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해안 샌프란시스코 남단에서 새너제이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실리콘밸리. 저마다 첨단기술과 아이디어를 앞세운 수많은 벤처기업이 명멸(明滅)을 거듭했던 곳이다. 사과 모양의 로고로 유명한 애플컴퓨터, 인터넷 검색엔진의 대명사인 야후를 비롯해 수많은 컴퓨터와 첨단기술의 신화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패기와 기술에 대한 열정 하나로 하이테크놀러지 시대를 이끌어가는 젊은이들의 땅. 첨단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억만장자가 될 수 있는 '기회의 땅'이 바로 실리콘밸리다. '하이테크의 메카'로 자리잡은 실리콘밸리는 21세기 엘도라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탄탄한 기술력을 가진 모험심 많은 젊은이들이 실리콘밸리로 향한다. 최근 그 기나긴 행렬에 한국의 젊은이들도 잇달아 합류하고 있다.
5월 12일 오후 샌프란시스코에 여장을 푼 필자는 곧바로 실리콘밸리 취재를 위해 새너제이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 101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한시간을 가면 새너제이가 나온다. 서니베일, 쿠퍼티노, 마운틴뷰 등을 지나 도착한 새너제이는 최근 '실리콘밸리의 수도'로 불리며 대외 활동을 가장 활발히 하는 곳이다.
1인 오피스 시대를 거쳐
새롬기술 미주법인을 이끌고 있는 안현덕 부장은 96년 7월 미국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선 발대가 돼 혈혈단신 태평양을 건넜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둘. 그의 미국행은 국내 중소벤 처기업 가운데 거의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실리콘밸리 지역에는 삼성, 현대, LG 등 대기업의 계열사나 현지법인만 '영업활동'을 벌이고 있을 뿐 순수 중소기업의 진출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도미(渡美)후 1년 남짓 안부장은 말 그대로 '1인 오피스 시대'를 보냈다. 외로운 이국땅에 서 그는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 했다. 지난해 말 본사에서 7명의 엔지니어가 지원될 때까 지 시장 분석과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데 비지땀을 쏟았다. "45평이라는 공간이 크게만 느껴졌지요. 조금 크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바이어들을 상대로 어깨를 펴고 영업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지요."
새롬기술은 왜 미국시장, 특히 실리콘밸리에 진출해야 했을까. 안부장은 미국으로 진출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 시장의 규모는 국내의 10배가 넘습니다. 이곳에서 10%만 차 지해도 국내 시장 전체와 맞먹는다는 얘기죠." 그러나 좁은 국내시장에 매달릴 필요가 있겠 느냐 하는 것이었다. 한국시장이 좁다고 느끼는 중소기업이라면 전력을 투구해볼 만한 가치 가 충분하다는 얘기다.
요즘 한국에서 논의가 활발한 '현지화'에 대한 그의 생각은 '과격하다' 싶을 정도다. "미주 법인이 커지면 한국에 남아있는 본사를 흡수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과는 오히려 정반대죠. 기업합병(M&A)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건만 좋다면 엔지 니어의 입장에서 전혀 마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새롬기술은 미국 진출을 위해 모두 1백20만달러를 투자했다. 그러나 이 회사의 미주법인 은 지난해까지 비용만 들어가고 매출은 '제로'였다. 올해 처음으로 올리게 될 예상 매출액은 20만달러. 미주법인 사람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시대를 맞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본 사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정부가 만든 인큐베이터
미국생활 3주째인 아블렉스의 김정호씨는 실리콘밸리에 대해 예찬론을 폈다. "실리콘밸리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경쟁업체도, 협력업체도 바로 이웃에 자리잡고 있지 요. 중소 벤처기업에게 자금을 대주는 벤처캐피탈은 물론, 물건을 구매하는 고객들도 수두룩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기술을 서로 존중해주는 분위기입니다. 한국에선 중소기업이 특별한 기술을 개발했다고 하면 '베낀 것 아니냐'든가, '외국에서 이미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해 개발을 포기한 기술이 아니냐'는 식으로 우선 깎아내리는 분위기입니다. 이곳에선 전혀 그런 일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주목받는 업체는 디지털캐스트다. KSI의 장민호과장은 "디지털캐스트가 조만간 큰 일을 터뜨리고 말 것"이라고 귀뜸했다. 디지털캐스트는 반도체 기술을 응용해 '테이프가 없는 카세트'라는 신개념의 녹음기, 실리콘 플레이어로 세계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디지털캐스트의 심영철 과장은 "한국에서 실리콘 플레이어를 대기업에 선보였을 때 반응을 잊을 수 없습니다. 대뜸 워크맨을 팔아본 경험이 있느냐고 질문하더군요. 하지만 이곳 바이어들은 제품을 보더니 다들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칭찬하더군요."
