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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조작 식품 먹어도 되나

3개월에 걸친 시민 합의회의 지상 중계

웬만한 병충해에 끄떡 없는 콩, 오래 저장해도 무르지 않는 토마토. 유전자를 변형시켜 만든 양질의 농작물이 풍요로운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고 있다. 하지마 이들이 건강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팽팽하게 의견이 맞선다. 이에 시민들이 3개월에 걸쳐 20회의 전문가 강의를 듣고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나섰다.


유전자 조작식품
 

"유전자 조작 식품이 정말 건강에 해를 끼치지 않는 안전한 식품입니까?" "기존의 식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엄밀한 실험 과정을 통해 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 전성을 입증해 왔습니다."

"아닙니다. 유전자 조작 기술은 생명체에 돌연변이를 양산하는 기술일 뿐입니다. 유전병에 걸린 작 물을 먹으면 장기적으로 몸에 해로울게 뻔합니다."


무르지 않는 토마토
 

1998년 11월 15일 일요일 오후 2시 숭실대학교 사회봉사관에서 이색 재판이 열렸다. 법정의 한편 에는 검사와 변호사역을 맡은 과학기술자 10여명이 모여 있었다. 맞은편에는 이들의 최종적인 변론을 듣기 위해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 13명이 자리를 잡았다. 이날의 피고는 '유전자 조작 식품'. 자연산보다 양질의 품종을 얻기 위해 외래 유전자를 삽입해 기른 농작물, 그리고 이를 원료로 삼아 만든 식품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병충해와 농약에 잘 견디는 콩이나 옥수수, 오래 저장해도 무르는 법이 없는 토마토가 그들이다(표1).


(표1) 유전자조작 곡물 및 식품 생산현황
 

새로운 종류의 식중독 사건

시민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그동안 전문가들께서 강의한 내용에 대해 마지막으로 추가 질문을 드리는 자리입니다. 저희들은 학문적으로 문외한이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내용을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지금의 토론을 마치고 오늘 밤부터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시민의 입장을 정리해 내일 발표할 것입니다."

순간 전문가와 시민 사이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9월 이후 두차례에 걸친 예비 모임과 하루 전날 시작된 본행사까지 총 20회의 전문가 강연이 끝나고 마침내 결론을 내릴 시점이 다가왔기 때문이다(표2).

(표2) 시민패널이 최종적으로 선정한 질문들
1. 유전자조작 식품이란?(동식물·미생물 포함)
2. 유전자조작 식품은 필요한가?
3. 유전자조작 식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4. 유전자조작 식품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5. 유전자조작 식품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는 어떤가?
6. 유전자조작 식품의 윤리적·종교적 문제는 무엇인가?
7. 유전자조작 식품의 안전·윤리와 관련된 규제 현황 및 바람직한 방향은?
8. 유전자조작 식품의 안전·윤리에 대한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행사의 공식적인 명칭은 '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전과 생명윤리에 관한 합의회의'. 지난 7월 유 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언론과 방송을 통해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시민의 입장을 개진할 사람을 공개 모집했다. 지원자 수는 40여명. 주최측은 면접을 통해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 아무런 전문 지식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14명을 최종 선발했다(1명이 교통사고를 당해 본행사에는 불참했다). 이 들의 직업은 주부, 학생, 농민, 실직자 등 다양했고, 연령대도 골고루 분포됐다(20대 5명, 30대 5명, 40대-60대 4명).

선발된 시민의 임무는 단 한가지.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시민의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하는 일이다.

시민들이 질문에 나섰다. 일단 이전의 강연에서 명확치 않아 보이는 사실들을 확인하는 일부터 시작됐다.

"모 우유회사에서 선전하고 있는 치즈에 채소성분이 들어있다고 하는데, 유전자가 조작된 치즈가 이미 국내에서 개발된게 아닌가요? 또 어제 어떤 분 말씀으로는 국내에서 개발된 인공씨감자가 외 국에 수출되고 있다던데요."

전문가들이 답변할 차례였다. "아직 국내에서 자체 개발된 식품은 없습니다. 그리고 인공씨감자는 외래 유전자를 삽입한게 아닙니다. 단지 실험실에서 콩알만한 크기의 씨감자를 인공적으로 배양하 는데 성공했다는 의미입니다."

