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천문학자 조지 엘러리 헤일(1868-1938)이 MIT를 졸업하고 당시 막 설립됐던 시카고대학 교수로 초빙됐을 때다. 그때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서 세계 최대의 굴절망원경을 만들려다가 자금난으로 포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망원경 제작에 관심이 많던 22세의 젊은 천문학 교수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얘기였다. 그래서 대학총장을 찾아가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이 만든 40인치 렌즈를 구입해 망원경을 만들자고 설득했다. 헤일은 전차로 큰 돈을 번 시카고의 거부(巨富) 찰스 여키스의 도움으로 1896년 미국 최대의 망원경을 만들었고, 이듬해 위스콘신주에 여키스천문대를 세웠다.
망원경 제작에 대한 헤일의 야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잇달아 60인치와 1백인치(2.5m) 망원경 건설에 도전했다. 60인치 반사망원경은 철강왕 카네기가 만든 재단의 도움으로 1908년에, 1백인치 반사망원경은 LA의 금속부품상 존 후커의 도움으로 1917년 11월 2일에 캘리포니아주 윌슨산에 들어섰다. 그는 1904년부터 1923년까지 윌슨산 천문대장을 맡았다.
그런데 헤일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다. 만성적인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던 것이다. 게다가 가끔 정신착란을 일으켜 몇달 동안 요양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결국 그는 윌슨산 천문대장을 사임해야 했다. 그후 그는 2백인치(5m) 반사망원경을 만드는 꿈을 꾸기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이름을 딴 2백인치 헤일망원경은 1947년 11월 팔로마산천문대에 들어섰다.
헤일이 뿌린 씨앗을 화려하게 꽃피운 사람은 에드윈 파월 허블(1889-1953)이다. 그는 헤일이 1백인치 망원경을 만든 다음 특별히 스카웃한 천문학자였다. 변호사인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시카고대학에서 법률학을 전공하고 3년 동안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법학학사를 받은 허블은,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시카고대학에 들어가 다시 천문학 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를 받고 여키스천문대에서 실습을 끝낸 그가 윌슨산천문대로 온 것은 1919년,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1923년 10월 6일, 허블에게 운명의 신이 다가왔다. 안드로메다 성운 내부에서 새로운 별을 발견했는데, 이전의 별들과 비교해본 결과 세페이드변광성(수축과 팽창을 거듭함에 따라 밝기가 변하는 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세페이드변광성을 이용해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은 하버드대학 천문대에서 일하던 귀머거리 여성천문학자 헨리에타 스원 리빗(1868-1921)이 찾아냈다. 그녀는 평생동안 남성 천문학자들이 찍어놓은 사진건판을 검토하면서 별들의 상대밝기를 연구해 2만4천개의 변광성 목록을 만들어냈다. 리빗은 1912년 세페이드변광성의 변광주기를 이용해 별의 고유 밝기를 알아내는 방법도 발견했다.
허블은 새로 발견한 변광성의 고유 밝기와 겉보기 밝기를 비교해 안드로메다 성운이 지구로부터 약 90만광년 떨어져 있음을 알아냈다. 이것은 당시 우리 은하의 크기는 10만광년이며, 안드로메다 성운은 그 안에 있다는 천문학계의 통설을 뒤집었다. 또 우리 은하 밖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시사했던 것이다.
외부은하를 처음으로 발견한 허블은 수십개의 은하에 대한 거리를 측정했다. 그런데 거리가 먼 것일수록 적색이동이 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도플러효과에 따르면 큰 속도로 멀어지는 광원(光源)일수록 빛의 파장이 빨간색쪽으로 치우친다. 1929년 허블은 이를 바탕으로 허블법칙을 발표했다. 즉 먼 은하일수록 큰 속도로 멀어진다는 것. 허블법칙은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과 이를 뒤집어 보면 언젠가 우주는 한곳에서 출발했음을 시사했다. 결국 이러한 허블법칙은 빅뱅, 인플레이션과 같은 현대우주론의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
고졸 아마추어, 명왕성 발견
1846년 9월 24일 독일 베를린천문대의 갈레(1812-1910)에 의해 8번째 행성인 해왕성이 발견된 이후 천문학자들은 9번째 행성을 찾는데매달렸다. 천왕성과 해왕성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9번째 행성이 존재한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80여년 동안 9번째 행성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웨(1855-1916)도 9번째 행성을 찾아나선 사람 중 하나다. 보스턴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는 1894년 애리조나주에 천문대를 세우고 9번째 행성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X 행성' (planet X)이라고 이름 지은 그 행성은 그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로웰의 꿈은 클라이드 윌리엄 톰보(1906-1997)가 이뤄냈다. 아마추어 천문가인 톰보는 너무 가난해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다. 그는 손수 거울을 닦아 9인치 망원경을 만들고, 밤마다 자신이 만든 망원경을 들여다보면서 목성과 행성을 스케치하는 일이 취미였다. 그는 어느날 전문가들로부터 조언을 들으려고 자신이 스케치한 행성 그림을 로웰천문대로 보냈다. 그런데 그에게 날아온 답신은 뜻밖에도 일자리였다.
1929년 로웰천문대의 조수로 들어간 톰보는 X 행성을 찾기 위한 팀에 배속됐다. 그가 하는 일은 날마다 천체 사진을 찍어 뭔가 변화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 그런데 시작한지 불과 1년도 안돼 그는 마침내 일을 내고 말았다. 1930년 2월 18일 로웰이 예언했던 지점에서 7도 정도 떨어진 곳에서 명왕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 사실은 3월 13일 공표됐다. 이때 톰보의 나이는 24살이었다. 톰보는 1932년 캔사스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때까지 13년 동안 로웰천문대에서 일했다.
명왕성은 로웰이 예언했던 행성이 아니었다. 로웰이 말했던 대로 천왕성과 해왕성에 중력적인 영향을 주기엔 너무 작았다. 명왕성의 질량은 지구의 5백분의 1(0.26%), 달의 4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명왕성을 행성에서 제외 하자는 읙녀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으며, 최근 발생한 명왕성 퇴출 논의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천문학자들은 명왕성이 9번째 행성임을 의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