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번디시의 가연성 공기로 시작된 수소에 대한 탐색은 물질의 근본을 규명하려는 화학의 논의에서 항상 중심을 차지해왔다. 그리고 수소의 내부구조가 해명되자 수소는 모든 원소를 이루는 기본 원소가 됐다.
수소는 우주가 시작할 무렵부터 자연에 존재했지만 인간이 수소를 분리하고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지는 2백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인간이 써 내려간 자연에 관한 지식의 중요한 고비에는 수소가 있었다. 수소의 역사가 곧 화학과 물리학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캐번디시의 가연성 공기
1670년대 보일(1627-1691)을 비롯한 몇몇 영국 화학자들은 물질이 썩을 때나 철과 산을 반응시킬 때 기포를 내며 나오는, 불에 잘 타는 공기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공기를 따로 채집하거나 성질을 연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776년 영국의 귀족 헨리 캐번디시(1731-1810)는 처음으로 ‘가연성 공기’라고 불린 수소 기체를 모으고 그 성질에 관해 연구했다. 유산을 물려 받아 자신의 집에 실험실을 만들고, 정교한 실험기구를 사용해 당시로서는 상당히 정밀한 실험을 했던 캐번디시는 매우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특히 여자를 기피했던 인물로 유명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하녀조차도 직접 만나지 않고 메모를 통해 지시할 정도였다. 캐번디시는 아연, 주석, 철 등에 묽은 황산, 염산 등을 반응시켜 이 가연성 공기를 얻었다. 그는 서로 다른 금속과 산들의 반응에서 발생하는 가연성 공기가 모두 동일하다는 점과 이 공기의 밀도가 보통 공기(대기)보다 매우 작다는 점을 발견했다. 캐번디시는 이 결과를 왕립학회에서 ‘인공의 공기들’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8세기에는 이 가연성 공기 외에도 몇가지 새로운 공기가 다수 발견됐는데, 이들은 대체로 오늘날 우리가 매우 흔하게 대하는 공기들이다. 조셉 블랙의 ‘고정된 공기’(이산화탄소), 캐번디시의 ‘가연성 공기’(수소), 프리스틀리의 ‘보다 호흡하기 편한 공기’(산소) 등이 이때 새로 발견된 것들이다.
그런데 캐번디시는 이 공기의 실체를 오늘날의 수소와 같이 대기의 한 성분을 이루는 순수한 물질로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는 처음에 수소를 가연성과 관계있는 ‘플로지스톤’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플로지스톤은 연소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화학자들이 도입한 개념이었다. 독일의 슈탈을 비롯한 당시 화학자들은 모든 물질은 플로지스톤이라는 “비물질적이며 무게를 잴 수 없는 불의 원리”를 내부에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물질이 불에 타는 것은 플로지스톤이 물질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한 마음의 정도, 아름다움의 정도를 무게로 잴 수 없는 것처럼 플로지스톤 역시 잴 수 없는 원리였다. 18세기 들어 화학에서 과거의 연금술과 신비주의의 흔적을 제거하려는 화학자들의 노력을 통해 플로지스톤을 물질로 이해하는 경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캐번디시는 가연성 공기가 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실체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이 공기의 성질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렀을 뿐 실체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라부아지에가 수소 명명
우리가 사용하는 ‘수소’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1743-1794)였다. 캐번디시는 1783년 자신의 ‘가연성 공기’와 영국의 화학자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간 공기’(산소)를 태우면 물이 만들어진다고 발표했다. 라부아지에는 캐번디시의 실험 발표를 산소와 수소가 반응해 물이라는 화합물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물질이 타는 것은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산소가 더해지는 것이라는 오늘날과 같은 연소의 개념을 확립했다. 결국 라부아지에는 수소가 타서(산소가 더해져서) 남은 것이 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가열된 관에 수증기를 통과시켜 산소와 수소로 분해하는 실험에 성공했으며, 이 실험에서 발생하는 수소는 바로 물이 분해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에 라부아지에는 수소를 ‘물을 만드는 원리’(Hydrogen)라고 불렀다. 실체가 잘 파악되지 않았던 캐번디시의 가연성 공기가 물을 만드는 원리인 ‘수소’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1787년 라부아지에와 당시 프랑스 화학자인 모부, 베르톨레 등이 공동작업을 통해 완성시킨 화합물의 명명법을 보면 산소(Oxygen)는 산을 만드는 원리(oxy)acid + generating), 수소(Hydrogen)는 물을 만드는 원리(hydro(water) + generating), 질소(Nitrogen)는 (nitro(ammonia) + generating)는 암모니아를 만드는 원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산소와 수소의 경쟁