질문은 단순한 사실 확인에서 "전문가들의 솔직한 견해를 밝혀달라"는 요구로 넘어갔다. 가장 핵 심적인 사항은 유전자 조작 식품이 인간과 생태계에 해를 끼치는지 여부였다.

여기서부터 전문가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먼저 건강 문제. 검사역을 맡은 전문가들 은 유전자 조작 식품이 건강에 해를 끼친 증거를 제시하면서 '유죄'를 주장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1989년 미국에서 발생한 '트립토판 사건'. 트립토판은 식품 첨가제로 흔히 사용되는 아미노산(단백 질의 기본 성분)의 일종이다. 과학자들은 미생물에 트립토판 유전자를 삽입한 후 미생물을 증식시 켜 대량의 트립토판을 얻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 트립토판이 첨가된 식품을 먹고 36명이 사망하고 1만여명 이상의 환자가 발생했다는 점 이다. 몸에서 백혈구 수가 증가하고 심한 근육통 증상을 보이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병이었다. 미 국은 그해 11월 트립토판 첨가 식품을 먹지 말라고 '비상 경고령'을 내렸다.

이처럼 '확실한' 증거는 아니지만 인체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농후한 사례도 여럿 있다. 미국의 한 회사는 콩의 영양분을 더욱 증가시키기 위해 브라질산 땅콩의 특정 유전자를 콩에 삽입했다. 가축 사료용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린피스 회원이 유전자 조작된 옥수수밭에서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부작용 증거' 있다 vs 없다

그러나 회사측은 이 콩의 상품화를 포기했다. 브라질산 땅콩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이 콩을 먹으면 역시 알레르기 증상을 보인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콩으로 길러진 가 축을 사람이 먹을 경우 그런 증세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한편 유전자를 조작할 때 원하는 유전자가 제대로 목표물에 삽입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흔히 '표식 유전자'가 함께 사용된다. 즉 목표물에서 표식 유전자가 발견되면 원하는 유전자가 올바르게 삽입 됐다는 의미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식 유전자는 항생제에 잘 견디는 특성을 가진 유전자다. 현 재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검토한 52종의 유전자 조작 농작물 중 31종에서 항생제 내성 유전자 가 이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표식 유전자가 사람의 장에 들어왔을 때 별다른 위험이 없는 것일까. 이 유전자가 만든 단백질이 알레르기나 독성을 일으키지 않을까. 만일 항생제를 복용하는 사람이라면 표식 유전자의 내성 때문에 '약발'이 전혀 안먹히는 것이 아닐까.

변호인단의 반론이 시작됐다. 이들은 검사측의 기소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반박하면서 '안전성'을 주장했다. 먼저 트립토판의 경우 정제 과정에서 불순물이 충분히 제거되지 않은 탓에 발생한 문제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또 표식 유전자를 비롯해 인체에 알레르기나 독성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은 엄격한 실험을 통해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종류만 시판되고 있다.

현재까지 표식 유전자가 장 내에서 활성화돼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보고된 적이 없다. 또 표식 유전자는 위산이나 핵산분해효소에 의해 거의 분해돼 없어진다. 따라서 자신의 특성인 '항생 제 내성'을 발휘할 기회는 없다.

물론 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전성은 끊임없이 과학적으로 평가돼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유전자 가 조작된 식품이기 때문에 특별히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매일 섭취하는 음식에 대해 이 런 평가가 시행되고 있으며, 유전자 조작 식품 역시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유전자 조작 식품이 마 치 위험한 '기형' 음식인양 색안경을 끼고 쳐다보는 것은 잘못이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유럽, 그리 고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 이미 안전성 판정을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 별다른 문제 없이 먹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양쪽의 팽팽한 주장이 마무리되자 배심원들로서는 개운함보다 혼란감이 더 커진 느낌이었다. 변호 사측 과학자들이 아무리 안전성을 보증한다 해도 시민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말끔히 지울 수 없다. 반대로 검사측 과학자들은 잠재적 위험성을 다소 막연하게 되풀이할 뿐이었다. 양쪽 모두 속시원한 대답이 아니었다.

더욱 답답한 점은 유전자 조작 식품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이 이것이 이미 우리의 식탁에 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미국은 97년 자국에서 수확한 콩의 13%와 옥수수의 3.5%.가 유전 자를 변형시킨 곡물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올해는 30% 이상으로 그 양을 늘리고 있다는 말도 덧 붙였다. 한국이 매년 수입하는 콩과 옥수수의 절반 이상이 미국에서 들어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와 친숙한 음식인 콩기름이나 두부, 메주에 이미 변형된 유전자가 포함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세계적인 점포망을 지닌 패스트 푸드점에서 판매하는 야채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정확한 함량을 모를 뿐이다.

