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질문] ‘말단(tip) 유전자’의 정체는?
동물의 머리부터 엉덩이까지를 하나의 축으로 보면, 축을 따라 다양한 기관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척추 역시 목뼈, 등뼈, 허리뼈, 엉치뼈, 꼬리뼈로 나뉘어져 있죠. 이러한 세포와 기관의 위치를 결정하는 유전자들 중 하나가 바로 ‘혹스(hox)’입니다. 그런데 2000년대 후반부터 혹스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이상한 기작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초파리 같은 무척추동물부터 쥐와 인간이 속한 척추동물까지 대부분의 동물은 혹스 유전자를 갖고 있습니다. 혹스 유전자가 생물체의 발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는데요. 혹스 유전자들은 독 특하게도 염색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지 않고 함께 모여 있습니다. 이를 ‘혹스 유전자 집단(hox gene clusters)’이라고 합니다.
더 신기한 것은 혹스 유전자 집단을 길게 늘어뜨리면 염색체에서의 위치와 몸에서 기능을 하는 위치가 상응한다는 점입니다.
유전자 집단에서 가장 앞쪽에 위치한 유전자를 hox 1, 그 뒤의 유전자들을 순서대로 hox 2, 3, 4 등으로 hox 13까지 번호를 매긴 뒤 이것들이 어디서 기능을 하는지 보면, hox 1은 머리와 가까운 부분에서 기능을 하고 hox 13은 머리에서 가장 먼 엉덩이 부분에서 기능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몸통에서 먼 손가락과 발가락 끝에서 hox 13이 발현됩니다.
혹스 유전자들은 몸의 구조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돌연변이로 인해 발현이 되지 않거나 엉뚱한 곳에서 발현되면 몸의 구조의 일부가 없어지거나 바뀌는 일이 발생합니다(과학동아 2017년 7월호 ‘머리는 왜 몸통 위에 달렸을까?’ 참조).
말단에 위치한 미스터리 유전자
혹스 유전자 그룹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던 차에 하워드 창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교수팀은 신기한 현상 하나를 발견합니다.doi:10.1038/nature09819 혹스 유전자 집단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유전자의 발현 정도를 낮추면 유전자 집단의 뒷 부분에 위치한 혹스 유전자들(HoxA 11과 HoxA 13)이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요.
닭의 배아의 경우에는 몸통에서 먼 쪽에 있는 날개뼈들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습니다(아래 사진). 연구자들은 이 유전자를 혹스 유전자 그룹의 가장 끝(tip)에 있다고 해서 ‘HOTTIP’이라고 명명했습니다.
HOTTIP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 투성입니다. 우선 이 유전자는 단백질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과거 생물학자들은 오랫동안 DNA에 새겨진 유전자가 RNA라는 중개물질을 거쳐 단백질로 발현돼야만 형질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는데요.
1990년대 초반부터 단백질을 만들어 내지 않는 ‘긴 비번역 RNA(lncRNA·long non-coding RNA)’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습니다. HOTTIP 역시 긴 비번역 RNA 중 하나로, 주로 배아의 꼬리부분을 비롯한 몸통의 먼 부분에서 발현됩니다만, 발현정도를 보면 세포 당 0.3개의 RNA가 있을 정도로 아주 작습니다.
그렇다면 HOTTIP이 어떻게 혹스 유전자 그룹의 발현을 돕는 것일까요. 창 교수팀은 혹스 유전자 그룹이 있는 DNA가 세포 안에서 여러 개의 고리 모양을 형성해 혹스 유전자들이 공간적으로 함께 모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위 그림). 게다가 유전자 발현을 돕는 단백질들이 HOTTIP의 RNA에 붙는다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정리하면 HOTTIP의 RNA가 생성되면 유전자 발현을 돕는 단백질들이 HOTTIP RNA에 붙어 혹스 유전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로 인해 혹스 유전자들이 발현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지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역할만 하는 줄 알았던 RNA가 이웃에 있는 유전자들이 제 역할을 하게끔 돕고, 그 덕분에 우리의 몸이 온전한 구조를 갖춘다는 얘기입니다.
[두 번째 질문] 통제 불능 유전자, 암 전이 돕는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몸통에서부터 팔다리의 말단까지 몸의 구조를 결정하는 혹스 유전자. 이들의 발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전자는 또 있습니다. ‘HOTTIP’과 유사한 듯 다른 ‘HOTAIR’를 소개합니다.
