(性)을 졸리오-퀴리라고 바꿀 만큼 마리 퀴리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출세욕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어쨌든 졸리오-퀴리 부부는 1935년 인공방사성물질을 합성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과학분야(전체로 따지면 1905년 평화상을 받은 오스트리아의 폰 스투네르가 두번째)의 두번째 여성 노벨상 수상자 역시 퀴리가(家)에서 나온 것이다. 똑똑한 아내 덕에 노벨화학상을 받은 장 졸리오-퀴리는 훗날 프랑스 원자력청 장관까지 지냈다.
한편 졸리오-퀴리 부부는 중성자를 발견하고도 그게 뭔지를 몰라 노벨물리학상과 노벨화학상을 동시에 수상할 뻔한 기회를 놓쳤다. 당시 최대의 연구과제는 원자핵의 구조를 알아내는 일. 그런데 투과력이 강한 베릴륨선은 아무리 단단한 물질을 통과해도 속도가 줄지 않았다. 이때 졸리오-퀴리 부부는 발상을 전환해 약한 물질에 투과시켜 보았다. 즉 밀랍에 베릴륨선을 투과하자 방사능이 약해지면서 양성자가 뛰어나온 것이다. 이 실험결과는 사실상 중성자의 존재를 밝혀주는 것이었다. 베릴륨선이 양성자와 같은 질량을 가지고, 전기적으로 중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그러나 중성자 발견의 공로는 이 실험결과를 듣고 중성자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채드윅(1891-1974)에게 돌아갔다. 그 덕분에 채드윅은 193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과학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퀴리의 작은 딸 에브도 꽤 유명한 작가가 됐다. 그녀의 대표작은 어머니인 마리 퀴리에 대해 쓴 ‘퀴리 부인’. 이 책은 전세계에서 번역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대단한 베스트셀러였다. 1965년 그녀의 남편이 위원장을 지냈던 UN아동긴급구호기금(UNICEF)이 노벨평화상을 받자 또 한번 퀴리집안이 화제에 오른 바 있다.
기회의 땅 미국
세번째 여성 노벨상 수상자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게르티 테레사 코리(1896-1957). 그녀는 1947년 남편 칼 퍼디낸드 코리(1896-1984), 아르헨티나 출신의 베르나르도 우사이(1887-1971)와 함께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20년 프라하에 있는 게르만대학 의학부에서 의학박사를 받은 게르티는 대학 동기인 명문가 출신의 칼 코리와 결혼했다. 칼 코리의 할아버지는 프라하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였고, 아버지는 트리에스테 해양생물학 연구소장을 지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여성이란 이유로 생리학을 연구할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2년 동안 소아과병원 의사로 지냈지만 연구를 하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을 졸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버팔로 주립 암연구소에서 남편의 조수 노릇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남편 칼 코리는 수완가였다. 그는 연구계획서를 훌륭하게 작성해 연구비를 따옴으로써 게르티로 하여금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결국 그들은 효소를 이용해 생체고분자인 글리코겐을 몸밖에서 합성해낼 수 있었다. 이 연구결과는 코리 부부에게 노벨생리의학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게르티 코리에게 기뻤던 것은 남편의 조수생활을 청산하고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 노벨상을 받자 자리가 생긴 것이다.
196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마리아 메이어(1906-1972)에게도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마랴(폴란드식 이름)는 프로이센의 카트비체(현 폴란드 영토)에서 태어났지만 결혼할 때까지 거의 괴팅겐에서 지냈다. 그는 괴팅겐대학에 들어가 막스 보른(1882-1970, 195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밑에서 공부했으며, 이론물리로 1930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때 그녀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192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제임스 프랑크(1882-1964)가 괴팅겐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온 미국 통계물리학자 조지프 메이어를 만나게 된 것이다.
