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시계, 계산기, 면도기, 보청기, 인공심장, 자동차, 삐삐, 워크맨, 카메라, 휴대폰, 캠코더, 노트북컴퓨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쉽게 이동할 수 있으며, 이들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모두 전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전지가 없다면 무슨 일들이 벌어질까. 아마도 통신대란이 일어날 것이다. 또 집에서는 무선전화기로 통화하고, 리모콘으로 TV를 켜던 습관이 일순간에 바뀌어야 한다. 과거 장난감이나 동작시키는 것쯤으로 인식돼 온 전지가 이제는 세계를 움직이는 심장 역할을 한다고 해도 지나친 비유는 아닐 것이다. 이는 반도체, LCD, 전지가 21세기의 정보통신사업을 주도할 3대 핵심전략 산업으로 거론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의 두뇌에 비유되는 반도체, 눈은 LCD에, 그리고 심장을 일컫는 전지. 이 중에 심장으로 비유되는 전지가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급부상하고 있다. 전지산업은 이동통신뿐만 아니라 전기자동차, 항공우주산업, 신에너지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수출시장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전지가 이렇듯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세계 전지시장의 급성장과 관련돼 있다. 또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인들을 위한 이동통신의 발달도 무관하지 않다.
현재 세계전지시장의 규모는 군수용과 우주용의 특수전지를 제외하고 약 3백50억달러로 추정되고 있다. 전기자동차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는 2005년경에는 1천억달러 이상의 거대시장이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향후 세계 전지시장이 전자제품의 소형, 경량화 추세에 맞춰 1차전지(한번 쓰고 버리는 전지)보다는 2차전지의 수요가 증가하고, 2차전지 중에서는 고용량의 리튬2차전지가 주로 소비될 것으로 전망한다.
국내의 전지시장도 96년도에 총 4천2백억원 규모를 형성했는데 이중 1차전지는 1천5백억원, 2차전지는 2천7백억원 규모다. 97년에는 이미 6천억원 규모를 넘어섰다는 보고가 있으며, 리튬이온전지가 소형전지 시장의 선두로 부상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국내외 전지시장에서 소형 2차전지가 급팽창하는 추세를 보이는 가운데 각국의 전지 업체들은 신형 고성능 전지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소형 2차전지의 국내생산은 극히 미약하다. 특히 신형전지인 리튬이온전지는 아직 국산 제품을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휴대폰 전지는 일본산 리튬이온전지다. 다행히도 삼성전관이 리튬이온전지를 자체 개발해 올해 10월부터 적은 양이지만 월 5만개씩 휴대폰과 노트북 PC 생산업체에 공급하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현재 세계 소형 2차전지 시장의 70-90%는 일본이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1차전지에 강세를 보여왔던 미국, 독일, 프랑스 등도 2차전지 시장에서는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멀티미디어 기기에서 차지하는 전지의 가격과 무게비율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그림1,2) 뒤늦은 출발이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각국은 2차전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이 전지시장에 대한 안목을 일찌감치 갖고서 투자한 시간과 노력을 고려하면 당분간 일본의 독주는 계속될 전망이다.
기본 원리는 산화환원반응
각국의 뜨거운 열기로 미루어 봐 21세기는 배터리전쟁의 시기가 될 것이다. 도대체 전지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것일까. 전지는 한마디로 화학적인 에너지를 전기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 화학적이라 함은 물질의 산화환원 반응을 가리킨다. 여기서 산화는 전자를 잃는 반응, 환원은 전자를 얻는 반응이다. 즉 산화환원 반응을 통해 전자가 이동하면서 전류가 흐른다.
일반적으로 화학전지는 이온화경향이 다른 두 금속(전극)을 전해액(이온을 잘 이동시키는 액체나 점성물질)에 담가 놓고 두 금속을 도선으로 연결해 전류가 흐르는 원리를 이용한다. 이온화 경향이란 어떤 물질이 전자를 내놓고 양이온이 되려는 성질을 말한다. 금속은 저마다 다른 이온화경향을 갖는다. 전극은 (+)극과 (-)극이 있는데 이온화 경향이 큰 물질을 (-)극으로 삼는다. 즉 전자를 쉽게 내놓는 금속이 음극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건전지인 아연-망간 전지에서 아연이 음극으로 사용되는 이유도 아연이라는 금속의 이온화경향이 다른 금속에 비해 크기 때문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양극으로 사용되는 물질은 대체로 산화물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양극에서는 전자를 받아 환원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산화물이 필요한 것. 또 양극 집전체라는 이름으로 탄소봉을 사용한다. 집전체란 전기를 모으는 물체란 뜻이다. 즉 건전지에 들어 있는 탄소봉은 전지의 생명과 같은 전극이 전해질 속에서 잘 반응해 전류를 잘 통하게 만들어 준다. 탄소봉을 사용하지 않고 망간산화물을 그대로 양극으로 사용하면 망간이 충분히 반응하지 않는다. 이는 곧바로 전지용량의 감소로 연결된다.
1차전지의 한계
1번 사용하고 버리는 전지인 1차전지의 대부분은 음극으로 아연을 사용한다. 흔하기 때문에 값싸고 이온화경향이 커서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충전해서 쓸 수 있는 2차전지들의 음극으로 아연이 사용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연이 다른 어떤 금속보다 음극으로 적당하지만 충전 시에 형태가 변형되고 아연극 주변에 불순물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2차전지의 전극에는 충방전 특성이 우수한 금속을 사용한다. 근래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리튬이온전지의 리튬이다. 리튬은 지구상에서 가장 가벼운 금속이다. 따라서 무게당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가장 많다. 이를 두고 에너지 밀도가 크다고 한다. 에너지 밀도는 새로운 전지를 개발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점을 두는 측면이다. 또 휴대 통신에서 중요한 것이 전지의 무게다. 누구든 무거운 기기보다는 같은 성능이라면 가벼운 것을 택할 것이다. 실제로 멀티미디어 기기의 전지 무게 비중을 점점 낮추는 것이 추세다.