어느 것이 천연산이고 어느 것이 변형된 작물인지 알 수 없는 점도 큰 문제다. 미국에서는 천연산 작물과 변형된 작물을 아예 섞어서 자국과 외국에 팔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구별이 어렵다. 정 밀 검사를 거친다 해도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는 정확히 판별하기 어렵다는게 관련자의 평이다. 천 연산 제품에도 외래의 유전자가 우연히 섞여 들어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린피스 회원들이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생산지로 돌려보내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슈퍼 잡초의 횡포

예정보다 토의 시간이 길어지자 배심원 대표가 10분간 휴정을 선언했다. 건강 문제는 아무리 오래 얘기해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한정된 시간에 회의를 마치기 위해서는 미진하나마 토의를 일단 마무리해야 했다. 휴식이 끝난 후 논의는 '유전자 조작 식품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으로 이어졌다.

건강 문제와 달리 이 주제에 대해서는 검사측과 변호사측이 대략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한마디로 "유전자가 조작된 곡물이 장기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할 위험이 충분히 있다"는 내용이었다.

유럽의 경우 주요 농작물인 옥수수를 생산할 때 해충이 늘 골치거리였다. 해마다 겪는 피해가 수백만달러에 달했다. 그래서 해충 피해를 막기 위해 옥수수 생산에 유전공학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생물 중에는 병충해에 잘 견디는 개체들이 있다. 이들의 유전자에서 병충해 저항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를 잘라 옥수수 유전자에 이식시키면 옥수수의 내성은 강해진다. 당연히 수확량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1996년 8월 유럽연합은 유전적으로 개량된 옥수수를 생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유전자가 조작된 곡물이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병충해를 등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1992년 미국 미시간주립대는 바이러스에 저항성을 지닌 유전자재조합 담배 1백25포기를 재배했다. 기대대로라면 이 담배는 더 이상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고 건강하게 자랐어야 한다.

하지만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이 중에서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개체 4포기가 발견된 것이다. 바이러스가 내성이 생겨 웬만한 저항에도 견디도록 단련된 탓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만일 농약에 내성을 지니도록 유전자가 조작된 식물의 꽃가루가 바 람을 타고 주변의 다른 식물에 옮겨간다면 어떨까. 생각치도 않던 '슈퍼 잡초'가 생겨 약을 아무리 뿌려도 제거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더욱이 슈퍼 잡초는 생명력이 더욱 강해진 탓에 주변의 다른 식물과의 경쟁에서 혼자 살아남아 생태계를 교란시킬 수 있다.

생태계에 대한 토의가 마무리될 즈음 변호사측의 전문가 한명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슈퍼 잡초의 경우 다른 종류의 제초제를 뿌리면 금새 제거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또 유전자 조작에 의해 농약에 잘 견디는 작물을 기르면 기존의 농약 사용량이 10-40% 줄어 환경 보호의 측면에서도 유리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벼농사를 지을 때 잡초를 없애기 위해서는 벼는 살리고 잡초는 죽이는 농약을 써야 한다. 이와 같은 '선택적' 농약은 벼와 잡초를 모두 없애는 '무차별적' 농약에 비해 훨씬 많이 뿌려야 효과를 발휘한다. 왜 그럴까.

'선택적' 농약은 벼가 갖지 않은 잡초만의 특정 생리 기능을 억제해야 한다. 그런데 이 기능은 잡초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 기능을 집중적으로 억제함으로써 잡초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는 대량의 농약이 동원돼야 한다. 만일 농약에 잘 버티는 벼를 만든다면 적은 양의 '무차별적' 농약을 뿌려도 잡초만 없앨 수 있기 때문에 환경오염이 줄어든다는게 요지다.

하지만 배심원들은 이 변론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현재의 몇가지 증거만을 가지고 유전자가 조작된 곡물이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회의의 주제는 유전자 조작 식품을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 종교윤리적 문제, 바람직한 규제방안, 생명안전윤리 교육과 같은 포괄적인 내용으로 이어졌다. 별다른 찬반 논의 없이 전문가들의 지식 을 시민이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동물 유전자가 든 채소는 동물인가 식물인가"라는 근본적인 문 제부터 시작해 "유럽에서 라벨링 제도(유전자 조작 사실 여부를 세품에 표시하는 제도)가 어떻게 실시되고 있으며, 한국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와 같은 현실적인 대안에 이르기까지 유전자 조작 식품에 관련된 모든 현안을 하나씩 점검해 나갔다.

