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오면 이제 사랑을 이루는 일만 남았군요." 첫눈은 과연 무엇이길래 우리는 그토록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할까. 해의 첫눈이란 늘 고난하고 후회스런 지난 시간을 덮어버리고 다시 하얀 시작을 알린다. 첫눈, 첫만남, 첫사랑... 처음이란 늘 가슴이 시린 추억과 생기를 만는 것이다.
강아지 세상
첫눈이 오면 사랑의 소원을 비는 일 말고도 할 일이 많다. 우선 첫눈을 받아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첫눈으로 세수를 하면 얼굴이 희어진다고 한다. 모두가 눈의 흰색에서 연상된 주술이겠지만, 첫눈을 세번 집어먹으면 1년 동안 감기가 얼씬 못한다는 속설처럼 추위를 피하지 않는 삶의 생기가 새삼 아름답다.
첫눈 뿐만 아니라 눈은 다 반갑다. 눈은 순식간에 일상의 풍경을 덮어버리고 새로운 천지를 개벽한다. 또한 고요를 머금은 포근함과 이국의 풍광이 그 속에 있다. 강아지들 또한 눈이 오면 팔짝팔짝 뛰면서 어쩔줄을 모른다. 강아지가 눈 자체를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눈이 올 때의 세상 풍경이 이채롭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개들의 눈은, 녹색과 검은 회색은 일부 알아본다고 하지만, 거의 완전한 색맹이다. 망막에 명암을 구분하는 간상체는 많지만 색깔을 구분하는 추상체가 매우 적어, 개들의 눈에는 세상이 온통 검은색과 흰색의 흑백사진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들은 근시라서 먼곳의 물체를 잘 식별하지 못하지만 움직임에는 대단히 민감하다. 해가 가려진 우중충한 날씨에 눈이 오면 개들에게는 컴컴한 배경에 새하얀 눈송이가 불똥처럼 흩날려 대단히 자극적인 풍경이 된다. 개들이 눈이 오면 어쩔줄 몰라 날뛰며 사방을 헤집고 다니는 이유다. 개들이 사람처럼 눈이 오는 것을 실제로 즐기는 것인지, 그저 생소하게 보이기 때문에 어쩔줄 몰라 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흰눈이 만들어낸 생경한 풍경에 마음이 움직인 것만은 사람과 매한가지다.
꽃잎이 부서지듯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의 시 '설야'의 일부다. 사락 사락 눈 내리는 소리를 먼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라고 했으니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다.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면, 그 소리의 정체는 바로 눈의 결정구조에 숨어있다.
눈 결정의 크기는 보통 2mm 정도로 돋보기로 보면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눈 모양 하면 흔히 가지가 여섯 난 별모양을 연상하지만, 눈에는 이러한 정규육화형 외에도 바늘모양, 기둥모양, 장구 모양, 콩알 같이 둥근 모양, 불규칙한 입체모양, 꽃잎이 열둘인 십이화형 등 수십가지의 다른 결정이 있고, 좀더 세밀하게 분류하면 3천종이 넘는 다양한 모양이 있다.