한편 산소는 라부아지에에게 연소의 원리이자 모든 산의 근본이었다. 그는 모든 산에는 반드시 산소가 포함되며, 산소의 개수가 많을수록 산성이 강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산소를 포함하지 않은 예외적인 산들이 몇몇 있었다. 브롬산(HBr), 플루오르산(HF) 그리고 염산(HCl)이었다. 브롬산, 플로오르산과 같은 약산은 별로 중요하게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염산은 강산이며 당시 화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산으로 취급됐기 때문에 라부아지에의 산이론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제기됐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당시의 분석 테크닉으로 뮤리엘산(당시에는 염산을 이렇게 불렀다)을 분석할 수 없지만, 언젠가 분석이 가능해진다면 그 속에는 산소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영국의 화학자 데이비(1778-1829)는 볼타의 화학전지를 이용한 전기분해법으로 염소, 칼륨, 나트륨 등의 원소들을 분리하면서 라부아지에의 뮤리엘산이 산소의 산이 아니라 염소의 산이며, 따라서 이 산에서 산성을 나타내게 하는 것은 산소가 아니라 수소라는 점을 밝혀냈다. 데이비는 다른 산의 경우로 연구를 확대해, 1815년 산을 만드는 원소는 산소가 아니라 수소라고 주장했다. 서서히 동조자를 얻어가던 산의 수소이론은 1818년 리비히(1803-1873)가 데이비의 생각에 동조하는 견해를 발표한 다음부터 산의 산소이론을 누르고 확실한 승리를 획득했다.
그 후 산의 수소이론은 1880년대 오스트발트와 아레니우스가 수용액에서 수소이온(H+)을 만드는 것이 산이며, 염기는 OH- 이온을 만드는 물질이 염기라고 다시 정의할 때까지 약 50년 동안 정통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산과 염기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수소를 사용했던 전통은 나중에 루이스가 화학결합에서 전자쌍을 주고받는 것을 기준으로 다시 정의할 때까지를 합하면 대략 1백년 이상 이어진 셈이다.
원자량의 기준 수소
화학의 가장 중요한 반응 중의 하나인 산-염기 반응에서 수소의 중요성이 부각되던 시기에 영국의 화학자 돌턴(1766-1844)은 원자론을 제시했다. 돌턴은 모든 물질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고 속이 꽉 차 있는 원자로 구성돼 있고, 원자는 모든 화학 반응에서 파괴되지 않으며 보존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화학원소의 수만큼이나 서로 다른 종류의 원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돌턴은 화학원소들간의 상대적인 비(마치 오늘날의 원자량과 같은)를 구하는 작업을 했다. 이때 화학반응들의 기준이 됐던 반응은 가장 단순하고 중요한 화학반응인 ‘수소 + 산소 → 물’이었다.
프랑스의 화학자 게이 뤼삭(1778-1850)의 분석에 따르면 무게를 기준으로 수소와 산소의 반응 비율은 12.6 : 87.4였다. 돌턴은 수소가 알려진 가장 가벼운 원자이고, 물, 산, 암모니아 등에 모두 존재하는 것처럼 많은 화합물의 구성 성분이기 때문에 수소를 기준으로 물질의 무게비를 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게이 뤼삭의 실험값에 바탕해 수소:산소의 상대적인 무게비를 1:7(현재는 1:8)로 정했다. 또 그는 암모니아를 분석해 수소와 질소의 비가 1:5(현재는 1:7) 정도라는 프랑스 화학자 베르톨레의 실험값을 이용해 수소와 질소의 무게비를 정했다.
(표1)은 돌턴이 1808년에 발표한 원자량표다. 이 간단한 표 안에는 당시 가장 뛰어난 분석(실험)능력이 있는 화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종합돼 있었다. 비록 상대적인 무게비이긴 하지만 반응에 참여하는 원자들의 비율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은, 미지의 화합물을 분석해, 그 정체를 확인하고, 화학식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도구를 제공했다. 이후부터 화학자들은 화학반응에 참가하는 원자들의 개수를 용이하게 정할 수 있게 됐다. 19세기 초반의 이 같은 업적에 기초해 그들의 관심을 화합물의 구조로 넓혀갔다.
