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의 동강(東江)은 정선, 평창, 영월의 3개 군에 걸쳐 흘러드는 전형적인 뱀모양의 사행천(蛇行川)이다. 영월에서 서강(西江)과 만나 남한강이 되는데, 이곳 사람들은 흐름새가 격렬한 동강과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서강을 각각 수캉과 암캉으로도 부른다.
하얀 물포말이 생기는 여울과 도도히 흘러가는 옥빛 물결, 그리고 강 양안의 깍아지른 기암 절벽과 가파른 청록빛 산봉오리들이 병풍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한폭의 실물 산수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세속의 사악함을 떨치게 한다. 비 그친 후 잔운(殘雲)이라도 남아서 봉오리들 사이 골짜기로 흘러내리면 그 누구든 시인이나 화가가 돼버린다.
정선읍 광하리의 광하교에서 시작돼 강변따라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를 약 20km 정도 달리면 고성리에 이른다. 산으로 20여분 올라가면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되는 고성 산성의 성벽이 세군데 남아 있다. 여기서 한 눈에 들어오는 장엄한 동강의 물구비와 우뚝 솟은 백운산, 그리고 강변의 오지마을(제장, 소동) 풍경이 탄성을 자아낸다.
소사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줄배만 덩그러니 묶여 있는 강물 앞에서 끊어진다. 하지만 갈수기에는 얕은 강바닥의 물 속 길이 드러나 건너편 연포 마을로 이어진다. 이곳에 달이 뜨면 강변의 깍아지른 세 봉오리 뒤로 달이 들어갔다 나왔다 해서 하루에 달이 세번 뜨고 지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길은 점차 좁아져 지도에도 잘 표시되지 않는 첩첩산중으로 연결되다 거북이마을에 이르러서는 완연한 등산길로 바뀐다.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백룡동굴(천연기념물 260호) 위를 돌아 침목령을 넘어서면 왼편으로 문희, 뉘른, 마하리방면으로 사람사는 곳이면 어디로든 길이 이어진다.
영월, 평창, 정선, 삼척 지역은 석회암 지질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돼 ‘한국동굴의 메카’로 자리잡고 있다. 석회암 동굴에서 탄산을 포함한 물이 석회암 지층으로 흘러내려가 암석을 서서히 녹이며 갈라진 틈을 확대한다. 이때 강물의 수면이 낮아지면서 석회암층 내의 지하수도 흘러나가 땅 속이 계속 침식해 동굴이 형성된다. 더러는 동굴 내벽 자체가 무너지면서 동굴이 점차 확대된다. 특히 동강 중부의 작은 지류인 창리천은 평상시 골이 깊은 강바닥에 항상 물이 바짝 말라 있는데, 주위 지하의 석회암 지대에 수많은 동굴들의 틈새로 물이 빠져나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동강변에는 백룡굴 외에도 30여개의 동굴들이 더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오직 산신만이 알 것이다.
두른이 마을 앞 황새 여울은 물이 얕고 물살이 빨라 뗏목꾼들이 두려워했다는 곳이다. 황새, 두루미, 청둥오리, 호사비오리와 같은 철새들이 모여들고 있다.
두른이를 지나 진탄나루를 건너 하류로 내려가면 물굽이가 완전히 1백80도 유턴(U-turn) 하는 어라연 계곡이 나타난다. 물길 앞쪽에 칼날 같은 암석이 있는데, 이곳에 오르면 강물 중간에 소나무가 올라 붙은 집채만한 3개의 바위가 보인다. 옥빛 동강 위에 수석이 조화를 이뤄 마치 하나의 거대한 수상 정원을 형성한 자태다. 그야말로 신선이나 볼 수 있는 선경(仙境) 그 자체다.
옛날 이 어라연에는 전산옥이라는 여인이 주막을 열고 살았다. 충주댐과 팔당댐이 들어서기 전 아우라지에서 한양으로 수없이 뗏목을 띄웠는데, 한밑천 잡아 주머니가 두둑했던 뗏목꾼들이 동강을 오가며 쉬어가던 강변 주막집은 지금은 간데 없고, 그 여인도 5년전에 세상을 떳다고 한다. 격렬한 물구비가 끝없이 휘돌아가는 동강변의 물길 안쪽 퇴적층에는 오래 전부터 드문드문 사람들이 들어와 물고기를 잡거나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오고 있다. 여러 나루터의 마을배는 강건너 일터와 학교로 가는 필수적인 교통수단이다. 강변 마을들을 이어주는 좁은 강변길을 따라 가노라면 갈기조팝나무의 흰 꽃줄기들이 터널을 이루고, 길가 수풀 사이로 산딸기와 초롱꽃, 노란미역취꽃, 엉겅퀴꽃, 키기 껑충한 달맞이꽃, 그리고 그 사이의 진분홍빛 패랭이꽃들이 끝없이 펼쳐져 이방인의 혼을 빼앗아 간다. 어린 시절 냇가에서 보던 까만 눈을 가진 물잠자리가 풀 끝에 앉은 것을 보면 유년시절의 추억이 새삼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