이들은 눈이 형성되는 대기층의 온도와 기압, 수증기량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으로 성장한다. 먼지 같은 응결핵이 없는 맑은 수증기는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더라도 얼지 않고 과냉각상태를 유지한다. 여기에 먼지입자들이 유입되면 이를 응결핵으로 해서 급격히 얼음결정이 성장해 눈이 된다. 기온이 영하 30℃보다 낮은 차가운 공기에서는 기둥모양 같은 단순한 모양이 많이 만들어지고 결정이 크게 성장하지 못한 채 싸락눈이 된다. 반면 영하 15℃ 근처의 상대적으로 따뜻한 공기에서 형성된 눈은 주로 예쁜 별모양이나 꽃모양 결정이 만들어고, 결정들이 주변의 결정과 결합하면서 더욱 성장해 함박눈을 만든다. 그러나 함박눈 송이는 결정들이 단단하게 뭉쳐있지 못하고 엉성하게 끝을 맞대고 붙어있다. 이들이 땅에 닿으면서 결정이 부서지고, 먼저 내린 눈의 결정을 부수고 하면서 사락 사락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인의 옷벗는 소리가 들리는 때는 틀림없이 함박눈이 내리는 밤이다. 옛 속담에 "가루눈이 오면 춥고, 함박눈이 오면 포근하다"고 했다. 이는 각각의 눈이 형성되는 대기층이 눈이 온 후의 기온변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준다. 싸락눈은 기온이 낮은 한랭한 공기에서 만들어지므로 눈이 온 다음 더 추워진다. 반면 함박눈은 기온이 상대적으로 높은 공기에서 만들어지므로, 함박눈이 오면 포근해진다. 또한 함박눈이 내리는 밤에는 대기가 안정돼 있기 때문에 바람이 쌩쌩 불고 들이치는 일 없이 고요함 속에서 눈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싸락눈이 내리는 혹한의 밤이었다면 이러한 시는 쓰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찰진 눈으로 눈싸움을
눈이 온 다음날 아이들에게는 눈싸움이 거의 필수다. 그런데 눈싸움을 하다보면 어떤 눈은 잘 뭉쳐지고 어떤 것은 잘 뭉쳐지지 않는다. 이는 눈에 섞인 수분의 차이 때문이다. 물기가 많은 눈은 단단하게 잘 뭉쳐지지만, 물기가 없이 푸석푸석한 눈은 잘 뭉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갓 온 눈 이라도 함박눈은 잘 뭉쳐지고 싸락눈은 그렇지 못하다. 싸락눈으로는 순식간에 눈덩이를 많이 만들 수 없을 뿐더러, 쉬이 부서져 버리므로 적군을 맞춰봐야 별로 타격을 주지 못한다. 해서 아예 눈뭉치를 물에 살짝 담그거나 눈뭉치 안에 조그만 돌멩이를 넣는 요령꾼들도 있는데, 이는 위험한 반칙이다. 눈싸움은 모름지기 눈처럼 하얗게 정정당당히 싸워야 한다.
그러니 우선 양지쪽을 점령해야 찰진 눈으로 눈뭉치를 빨리 만들고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양지의 눈은 햇볕에 살짝 녹아 수분이 많기 때문이다. 양지와 음지가 잘 구별되지 않을 때는 눈을 밟아보면 알 수 있다. 싸락눈이 쌓인 곳은 푸석푸석 하는 소리가 나고 발자국이 깨끗하게 찍히지 않는다. 그러나 함박눈이 쌓였거나, 약간 녹아서 물기가 있는 찰진 눈을 밟으면 포드득 소리가 경쾌하게 나면서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다.
눈사람을 만들 때도 찰진 눈을 써야한다. 이런 눈은 굴릴 때마다 땅바닦이 곱게 드러나도록 잘 뭉쳐져서 처음에는 주먹만한 눈덩이가 금새 사람 키만큼 커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흔히 작은 것이 순식간에 불어날 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한다. 지면에 10cm의 눈이 쌓였다고 하면, 눈을 한바퀴 굴릴 때마다 지름은 20cm씩 증가한다. 5바퀴면 지름 1m의 눈덩이가 되고, 10바퀴만 굴리면 지름 2m의 거대한 눈덩이가 돼 말 그대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양달 토끼와 응달 토끼
"응달 토끼는 살아도 양달 토끼는 못산다"는 겨울철 속담이 있다. 양달의 토끼는 건너편 응달을 보고 아직도 눈이 녹지 않은 한겨울인 줄 알고서 움직이지 않지만, 응달의 토끼는 건너편 양달에 눈이 녹은 것을 보고 봄이 왔다고 생각해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 응달토끼는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지만, 양달 토끼는 오히려 굶어 죽는다. 양지바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환경에 만족하면 안주하는 반면, 오히려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아간다는 교훈이다. 눈이 오는 날에 희망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