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 만든 망원경으로 별의 움직임을 관찰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증명한 인물 갈릴레이. 그 러나 1632년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회부돼 교황청으로부터 종신형을 선고받고 비극의 말년을 보냈다. 비록 나중에 형량이 줄어 자택에 연금돼 살았지만 갈릴레이로서는 큰 정신 적 충격이었다. 이때 가장 큰 위로를 준 사람은 그의 숨겨둔 큰딸 버지니아였다.
갈릴레이는 평생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한 여자 와 동거 생활을 하며 3명(1남2녀)의 아이를 낳아 길렀다.
어느날 갈릴레이의 학문적 업적에 감화를 받은 피렌체의 한 백작이 갈릴레이에게 자신의 마을에 와달라고 요청했다. 갈릴레이는 아내와 아들은 남겨둔 채 두 딸을 데리고 피렌체로 떠났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탓에 갈릴레이는 아이들의 존재를 숨겨야 했다. 아이들은 갈릴레이 어머니 손에서 몰래 키워졌다.
딸들이 자라자 갈릴레이는 이들을 피렌체의 한 수녀원에 보냈다. 사생활의 비밀이 보장되는 장소 로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녀원의 재정 형편이 어려운 탓에 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생스럽게 생활했다.
불행하게도 동생은 자주 앓다 일찍 숨졌다. 하지만 큰딸은 건강하게 자라나 아버지에게 애정 어린 편지를 수백통 보내며 헌신적인 애정을 표했다.
1631년 갈릴레이는 딸과 더 가까이에서 지내려고 수녀원 근처로 집을 옮겼다. 그러던 중 지동설 발언 문제로 갈릴레이는 체포돼 감옥에 감금됐다. 이때도 큰딸은 매일 편지를 쓰며 갈릴레이를 위로했다.
1633년 말 갈릴레이는 형량이 줄어 피렌체로 돌아왔다. 하지만 자택연금 때문에 집밖에 나갈 수 없었다. 더욱이 시력이 약해져 실명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형벌로 일주일에 한번씩 죄를 뉘우치는 '속죄 시편'을 암송해야 했다.
이때 가장 큰 위로를 준 사람은 역시 큰딸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매일 아버지를 생각하며 시편을 암송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다 몇개월 후 큰 딸이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 갈릴레이는 딸의 죽음에 대해 "살아있다는 일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고통스럽다"라고 표현하며 깊은 실의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