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신무기 경연장 제1차 세계대전

기관총, 탱크, U보트, 독가스


맥심 기관총. 1차대전이 길어진 첫번째 원인은 기관총의 등장에 있다.


19세기 말 철강, 전기, 화학공업 등의 발전으로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생산력은 크게 증가했다. 생산력의 증가는 이를 소화해낼 식민지와 시장을 필요로 했고, 그러다보니 세계 곳곳에서 이를 쟁탈하려는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당연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에 따라 열강들은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맹으로, 그리고 다시 총부리를 겨누는 관계로 변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러일전쟁(1904-1905)도 그 중의 하나였다. 표면적으로는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와 조선을 삼키기 위해 다퉜지만, 러시아 배후에는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배후에는 독일이 있었다. 러일전쟁이 끝나자 제국들의 관심은 유럽의 남동쪽 발칸반도로 옮겨졌다. 이곳은 원래 15세기부터 오스만투르크제국(1297-1922)이 지배하던 곳. 그런데 18세기부터 오스만투르크의 세력이 약해지자 러시아가 흑해 연안을 뺏고, 헝가리,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이 독립했다. 하지만 여전히 오스만투르크라는 빵조각이 남아 있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투르크가 지배했던 지역이 민족분쟁에 휩싸인 것을 틈타 슬라브인들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해버렸다. 그러자 범슬라브족의 결집을 꾀했던 러시아와 세르비아는 화가 났다. 게다가 세르비아가 러시아의 비호를 받아 오스만투르크와 발칸전쟁(1912-1913)을 치러 승리한 후 오스만투르크 땅을 나눠 먹으려고 할 때 오스트리아가 끼어들어 알바니아를 독립시켰다. 이쯤 되니 세르비아로서는 오스트리아에 대해 이를 갈지 않을 수 없었다.

1914년 6월 14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살해되는 사건(사라예보 사건)도 이런 배경에서 발생한 것이다. 살해범은 보스니아와 통일을 원했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다. 곧 황제에 오를 황태자를 잃은 오스트리아는 같은 게르만족 계열인 독일을 믿고 7월 28일 세르비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세계 제패를 노력했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사주했다는 설도 있음). 결국 세계는 오스트리아, 독일, 터키, 불가리아 등의 동맹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이 세르비아 편을 드는 연합국으로 나뉘어 5년에 걸친 제1차 세계대전(1904-1918)을 치른다. 여기에는 31개국에서 5천만명의 병력이 동원되고, 1천만명이 사망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은 전면으로 나서 미리 준비해둔 작전을 썼다. 즉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을 최소한의 병력으로 막고, 프랑스와 대치하고 있는 서부전선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전술이다. 그러나 독일은 참모총장이 바뀌는 바람에 이 작전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키지 못했다. 결국 초기에 기선을 제압하지 못한 독일은 연합국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합국 역시 독일을 쉽게 밀어붙이지 못했다. 독일군들이 참호를 파놓고 기관총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치러온 전쟁은 포병의 지원을 받아 보병들이 일진일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무기라고 할 수 있는 기관총이 등장하면서 쉽게 적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때로 한두 대의 기관총으로 독일군은 적의 대군을 막기도 했다. 그러니 연합군으로서는 많은 병력을 희생해가며 무리하게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1차대전이 참호전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모두 기관총 때문이었다.

기관총이 전투에 쓰인 것은 미국 남북전쟁 때 등장한 개틀링포가 처음이다. 이것은 여러개의 총신을 묶어둔 것이었다. 그런데 1884년 영국의 맥심이 하나의 총신으로 탄환을 연속적으로 발사할 수 있는 기관총을 개발해냈다. 이것은 탄환이 발사될 때 생기는 반동의 힘으로 탄피를 빼고, 탄환을 다시 장전해 발사했다. 맥심식 기관총의 위력을 먼저 깨달은 곳은 영국이 아닌 독일이었다. 독일은 기관총을 대량생산해 비축해두고, 1914년 9월 프랑스를 침공했다가 퇴각하면서 사용해 큰 덕을 보았다.


영국의 마크4호 전차. 탱크는 참호전을 위해 개발된 신무기였다.


방패가 튼튼하다면 이를 뚫는 창도 생기는 법. 기관총 때문에 교착상태에 빠진 전황을 역전시킨 것은 전차였다. 영국은 1914년 9월 독일을 무찌르기 위해 ‘탱크’라는 암호명을 가진 전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기관총을 제압하고, 철조망을 파괴하고, 돌격하는 보병을 보호하고, 적의 포병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의 스윈턴 공병중령은 미국의 트랙터에서 힌트를 얻어 ‘마크 1호’란 최초의 전차를 만들었다. 이것은 트랙터처럼 무한궤도로 움직이는 바퀴를 달고 있었고, 두꺼운 철갑으로 몸을 두르고, 57mm 곡사포와 기관총 2대를 탑재했다. 무게는 28.5t.

영국은 1916년 9월 15일 솜강 전투에 처음으로 9대의 전차를 사용한 이래 1917년 알사스와 메시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프랑스도 회전포탑을 갖춘데다가 기동력이 뛰어난 루노를 개발해 서부전선에 투입했다. 1차대전 중 개발된 영국의 전차는 2천6백36대였고, 프랑스의 루노는 3천8백70대였다.