근래 들어 이동통신이 발달하면서 에너지 밀도와 함께 순간적인 출력밀도도 중요하게 간주된다. 예를 들어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 없지만 통화시 정확하게 음질을 전달할 때 필요한 것이 높은 출력 밀도다. 또 노트북 PC를 구동시킬 때 동영상을 보거나 특정 프로그램을 빨리 구동시킬 때도 출력 밀도가 좌우한다.
2차전지 꽃피운 리튬
리튬이온전지의 리튬은 열로 손실되지 않고 에너지로 쓰이는 에너지 효율이 90% 이상이다. 2차전지 시장에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온 니켈-카드뮴 전지의 니켈도 에너지 효율이 70% 정도밖에 안된다. 니켈-카드뮴 전지는 워크맨 등의 전원으로 오랫동안 이용됐는데 메모리효과(완전히 방전하지 않고 충전하면 남아있던 에너지를 못 쓰게 돼 결과적으로 전지용량이 점점 줄어들게되는 효과) 때문에 사용이 불편했다. 하지만 리튬을 전극으로 하는 전지는 메모리효과가 없어 에너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휴대폰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리튬이온전지를 충전할 때는 메모리효과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리튬이 전극으로서 완전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들어서야 리튬이 전극으로 쓰인 것만 봐도 뭔가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분과의 반응성이다. 리튬은 알칼리 금속으로 수분과 폭발적으로 반응한다. 실제로 1980년 만들어진 리튬-이산화망간 전지가 폭발함으로써 전극으로서 리튬의 가능성이 땅에 묻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유기전해액 속의 리튬을 3중 안전장치 내에서 반응할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2차전지의 새 장을 열게 됐다.
3.6V가 최대 전압
1개의 전지로 최대 몇 V의 전압을 얻을 수 있을까. “전지기술도 이제 많이 발달했으니 1백V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1개의 전지로 얻을 수 있는 전압은 고작 1.2V-2.1V였다. 그나마 리튬이온전지가 개발되면서 3.6V의 전압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1개의 전지가 갖고 있는 전압은 지구를 통틀어 일정한 것일까.
우선 전지의 전압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아보자. 전지를 사서 표면을 보면 1.5V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지를 구성하는 두 전극은 전해액에서 반응함으로써 생기는 고유의 전위차를 가진다. 이 때 두 전극의 전위차를 합한 것이 전지 고유의 전위차가 된다. 건전지를 예로 들면, 음극에서 아연이 산화되면서 생기는 전위차(산화전위, 0.76V)와 양극에서 이산화망간이 환원되면서 만들어지는 전위차(환원전위, 0.80-1.1V)의 합이 건전지의 전압(1.56-1.87V)인 것이다.
따라서 전극이 바뀌지 않는 한 전지를 아무리 크게 만든다 해도 전압은 바뀌지 않는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1회용 건전지인 알칼리 전지도 전압을 높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알칼리 전지는 전해액을 알칼리성 액으로 함으로써 아연의 이온전도도를 최대로 증가시킨 것이다. 따라서 전지의 수명이 증가한 것이지 전압은 기존의 아연과 이산화망간을 사용한 건전지와 다를 바 없다.
1개의 전지가 나타낼 수 있는 최대 전압이 3.6V라는 사실이 참 흥미롭다. 우주시대를 개척한다는 마당에 말이다. 물론 이보다 더 높은 전압의 전지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불안정해 상용화될 수 없다. 이것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화학에너지가 일정한 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화학반응 속에서도 리튬이 산화될 때 만들어지는 전위차는 고유하다는 이야기다.
더 높은 전압을 얻기 위해서는 전지를 적당히 직렬로 연결해야 한다. 노트북 PC의 전지를 살펴보면 19.5V 이상의 전압이 표기돼 있다. 이것은 19.5V 전지 1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3.6V 전지를 여러 개 연결해 한 팩으로 만든 것이다.
살아 숨쉬는 생명체
전지는 살아 숨쉬는 생명체와 같다. 충전과 방전을 거듭하면서 체적이 줄었다 늘었다하는 것은 생명체가 숨을 쉬는 것과 같고, 전지용량이 줄어드는 것은 생명체의 노화 현상과 유사하다. 또 지나치게 힘을 쓰거나 반대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으면 수명이 저절로 단축되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이렇게 살아 숨쉬는 생명체와도 같은 전지가 오늘날 그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예견된 것이리라.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여기에 발맞추는 정보통신의 심장 전지의 박동소리가 들린다. 21세기 배터리 전쟁은 시작됐다. 1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1차전지에서 충전해 쓸 수 있는 2차전지로, 단순한 건전지에서 수명을 크게 증가시킨 알칼리 건전지로, 1.2V의 전압에서 고용량의 3.6V의 리튬이온전지로, 그리고 이제 다시 안정성과 가공성, 그리고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리튬폴리머전지로 전지의 역사는 거듭나고 있다. ‘크기는 더 작게, 용량은 더 크게, 수명은 더 길게’란 목표를 향해 오늘도 세계 각국의 연구소 불빛은 꺼질 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