과학자의 과신 경계해야

저녁 7시 예정보다 한시간 늦게 회의가 끝났다. 시민과 전문가의 얼굴 모두에 다시 일말의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시민은 이날 밤부터 시작해 자체적인 종합 토론을 벌여 그 결과물을 다음날 발표해야 하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작업을 마쳐야 한다. 20여차례나 강의를 들었지만, 찬반 양론이 팽팽히 맞서는 전문적인 내용을 소화하고 입장을 밝히는 일이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

일부 전문가들은 "과연 시민들이 충분히 내용을 이해했을까"라며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실제로 전날 저녁 식사 시간에 한 변호사측 전문가는 "제대로 알고 있는지 걱정된다"고 말해 시민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시민이 결정한 사항이 자신의 연구비에 타격을 입히지 않을까 하는 '농담'도 오갔다. 이에 대해 시민들은 "너무 자신의 입장만 일관되게 고수한다"며 전문가들의 편협성을 지적했다.

11월 16일 월요일 오후 1시 마침내 보고서를 발표하는 시간이 닥쳤다. 밤을 꼬박 새우며 열띤 논의 끝에 얻어낸 성과물이었다. 이들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보고서를 발표한 시민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유전자 조작 식품이 필요한가에 대해 시민패널 간의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필요하다고 주장한 논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아직 식량자립도가 낮으므로 식량자립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유전자 조작 식품이 필요하다. 쌀의 일정한 성분에 대해 알레르기를 나타내는 사람을 위해 그 성분이 없는 쌀을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 수 있듯이 특정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을 위한 식품을 개발할 수 있다. 유전자 조작 식품을 개발하지 않으면 생명공학의 국제적인 경쟁에서 뒤떨어지고 그들의 기술에 경제적으로 종속된다." 이에 비해 "불필요하다고 주장한 사람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이디오피아 등에서 사람들이 식량이 없어 굶어 죽을 때도 미국에서는 경제적 이익 때문에 식량을 버리는 상황이 펼쳐졌다. 현재 식량 문제는 식량의 절대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모순에 의한 것이다. 식 량 문제는 식생활 개선, 인구의 조절 등으로 해결될 수 있다. 생명공학의 국제적 경쟁논리에 빠져 들지 말아야 한다."

결국 배심원들은 피고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 유죄인지 무죄인지 판결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 다고 유전자 조작 식품이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다. 이들은 유전자 조작 식품이 건강 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과학자들이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정부 에 대해 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전성을 보장할 제도적 대책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 특히 현재 수입 되고 있는 유전자 조작 식품을 검역하거나 별도로 표시를 부착할 경우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할텐 데, 이를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할 것이 아니라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수출국에서 부담하도록 국제적 협력을 강화하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시민 패널은 총 18쪽에 달하는 자신들의 보고 서가 정책 입안자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당부하는 한편, 다른 시민들에게는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쏟고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했다.

사실 시민 패널이 유죄와 무죄를 판결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전문성 때문에 시민에게 불가침의 영역으로 인식돼 온 '과학기술정책' 분야에 처음으로 스스로의 의견을 마련하고 주장한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지난 11월15일(일) 개최된 합의회의 이틀째 모임. 왼쪽이 전문가패널, 오른쪽이 시민패널이다. 보고서를 만들기 직전 마지막 모임이었던 탓에 전문가와 시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계속 감돌았다. 다음날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시민이 주도한 작은 혁명

9월 초 첫 예비 모임이 열리던 날 시민들은 "아이를 둔 엄마로서 뭔가 걱정이 돼서" 또는 "아무 것도 몰라서 좀 알아보려고" 행사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처음 유전자 조작 식품이라는 이름을 들 었을 때 마치 농약처럼 위험한 느낌이 든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 시민도 있었다. 만일 이런 상황 에서 곧바로 합의점을 찾았다면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명확한 판결이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난 현재 이들은 전문가들의 주장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때로는 반론을 펼치는 수 준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충분한 내용 파악이 안된 상황에서 섣부르게 찬성과 반대를 결정짓는 일 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스스로 깨달았다.