탱크에 대한 비밀을 캐기 위한 독일의 노력은 처절했다. 1917년 10월 15일 프랑스 군사재판에서는 41세의 무용수가 처형됐다. 인도계 네덜란드인인 이 무용수의 이름은 마가레타 게에르트루, 그러나 마타 하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마타 하리는 연합군 고위장성들을 통해 탱크에 관한 제조비밀을 캐내 독일군에게 넘긴 혐의로 이날 소총수들 앞에 섰다. 후에 히틀러는 1차대전 때의 패배를 거울 삼아 전차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 세계 최강의 전차군단을 만들었다.

1차대전 중 독일은 비록 육지에서 열세였지만, 바다에서만은 U(유)보트라는 천하무적 잠수함 덕분에 연합국과 대등한 전쟁을 펼쳤다. U보트는 ‘회색의 늑대’로 불리며 연합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았다. 비록 1차대전 중 독일은 2백척의 잠수함을 잃었지만, 연합군 선박을 1억2천만t이나 바다에 수장시켰다.


독일의 알바트로스 전투기.


가솔린기관, 축전지, 어뢰발사기 등을 갖춘 근대적 잠수함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미국의 홀랜드호가 처음이었지만 속력이 느리고 잠항성도 형편없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가솔린기관 대신 힘 좋은 디젤기관이 등장함에 따라 잠수함(물위에선 디젤기관으로, 물속에서는 전기모터로 추진)은 기동성과 안정성이 향상됐다. 덕분에 대형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독일은 전쟁 막바지인 1917년 2월 U보트를 이용해 ‘무제한 잠수함작전’을 펼쳤다. 이는 연합국으로 향하는 배는 무조건 침몰시킨다는 무서운 작전이었다(영국도 곡물을 실은 배가 독일로 향하면 적선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음). 이를 통해 독일은 연합군의 수송로를 끊는데 성공했지만, 그동안 전쟁을 방관하면서 군수품을 팔아먹던 미국의 참전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상선들이 U보트의 공격을 받자 윌슨 대통령은 4월 6일 독일 동맹국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독일에게는 또 하나의 신무기가 있었다. 바로 독가스다. 이것은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했던 프리츠 하버(1868-1934)가 개발한 것이었다. 독일군은 1915년 4월 22일 서부전선 이프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염소 독가스를 살포했다. 그 결과 연합군 전선에는 60km에 달하는 공백이 생겼다. 그러나 독일은 불행하게도 이 공백에 투입할 예비병력이 없었다. 6월 21일 독일군은 아르곤 지역에서 또다시 독가스를 사용해 프랑스군의 참호를 짓밟았다.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은 1918년 솜, 아이브르, 오이제 등의 전투에서 미군을 상대로 이뤄지기도 했다.

1차대전 중 비행기는 공포탄과 같은 존재였다. 처음 비행기가 개발됐을 때 군에서는 전투보다 수송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도 공군이 없었다. 1914년 세계 비행기 수는 2천-3천대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거의 시험용이었다.

전쟁에 비행기가 도입된 까닭은 포병부대의 공격목표를 결정하고, 사진정찰을 하는 주된 목적이었다. 거의 모든 전투지역에서 교착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찰기가 점차 늘자 적국의 정찰기를 부수기 위해 비행기를 무장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공중전이 생겨났다. 공중전을 위해 특별히 개발된 ‘포카’는 엔진과 연동시켜 회전하는 프로펠러에 부딪치지 않고 총알을 발사할 수 있는 기관총이었다. 독일은 1차대전 말 공습용 폭격기를 선보였다. 비록 폭격에 의한 피해는 적었지만, 그것이 주는 공포는 매우 컸다. 그러나 1차대전이 끝날 무렵 비행기의 항속거리는 길어지고, 그 수도 20만대로 늘었다. 전쟁무기로서 비행기의 위력은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서야 발휘됐다.

이밖에도 1차대전 중 선보인 신무기로는 영국이 1918년 개발한 항공모함과 독일이 개발한 대형 대포가 있다. 최초의 항공모함인 아가스는 상선을 개조해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또 독일에서 개발한 ‘베르타’(Bertha)는 4백20mm 대형 곡사포로, 1.254kg의 포탄을 10km 밖으로 쏠 수 있었다. 당시 연합국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대포는 프랑스가 보유한 75mm포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9월 30일 불가리아의 항복, 10월 27일 오스트리아의 항복, 10월 30일 오스만투르크의 항복, 11월 11일 독일과 연합국의 휴전으로 끝났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에서는 10월 혁명이 일어나 소비에트공화국이 탄생했다. 전쟁에 패한 독일은 모든 해외식민지를 잃고, 영토의 10%를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 넘겨줘야 했다.

그러나 독일에게 더욱 가혹했던 것은 전쟁 배상금이었다. 액수는 1천3백20억마르크로 요즘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해도 92조원에 달하는 큰 돈이었다. 이때 독일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또 한번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1t의 바닷물 속에서 약 65mg의 금이 녹아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는 바다에서 금을 추출해 전쟁빚을 갚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1925년부터 독일은 2년 동안 반사음향기를 이용해 깊은 바닷속의 지형도를 만들면서 바다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그러나 금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게 녹아있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바닷속 산맥인 중앙해령을 발견했으나, 이게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9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GAMMA
  • 사진

    동아일보 조사연구팀
  • 홍대길 기자

🎓️ 진로 추천

  • 역사·고고학
  • 정치외교학
  • 군사·국방·안보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