마리아는 조지프 메이어와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교수의 아내에게 자리를 내주는 대학은 한곳도 없었다. 와신상담하던 그녀에게 1946년 기회가 찾아왔다. 시카고대학 물리학과에서 그녀에게 손짓한 것이다. 그녀는 핵물리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수소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텔러(1908-)와, 이탈리아 출신의 엔리코 페르미(1901-1954, 193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의 도움으로 핵물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자핵의 구조를 밝힌 공로로 1963년 헝가리 출신의 유진 위그너(1902-1995), 독일 출신의 한스 옌젠(1907-1973)과 더불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8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리타 레비-몬탈치니(1909-)의 고향은 이탈리아 토리노. 그녀는 1936년 노벨상을 받은 살바도르 루리아(1912-1991, 1969년 노벨생리의학상), 둘베코(1914-, 1975년 노벨생리의학상)와 함께 토리노대학을 졸업했지만, 유대인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집에다 작은 실험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루리아, 둘베코, 그리고 자신을 지도했던 레비 교수(훗날 남편이 됨)의 권유로 닭의 배(embryo)를 연구했다. 그런데 그녀의 연구가 빅토르 함부르커교수의 눈에 띄게 되어 워싱턴대학으로 유학할 수 있었다.
함부르커는 실험쥐의 종양을 닭의 배에 이식하면 그 부위를 지배하는 교감신경절에서 신경섬유가 늘어나고 신경절도 비대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리타와 스탠리 코언(1922-)에게 신경을 성장시키는 인자를 분리하도록 지시했다. 이 결과로 리타 레비-몬탈치니와 스탠리 코언은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를 주도했던 함부르커는 노벨상을 시상하기 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노벨상은 산 자에게만 영예를 주기 때문에 함부르커는 노벨상과 인연을 맺지 못한 것이다.
학문을 이끈 1인자들
영국의 여성화학자 도로시 호지킨(1910-1994)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에서 고고학을 연구했던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그녀에게 아프리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게 했다. 흔히 여성과학자들은 남편으로 과학자를 맞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프리카와 아랍권의 역사와 정치를 연구하는 비과학도를 선택했다.
호지킨은 옥스퍼드대학에서 X선 결정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블랙의 지도를 받아 X선 해석에 있어서 1인자가 됐다. 그녀는 1934년 X선 회절법을 이용해 최초로 단백질 결정 사진을 찍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X선을 이용해 콜레스테롤, 페니실린, 비타민 B12 등의 입체구조를 밝혀냈다. 이 공로로 1964년 노벨화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또 1969년에는 인슐린의 입체구조를 밝혀내기도 했다. 그녀는 1947년 완고하기로 유명한 영국왕립협회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입성했으며, 네덜란드와 미국 과학아카데미의 외국회원이 되기도 했다.
호지킨이 최고의 X선 결정학자라면 로절린 얄로(1921-)는 방사선면역분석 분야를 개척한 여성이다. 미국 핸터여자대학을 졸업한 후 일리노이대학 대학원에서 물리를 전공한 얄로는 브롱크스 재향군인병원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물리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방사선면역분석법을 개발했다. 그녀는 인슐린에 방사성 요오드로 표지를 한 다음, 인슐린 치료를 받은 혈액 속의 인슐린이 어떤 대사속도를 보이는지 방사선면역분석법을 활용해 조사했다. 그럼으로써 인슐린 치료를 받은 환자가 인슐린 치료를 받지 않은 환자에 비해 혈액 내 대사속도가 느린 것을 발견했다.
얄로의 방사선면역분석법이 알려지자, 미국의 샌디에고에 있는 솔크연구소의 로저 길레민(1924-)과 폴란드 출신의 앤드루 빅터 샬리(1926-)는 이를 뇌호르몬의 연구에 활용해 그 생성 메커니즘을 밝혔다. 얄로, 길레민, 샬리는 197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83년 유전 연구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미국의 바바라 맥클린톡(1902-1992)은 여성 편견 때문에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연구소로 향했던 인물이다. 그녀가 훗날 노벨상을 받자 사람들은 장수(長壽)야말로 노벨상 수상의 비결이라고 농담하곤 했다.
