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월일만 기입하면 그날의 신체, 감성, 지성 상태를 알려주는 바이오리듬이 유행이다. 매사에 조심해야 하는 위험일을 알려주기도 한다. '오늘의 운세'처럼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하지만 과학적으로 믿을만한 것은 못된다.
'생년월일을 입력하세요. 오늘 당신의 바이오리듬을 알려드립니다.’ 인터넷의 웬만한 사이트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다. 시키는대로 생년월일을 기입하고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면 당일의 몸 상태를 알려주는 3가지 곡선이 나타난다. 신체, 감성, 그리고 지성 상태를 표현하는 바이오리듬(biorhythm)이다. 무료인데다 자신의 몸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누구나 한번씩 체크해본다.
바이오리듬이란 말은 현대인에게 이미 상당히 익숙해진 용어다. 야구중계를 할 때 해설자가 “오늘 박찬호 선수의 바이오리듬이 엉망이네요”라고 말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또 PCS의 서비스 항목으로 일기예보, 주식정보와 함께 바이오리듬 체크 기능이 필수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원들의 바이오리듬을 체크하는 직장도 있다. 스위스의 한 시계회사는 바이오리듬이 나타나는 제품을 선보여 일반인들이 수시로 자신의 바이오리듬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바이오리듬은 과학계에서 인정받는 개념이 아니다. 바이오리듬의 바이오(bio)라는 용어가 ‘생명’을 뜻하기 때문에 의학에서 사용하는 ‘생체리듬’이라는 용어와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바이오리듬’은 ‘생체리듬’의 대표격인 ‘수면-각성 주기’처럼 과학적 근거를 갖추지 못했다.
과학적 근거 미약
바이오리듬의 원리는 간단하다. 인간은 모두 태어난 순간부터 3가지 순환주기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신체(physical), 감성(emotional), 그리고 지성(intellectual) 리듬이 그것이다. 그래서 각 용어의 머리글자를 모아 PSI 학설이라고 부른다.
각 리듬은 고조기와 저조기를 물결 모양으로 번갈아가며 나타내는데, 거의 한달 간격으로 주기가 이뤄진다. 즉 신체리듬은 23일, 감성리듬은 28일, 그리고 지성리듬은 33일이다.
PSI 학설에 따르면, 사람이 태어났을 때는 3가지 리듬은 모두 중간 수준이었다가, 점차 성장하면서 제각기의 속도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 물론 상승하는 때가 ‘좋은’ 경우다. 체력이 좋고, 감성이 풍부해지며, 머리도 유난히 잘 돌아가는 시기다. 하강하는 때는 반대로 모든 상태가 나쁘다.
만일 이 설명이 맞는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컨디션을 예측해서 멋진 생활계획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선수는 자신의 신체리듬이 고조된 11.5일 동안 체력 소모가 많은 운동을 하고 나머지 11.5일은 휴식을 취하며 천천히 컨디션을 조절하면 된다. 감성리듬의 저조기인 14일 동안 사람들은 무슨 일에든 소극적이고 권태를 느끼게 되므로, 인간관계에서 실패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중요한 대인관계 업무의 날짜를 잡을 때 이 기간을 피하는게 좋다. 또 수험생은 지성리듬에 맞춰 전반부 16.5일 동안 집중적으로 어려운 과목을 공부하고 후반부에는 기초자료를 정리하며 쉬엄쉬엄 지내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런 계획표를 작성하는 일은 무리다. PSI 학설이 과학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근거로 현직 의사 가운데 바이오리듬의 데이터를 이용해 환자를 치료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바이오리듬을 발견한 3명의 사람들은 모두 과학자였다. 그래서 일반인은 바이오리듬이 과학적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이들은 통계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바이오리듬의 존재를 추측했을 뿐이다.
최초로 바이오리듬의 존재를 밝힌 사람은 오스트리아 빈대학 심리학교수 헤르만 스보보다였다. 그는 1904년의 저서 ‘인간 생명의 기간’에서 인간의 꿈이나 생각은 매우 규칙적인 리듬을 타며 반복된다고 말했다. 또 환자의 경우 열이 나는 과정, 질병의 시작과 진행,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빈도 등을 볼 때 규칙성이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관찰 내용을 토대로 모든 신체 현상이 23일이나 28일의 주기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흥미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독일 베를린 이비인후과 전문의 빌헬름 플리스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는 동일한 질병에 걸린 어린이들이 병에 저항하는 면역력이 강해지는 기간이 다르고, 사망하는 날도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다. 플리스는 어린이들의 출생일이 다르기 때문에 제각기 병의 양상이 달라진다고 생각하고, 그 패턴이 23일과 28일의 주기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후에 사람들은 여기에 신체리듬과 감성리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편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공대 교수 알프레드 텔처는 학생들이 학습 내용에 대한 이해가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발견하고는 신체리듬과 감성리듬 외에 제3의 리듬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5천여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성적을 분석한 결과 33일을 주기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는 점을 관찰했다. 지성리듬이 발견된 순간이었다.