한편 일단의 화학자들은 돌턴이 원자의 수를 너무 많이 만들었다고 불평했다. 자연계의 기본적인 존재인 원자의 수가 50개나 될 리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인물 중의 한 명이 영국의 의사 프라우트(1785-1850)였다. 프라우트는 자연의 모든 원소가 수소의 정수배로 구성됐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염소의 무게비가 36이라면 이것은 수소 36개가 압축돼 염소가 됐다고 보는 것이었다. 20세기 초반 영국의 물리학자 모즐리가 수소 이온(양성자)의 수에 따라 주기율표 상의 원소 배열을 설명해 줌으로써 프라우트의 가설은 부분적으로 인정을 받게됐다.
돌턴의 원자량비나 프라우트의 원자가설, 그리고 모즐리의 주기율표까지 물질의 근본을 규명하려는 화학의 논의에는 항상 수소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점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기본 입자라고 여겨졌던 원자가 깨져 원자 이하의 세계가 알려질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소 내부 들여다보기
1897년 톰슨의 전자 발견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해왔던 원자가 깨어졌음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톰슨은 원자의 내부구조를 설명해야만 했다. 톰슨은 원자구조가 건포도가 점점이 박혀있는 푸딩처럼 전자가 양전하를 띤 무정형의 질량체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톰슨의 모델은 알파선이 튕겨나오거나 큰 각도로 꺽이는 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한 모형이 영국의 물리학자 러더포드가 제시한 원자모형이었다. 러더포드는 실험에서 라듐으로부터 나온 알파입자가 매우 얇은 금박과 충돌하면서 생긴 입자가 큰 각도로 꺽이거나 심지어 튕겨나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러더포드는 이 점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금원자 질량의 대부분이 양전하를 띤 입자(핵)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중심에 핵이 있고 핵의 양전하와 평형을 이룰 만큼의 전자가 핵 주위를 운동하는 새로운 원자 모형을 제시했다. 그러나 러더포드의 모델은 시스템 내의 전자들간의 정전기적 상호작용 때문에 원자의 안정성을 설명하기 힘든 단점이 있었다.
이같은 전자기학적, 역학적 불안정성 문제는 덴마크의 물리학자 보어가 해결했다. 보어는 수소원자를 본격적으로 연구해, 그 구조를 밝힌 첫번째 인물이었다. 보어는 1912년 3월 맨체스터의 러더포드 아래서 공부하면서 다윈(찰스 다윈의 손자)의 알파 입자 실험에 관한 분석을 접하게 됐다. 그는 수소원자가 핵 주위에 1개의 전자를 가지는 것이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다음 문제는 전자 궤도의 크기(반지름)를 어떻게 결정하는가였다.
고전역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핵을 중심으로 일정한 궤도운동을 하는 전자의 궤도반경을 구하는 문제는 단순히 방정식을 푸는 것에 불과했다. 문제는 이 식이 어떤 크기의 반경도 만족한다는 점이었다. 수소 원자는 특정 궤도 반경에서 핵과 전자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데, 고전역학적인 관점에서는 이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1913년 2월 보어는 한센과의 대화를 통해 수소 선스펙트럼에 관한 발머식을 소개받은 다음 자신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음을 알게됐다. “발머식을 보자마자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라는 말로 보어는 그날의 충격을 표현했다. 그가 발머식에서 보았던 것은 수소원자에서 방출되는 허용된 진동수는 에너지의 차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보어는 “수소원자 내의 전자는 양자화된 특별한 에너지 값을 가지는 궤도만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획기적인 ‘수소 원자모형’을 제안했다.
보어의 원자 모형은 1914년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츠가 원자를 이온화시키는데 필요한 에너지인 이온화 포텐셜을 측정함으로서 실험적으로 확인됐다. 이후 1915년 독일의 물리학자 좀머펠트가 양자역학을 사용해 수소원자의 미세구조를 깔끔하게 해명함으로써 수학적으로도 완성됐다.
이제 인간은 수소의 내부 구조에 관한 세부적인 지식을 갖게 됐으며, 이 지식은 모든 다른 원자들의 구조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됐다. 자연계의 다른 물질은 모두 수소의 원자핵인 양성자가 몇 개 모여있느냐에 따라 그 성질과 구조가 달라진다. 수소의 내부구조가 해명됨으로써 과학자들은 자연의 비밀을 푸는 가장 간단한 열쇠를 갖게 된 것이다. 수소의 원자모형이 해명되기 시작한지 20여년 후인 1932년 미국의 화학자 유레이는 미국 표준연구소의 워시번과 함께 수소의 동위원소(중수소)를 발견하고 그 공로로 193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