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다가 다리를 삐끗한 경우 사람들은 병원으로 달려가 X선 촬영을 한다. 만약 X선이 없다면 어떨까. 아마 다리를 다 해부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들어준 X선은 참 고마운 존재다. 사실 X선이 의료행위의 필수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895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면서 의학과 물리학이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의학물리학자인 유돈식박사(34)다. 그는 각 분야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만들어지는 미래직업의 틈새시장이 바로 의학물리학이라며 약간은 흥분된 어조로 설명한다.
의학물리학을 전공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료센터에서 일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방사선 치료를 받거나 MRI 촬영을 할 때 기계를 조작하는 방사선사와는 역할이 엄연히 다르다.
21세기 의료센터의 감초
의학물리를 전공한 사람들이 의료센터에서 맡은 역할은 무엇일까. 위암에 걸린 환자에게 방사선 치료를 하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흔히 사람들은 환부에 방사선만 쪼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큰일날 말이다. 의학물리학자들은 우선 방사선과 인체와의 상호작용을 연구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건강한 주변 세포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해야한다. 방사선의 정확한 강도와 양을 예측해 의사와 함께 치료계획을 세워야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치료방사선과에서 하는 일이다. 진단 방사선과에서는 의사가 보고 싶어하는 환자의 질병 부위를 보다 선명한 영상으로 제공하기 위해 진단 장치의 여러 변수들을 조정하는 역할도 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학이 요구하는 첨단진단장비의 원리를 연구해 새로운 진단기를 만들거나 기존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일도 맡고 있다. 기존에는 MRI로 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유박사는 이런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MRI 장치를 이용해 뇌수술에 필요한 두개골의 위치와 두께를 얻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뇌와 같은 민감한 기관이 방사선에 노출되는 것을 막은 것이다.
암치료에 쓰이는 높은 에너지의 X선을 만들어 내는 가속기의 상태를 점검해 가속기에서 만들어진 에너지가 정확한지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일도 한다. 한마디로 21세기 의료센터에 의학물리학은 약방의 감초격이다.
뇌파로 동작하는 컴퓨터
그렇다면 그는 왜 전자통신연구원에 있는 것일까. 유박사는 현재 뇌파를 이용한 두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시스템을 만들려고 한다. 이 시스템이 구축되면 뇌파로 문을 닫고, 뇌파로 전등을 켜며, 마우스 없이도 컴퓨터를 조작할 수 있다며 싱글벙글 한다. 생각만으로 기계 장치를 작동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 사람들한테 뭐 그리 큰 도움이 될까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자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의 가장 큰 매력은 장애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며 영국에서의 경험을 늘어놓는다.
92년 영국으로 유학해 지낸 6년간, 그는 국내에서는 보기 힘들던 장애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보통 사람들과 그들이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이 하는 연구가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연구를 하다가도 이 생각만하면 기운이 솟았다고 한다.
먼 미래에나 가능하지 않느냐는 말에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그 만큼 가치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갈 길이 먼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뇌파는 세기가 약하므로 증폭해야 하는데 증폭과정에서 노이즈가 생기기 때문이다. 또 실시간으로 정보를 해석하기 위한 시스템 설계도 필요하다. 물리학과(고려대) 출신인 그가 다양한 분야의 책을 뒤적이고 사람을 만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X선 발견 1백년, X선 컴퓨터 단층촬영(CT) 30년, MRI가 등장한지는 15년이 됐다.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과학기술에 가속도가 붙은 듯하다. 이 가속도에 가속도를 더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마징가 Z를 보며 로봇을 만들려는 꿈을 키웠던 그. 물론 그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글을 쓰거나 강연을 통해 미래세대에게 꿈을 심어주는 것으로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싶다는 말 속에서 건강한 과학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