피해야 할 위험일
하지만 인체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리듬이 존재한다는 점들이 속속 밝혀져 왔다. 그런데 유독 세인에게 바이오리듬이 관심을 끌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위험일’이 있다는 주장 때문이다.
흔히 바이오리듬이 가장 저조한 날이 위험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고조기에서 저조기로 바뀌거나 반대로 저조기에서 고조기로 바뀌는 날이 위험일이다. 리듬의 성질이 급격히 뒤바뀌기 때문에 심신의 상태가 불안정해진다는 설명이다. 만일 어느날 3가지 리듬이 모두 위험일로 지정돼 있으면 이 날에는 무슨 일이든 조심하는게 좋다는 주장이다.
사람에게 위험일이 있다는 주장은 바이오리듬의 과학성을 떠나 세인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특히 순간적인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운전자의 경우 위험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게 당연하다.
실제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동차 운전자에게 위험일을 피하라는 ‘경고’가 내려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 1984년 치안본부 교통과에서 바이오리듬에 주목하고, 내무부장관 지시로 과거 1년간 교통사건을 분석했다. 그러자 93%의 운전자과실 사고 중 68%가 위험일에 발생했다고 한다. 이후 한국에서는 운수업을 필두로 위험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바이오리듬표를 만들어주는 일이 퍼져나갔다.
현재 택시나 버스 운전사들의 휴무일을 정할 때 가급적 바이오리듬표에 나타나는 ‘위험일’로 정하는 일이 흔하다. 이왕 쉴 바에야 컨디션이 가장 좋지 않은 날 쉬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 서울시지부 교육홍보과의 조청광 교육과장에 따르면 특히 부대에 근무하는 운전병들이 이 표를 많이 가져간다고 한다. 매주 토요일 교통안전에 관한 교육이 이뤄지는 이곳에 평균 50여명의 운전병들이 찾아와 그 달의 위험일을 체크한다. 조청광 과장은 “실제로 각 부대에서 교통사고가 많이 근절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
바이오리듬은 운동선수에게도 적지 않은 관심을 끌고 있다. 평소 아무리 훈련을 열심히 해도 시합 당일 컨디션이 나쁘면 좋은 기록이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능선수촌에서 오랫 동안 대표선수들의 컨디션을 관리해 온 김준성 훈련지도위원은 “시합 결과가 안좋은 것을 바이오리듬 탓으로 돌리는 것은 변명거리에 불과하다”라고 단언한다. 단 10초의 승부를 위해 몇년 간 매일 대여섯시간 맹훈련을 해온 것이 시합날 컨디션 때문에 쉽게 물거품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준성 위원은 선수들이 경기에 임하는 날 ‘베스트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의 바이오리듬을 개발해 활용하고 있다. 시합 당일로부터 거꾸로 11-12일 정도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킨다. 그러다 6일 정도에 이르면 강도를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시합날에 이르면 선수들은 몸이 ‘근질근질해져’ 당장이라도 에너지를 분출하고 싶은 욕구가 최고로 치솟는다고 한다. 물론 오랜 경험에 의해 내려진 훈련방법일 뿐 과학적 이론을 갖춘 것은 아니다.
아전인수 해석은 곤란
지난 1984년 현직 의사로서 ‘바이오리듬’이란 책을 펴내 화제를 모은 강남성모병원의 박은숙 가정의학과장 역시 바이오리듬의 과학성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그는 “인체에 어떤 주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과연 바이오리듬처럼 일정한 시기와 진폭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통계적으로 볼 때 각종 재해가 발생하는 시기와 위험일 사이에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역시 엄격한 통계 처리에 의해 내려진 결론이라고 보기 어렵다.
박은숙 과장은 “특히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 사건이 일어난 원인을 바이오리듬에 맞춰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일은 곤란하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1969년 7월 19일 케네디 대통령을 태운 자동차가 다리를 건너다 밑으로 굴러 떨어진 일이 있었다. 케네디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동승한 여비서는 즉사했다. 그런데 이날 케네디의 바이오리듬을 보면 신체와 지성 리듬이 위험일에 해당했고, 감성 리듬은 위험일에 거의 접근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운전하다 발생한 자동차사고를 케네디의 바이오리듬과 연결시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다.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가급적 위험일을 피하려고 참조하는 일 외에는 바이오리듬이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오늘의 운세’ 정도의 가벼운 흥미거리로 인식하는게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