한편 시민 패널이 이전까지 지녔던 과학기술자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깨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과 학기술자의 주장 역시 허점이 많았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만 지내온 탓에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 하는 편견이 종종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시민 패널은 과학기술자들이 좀더 '열린' 마음으로 상대편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함께 편하게 의논할 수 있는 입장을 갖추기를 바랬다.

행사 전체를 책임지고 진행해 온 김환석 교수(국민대 사회학과)는 "이번 합의회의는 시민이 주도 한 작은 혁명"이라고 평하고 "여기서 합의된 내용이 사회적으로 널리 공론화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현재 정부는 올해 11월 말 '유전자 조작 식품 표시제'를 시행하겠다고 밝힌 상태 다. 내년 초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종합적인 안전규제지침을 마련할 계획이다. 정부가 시민의 의사를 반영한 정책안을 마련하고 있는지, 그것이 올바르게 시행되고 있는지 관찰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일이 남겨진 과제다.

유전자 조작 식품이란? - 무르지 않는 토마토의 비밀

'조작'이라는 말은 '음모'나 '왜곡'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춘 것처러 느껴진다. 그래서 "유전자를 조작했다"는 말은 마치 유전자를 나쁜 목적을 위해 변조시킨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이란 말은 유전자를 변형(modification) 또는 재조합(recombination)시켰다는 의미일 뿐이다. 기존의 농작물에 다른 종(동물, 식물, 미생물)의 특정 유전자를 삽입함으로써 새로운 형질을 갖추게 된 농작물, 그리고 이로부터 가공된 각종 식품을 가리켜 '유전자 조작 식품'이라고 부른다.

최초의 유전자 조작 식품은 1994년 미국 몬샌토사에서 개발한 일명 프레브 세이브(FLAVR SAVR) 토마토다. 저장 기간을 늘리기 위해 잘 무르지 않도록 만든 제품이다.

원리는 간단하다(그림). 토마토의 유전자 중에서 토마토를 무르게 만드는 유전자를 찾아내고, 그 활동을 억제하는 새로운 유전자인 플레브 세이브를 만들어낸다. 이 억제 유전자를 박테리아의 작은 DNA가닥(플라스미드)에 붙이고 박테리아를 증식시키면 유전자의 양은 대폭 증가한다. 이를 토마토에 주입해 기름녀 무르지 않는 토마토가 자라난다.


(그림) 무르지 않는 토마토의 생성 원리^토마토를 무르게 하는 유전자(PG)를 추출하고, 이 유전자와 결합해 기능을 상실하게 만드는 새로운 유전자 플레브 세이브(FLAVR SAVR)를 합성한다. 플레브 세이브를 박테리아의 작은 DNA 조각인 플라스미드에 결합시킨 후 토마토씨에 삽입한다. 다 자란 토마토에서 플레브 세이브 유전자가 발현되면 PG의 기능이 억제된다. 즉 토마토는 물러지지 않는다.
 

유럽의 합의회의 - 시민이 참여하는 과학기술정책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유럽에서 새롭게 확산되고 있는 참여민주주의의 한 형태다. 과학기술정책의 입안 과정에서 과학기술과는 동떨어진 보통 사람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반영시키는게 목적이다.

합의회의는 1987년 덴마크에서 '농업과 산업에서의 유전공학의 적용'을 주제로 시작됏으며, 현재 많은 유럽의 나라들이 매년 1-2회의 합의회의를 개최한다. 최근에는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도 열리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 올해 처음으로 '유전자 치료'에 대한 문제를 안건으로 올려 행사를 치렀다. 국내에서는 '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전과 생명윤리'에 괂나 이번 행사가 첫 합의회의다.

합의회의에 이에 대해 답하기 위해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인다. 2회 정도의 예비모임에서 난상토론을 거쳐 구체적인 질문을 도출해낸다. 본회의에서는 2박3일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전문가와 집중적인 토의를 거친다. 마지막 날 최종적인 보고서를 작성해 시민의 합의 내용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회적으로 확산시킨다.

유럽의 경우 합의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정책을 만드는데 상당히 크게 반영된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의회에서 과학기술정책 법안을 상정할 때 시민이 작성한 권고안의 50-60% 정도가 최종적인 의사결정에 반영됐다고 한다. 덴마크의 경우 의회 산하의 덴마크기술국이 합의회의를 지원하고 있고, 영국은 과학재단에서 진행을 보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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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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