맥클린톡의 연구 업적은 옥수수로부터 유동 유전인자를 발견한 것. 그녀는 1951년 얼룩이 진 옥수수를 연구한 결과 이 얼룩이 색소 유전자의 변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한 염색체에서 다른 염색체로 움직이는 유전자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밝혀냈다. 만약 멘델의 유전법칙을 따른다면 옥수수 알에서 얼룩의 출현빈도와 출현 부위의 변화를 전혀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주장은 당시의 학계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32년 후 그녀가 81살이 되었을 때에서야 업적을 인정받았다. 그녀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유전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대부분 공동연구
아버지의 파산으로 가난하게 지냈던 거트루드 엘리언(1918-1999)은 대학을 졸업한 후 연구소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번번히 거절당했다. 그래서 당시 여성과학자들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교사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한 가난한 화학자의 실험실 조수로 취직하게 됐다. 일주일에 20달러를 받았지만 그녀는 1년 반 동안 이를 착실히 모아 뉴욕대학 화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1941년 대학원을 가까스로 졸업한 그녀에게는 전과 달리 행운이 따랐다. 2차대전이 일어나 화학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연구소들도 여성이라고 마다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맡은 일이란 품질관리나 실험기구들을 다루는 단순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진정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자리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때 조지 히칭스 박사(1905-1998)가 그녀를 받아주었다. 그녀는 히칭스의 연구조교로 일하면서 야간에 대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일과 공부를 병행하기란 매우 힘든 것. 결국 공부를 포기해야만 했다. 훗날 그녀는 조지워싱턴대학, 브라운대학, 미시건대학 등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걸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그녀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리서치 트라이앵글파크에 있는 웰컴연구소에서 그녀를 지도했던 히칭스와, 영국 런던대학의 제임스 블랙 경(1924-)과 더불어 198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히칭스와 그녀는 세포들이 서로 다른 핵산대사과정을 가진다는 사실을 밝혀, 암세포 내에서 핵산합성을 억제하는 약을 개발했다. 같은 원리로 백혈병치료제와 에이즈치료제를 개발하기도 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던 엘리언과 그의 스승 히칭스 박사는 1974년 우리나라 중앙대에 와서 임상약리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여성과학자로서 가장 최근에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크리스티아네 뉘슬라인-폴하르트(1942-)이다. 그녀는 미국 캘텍(CalTech)의 에드워드 루이스(1918-), 프린스턴대학의 에릭 비샤우스(1947-)와 공동으로 199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뉘슬라인-폴하르트는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발생학을 연구했다. 그녀는 초파리를 이용해 신체의 각 부분이 어떤 유전자에 의해 발생하는지를 밝혀냈다. 생물의 몸(팔, 다리, 장기)을 형성하는 설계도면을 만드는 형태 형성 유전자를 연구한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태아의 기형과 조기유산의 원인을 밝히는데 밑거름이 됐다.
그동안 과학분야 여성 노벨상 수상자들을 보면 11번 중 8번이 공동수상이었다. 그만큼 여성의 독립적인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던 그동안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초기의 공동 수상자들은 주로 남편이었지만, 최근으로 올수록 같은 연구소에 근무하는 동료이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남성학자들이다. 연구 기여도 측면에서 차별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노벨상을 받는 여성들이 드셀 것이라는 생각은 저버리는 것이 좋다. 대부분은 결혼을 했으며, 아이들도 낳았다. 물론 결혼과 출산이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6월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과학교사들의 모임인 ‘신나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들’이 여성특별위원회로부터 용역을 받아 ‘여학생 친화적인 과학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여성이 과학분야에 진출해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야 할지를 연구하는 것도 중요한 내용이다. 여기에는 과학을 공부하기를 꺼리는 여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과학을 재미있고 의미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담겨 있다. 과학을 돌이켜보면서 남성중심적인 요소는 없었는지 살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