초파리의 유전체에는 혹스 유전자 집단이 딱 하나 존재합니다. 그러나 쥐나 인간의 유전체에는 복제 과정에 의해 생긴 혹스 유전자 집단이 4개나 존재합니다(HoxA, HoxB, HoxC, HoxD). 첫 번째 글에서 언급한 HOTTIP은 HoxA 그룹의 가장 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번 질문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HOTAIR 유전자도 HOTTIP만큼이나 중요한, 혹스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HOTAIR 역시 긴 비번역 RNA로, 단백질로 번역되지 않는 RNA를 만들어 냅니다. HOTAIR은 HoxC 집단에 위치합니다.
HOTAIR 없앤 쥐, 요추가 천추로 변해
HOTAIR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할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HOTAIR를 지우는 실험을 감행했습니다. HOTAIR가 없으면 혹스 유전자들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고, 몸의 구조가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워드 창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교수팀은 쥐의 유전체에서 HOTAIR 유전자를 없앨 경우, 여섯 번째 요추(L6)가 첫 번째 천추(S1)로 변형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아래 그림 1)
.doi: 10.1016/j.celrep.2013.09.003
이렇게 탄생한 돌연변이 쥐는 손목뼈도 정상과 달랐습니다. 돌연변이 중 절반(56%)이 손목뼈가 서로 붙었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아래 그림 2).
HOTAIR 돌연변이의 형질이 어떤 실험쥐를 사용 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는 연구결과가 있지만, HOTAIR 돌연변이 쥐에서는 공통적으로 몸 구조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창 교수팀은 HOTAIR 유전자가 제거된 쥐에서 혹스 유전자들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정상 배아와 HOTAIR 돌연변이 배아에서 혹스 유전자 발현 정도를 살펴봤습니다.
연구자들의 가설은 적중했습니다. 정상 배아 내에서는 발현되지 않는 HoxD 집단 유전자들이 HOTAIR 돌연변이 배아에서는 활발하게 발현됐습니다. HOTAIR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하는 역할을 해왔던 겁니다. 연구팀은 추가 실험을 통해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하는 단백질들이 HOTAIR 긴 비번역 RNA에 붙는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HOTAIR의 배신, 암 전이 촉진시켜
이 연구로 과학계는 그야말로 들썩였습니다. HOTAIR 유전자가 위치한 곳은 15번 염색체인데, HOTAIR가 발현을 억제하는 유전자들은 2번 염색체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HOTAIR 긴 비번역 RNA가 발현 억제 단백질들을 ‘태우고’ 목표로 삼은 유전자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이런 HOTAIR 유전자의 특성은 암 연구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앞서 소개한 창 교수팀은 유방암세포 중 33%가 정상 유방세포보다 HOTAIR를 125배 더 많이 발현시킨다는 데 주목했습니다.doi: 10.1038/nature08975 HOTAIR 유전자의 발현 정도가 높을수록 암이 전이 될 가능성도 높았습니다.
연구팀은 인과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일반적인 암세포와 HOTAIR 유전자를 많이 발현하는 암세포를 서로 다른 쥐의 꼬리에 주입한 뒤, 이 암세포들이 폐에 전이되는 정도를 비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 HOTAIR 유전자를 많이 발현하는 암세포를 주입했을 때, 일반적인 암세포를 주입했을 때보다 폐로 전이된 암세포의 수가 8~10배 많았습니다.
HOTAIR 유전자는 어떻게 암의 전이를 촉진시키는 걸까요. 과학자들은 HOTAIR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 발현을 억제하는 단백질들과 결합한 뒤, 암 전이를 막는 유전자에 붙어서 그들의 발현을 억제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제때에 꼭 필요한 곳에서 생성되면 우리 몸 구조를 완성시키지만, 암세포에서 발현되면 전이를 돕는 HOTAIR 유전자. 유전자 발현이 왜 제대로 통제돼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최영은_yc709@georgetown.edu
미국 바드대에서 생물을 전공하고 하버드대에서 발생학 및 재생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외우는 과학이 아닌 질문하는 과학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 과학교육에 발을 담그게 됐다. 현재 미국 조지타운대 생물학부에서 유전학, 발생학 등을 가르치며 새로운 대학 과학교육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