정글의 법칙
'벤처의 천국'이라는 이 지역 벤처기업 가운데 부와 성공의 상징인 미국 증권시장에 상장되는 경우는 불과 5% 미만이다. 더구나 미국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미국시장을 노리고 각국의 내로라하는 벤처기업들이 몰려들어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고 한다.
최근 실리콘밸리 지역에 새로 사무실을 내려면 최소한 몇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갑자기 사람이 불어나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교통 체증'이라는 단어도 생겨났다. 물가도 미국 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올랐다.
그런데 요즘 실리콘밸리라는 명성만 믿고 아무런 준비없이 찾아오는 한국기업도 심심치 않다. 심지어 한달 비자만 가지고 미국에 입국한 경우도 있었다. 실리콘밸리는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라는 얘기다. 취재 중에 만났던 한 중소기업인은 "도대체 왜 실리콘밸리로 몰려드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푸념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훨씬 싸고 쾌적한 환경에서 미국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더구나 올해 들어 사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침체된 국내경제 탓에 한국 벤처기업의 경우 본사에서 충분한 지원은 꿈도 못 꾼다. 오히려 본사가 어려워 미국 진출 계획을 백지화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기업인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받던 월급만 가지고 겨우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
새너제이에서는 최근 건물 임대료가 1년 사이에 40% 이상 올라 생활고가 가중되고 있다. KSI에 들어간 한 중소기업인은 사무실을 임대하지 못하고 그 대신 한달에 몇백달러 하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곳의 벤처기업 관계자들에게서 '절망'이라는 단어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들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가득차 있다. 그들은 "마케팅과 기획력은 미국에 비해 다소 처지지 만 기술 하나만은 우리(한국인)가 최고"라며 입을 모은다. 저마다 빛나는 내일을 위해 묵묵 히 칼을 갈고 있는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어떤 곳인가?
"도대체 계곡(밸리)이 어디 있다는 얘기야?" 실리콘밸리 지역에 처음 도착한 이방인들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기 마련이다. 좁은 계곡을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실리콘 계곡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넓다. 그러나 미국인의 눈에는 새너제이에서 팔로알토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곳(세 로 50km, 가로 15km)이 좁은 계곡처럼 보였을 것이다.
1938년 스탠포드대학를 졸업한 빌 휴렛과 데이브 팩커드가 팔로알토에 그 유명한 휴렛팩커드사를 설립하면서 실리콘밸리의 신화는 시작됐다.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은 초창기에 주로 반도체와 관련된 회사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실리콘밸리가 첨단 기술과 벤처기업의 대명사로 군림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인재가 풍부하다. 스탠포드대학, 버클리대학, 새너제이대학 등 첨단 기술에 관한 한 미국 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대학들이 즐비하다. 기술 개발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며칠 밤을 세울 각오가 돼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언제나 넘쳐난다.
교통이 편리한 것도 커다란 장점이다. 실리콘밸리 지역은 샌프란시스코만을 끼고 태평양과 접해 있는 미국 서부의 교통 요충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곳을 첨단기술의 메카로 만든 것은 전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젊은이들의 열정이었다. 그들은 기술 하나로 부와 명예를 얻었던 수많은 신화를 보고, 그 신화를 다시 꿈꾸며 이곳을 왔다. 그들의 열정이 말 그대로 시너지 효과를 냈던 것이다.
실리콘밸리 지역에선 미국이 옛소련과 주도권 경쟁을 벌이던 60년대를 즈음해 방위산업과 항공산업이 크게 번성했다. 이들 산업이 젊은이들의 시선을 실리콘밸리로 향하게 하는 커다 란 동력이 됐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