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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무엇이 환경호르몬인가

생활주변에 70여종

최근 유럽연합은 폴리염화비닐(PVC)로 만든 장난감 제품이 인체에 유해한지에 대해 본격적인 검토작업에 들어갔다. 유럽연합 산하 '독성·생태독성·환경에 관한 과학위원회'는 3세 이하의 아이가 이 장난감으로 놀 때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이가 장난감을 빨 때 두가지 유해화학물질(DEHP, DINP)이 PVC로부터 녹아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미치는 영향이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만, 쥐의 경우 간과 콩팥에 심한 손상을 입힌다는 점이 실험적으로 밝혀진 물질들이다. 현재 네덜란드에서는 성인을 대상으로 8월까지 위해성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사실 장난감을 비롯한 PVC 제품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그린피스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계속 경고해 온 사항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처럼 국가 차원에서 규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이런 움직임은 최근 국내외에서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환경호르몬 공포'와 무관하지 않다. PVC에 포함된 유해물질들은 동물과 사람의 내분비계를 교란시키고 있는 환경호르몬의 일종이다.
 

산업폐수로 오염된 강. 폴리염화비닐(PCB)은 산업폐수에서 많이 검출되는 환경호르몬이다.


34명 젊은이 중 1명만 합격

'환경호르몬'이란 말은 '환경'에 노출된 화학물질이 생체 내로 유입돼 마치 '호르몬'처럼 작용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작년 5월 일본학자들이 NHK 방송에 출연했을 때 처음 등장한 용어다. 학술 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용어는 내분비교란물질(endocrine disruptor).

환경호르몬의 종류는 광범위하다.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환경호르몬의 위해성을 지적하기 시작한 세계야생보호기금(WWF)은 자연에 노출된 환경호르몬의 종류를 67종으로 선정했다. 이를 크게 농약류(43종)와 합성화합물류(24종) 두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농약류는 대부분 자연계에 오랫동안 잔류하는 특성을 가진 염소(Cl)를 포함한다. 보통 반감기가 2-12년인데, 최대 59년에 이르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DDT. 1940년대 초 살충제로 사용돼 농업 생산을 크게 증가시키고, 모기를 박멸해 학질이나 황열병으로부터 수백만 생명을 구했지만, 여기저기서 피해가 속출하자 1970년대에 사용이 금지된 물질이다. 같은 시기에 알드린, 일드린, 클로르단과 같은 농약 역시 비슷한 이유로 사용이 금지됐다.

한편 합성화합물류는 농약류를 제외하고 각종 산업계에서 파생하는 유해화학물질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다이옥신은 제초제를 만들 때 부산물로 발생하거나, 소각장에서 피복전선이나 페인트처럼 유기염소계 화합물을 태울 때 생성되는 대표적인 환경호르몬이다.

또 폴리염화비닐(PCB)은 전기나 열의 전달을 막는 절연유의 원료인데, 변압기나 콘덴서를 비롯해 거의 전 공업분야에 이용된다. 주로 산업폐수에서 많이 검출되며,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낙동강을 오염시키는 주범으로 인식되는 물질이다. 이외에도 계면활성제로 사용되는 페놀류나 선박의 도료로 사용되는 트리부틸주석(TBT)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러나 67종이란 수는 어디까지나 현재까지 알려진 화학물질 중에서 색출된 것일 뿐이다. 매년 수십만종 이상의 화학물질이 실험실에서 합성되고 있기 때문에 자연계에 얼마나 많은 수가 존재하는 지 아무도 모르는 실정이다. 또 학자에 따라서 환경호르몬의 종류는 다양하게 구분된다.

일본의 경우 독자적으로 환경호르몬을 1백43종으로 선정했다. 미국은 주별로 규제물질의 종류가 다양하다. 그래서 67종에서 제외된 수은이나 카드뮴 같은 중금속류가 환경호르몬에 포함되기도 한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환경호르몬의 수가 얼마나 늘어날지 예측하기 어렵다.

환경호르몬이 생체를 공략하는 부위는 무차별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르몬계는 생명체의 거의 모든 생리기능에 관여하는 가장 중요한 조절시스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들어 환경 호르몬이 생식기능과 면역기능을 약화시키고, 행동 이상을 일으키며, 암 발생률을 높인다는 점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세인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모은 주제는 최근 세계 곳곳에서 보고 되고 있는 생식기능의 이상이다.

지난 4월 일본 국립의약품식품위생연구소 독성부는 자국에서 시판중인 컵라면 용기를 비롯한 25종류의 폴리스틸렌 용기에서 위험한 수준으로 우려되는 독성 물질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비슷한 시기에 한 대학교 의학부에서 20대 남성 34명의 정액을 조사한 결과 정자의 농도와 운동성이 세계보건기구(WHO)의 기준을 충족시킨 사람은 단 1명뿐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전해졌다.

이미 몇년 전 부터 유독성 화학물질 때문에 남성의 정자가 계속 줄고 있다는 점이 세계적으로 인식되던 터였다. 일본 열도는 순식간에 '환경호르몬 공포증'에 휩싸였다. 화학물질 관련제품 판매량이 급감하고, 비닐랩이나 플라스틱컵 사용량이 크게 줄었다.

여성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작년 말 미국 버팔로대학 병역학자들은 온타리오호에 서식하는 오염된 물고기를 먹으면 여성의 월경주기가 짧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또 임신 기간이 지체될 가능성도 지적했다. 실험 대상은 낚시꾼의 부인이나 여성 낚시꾼 2천여명. 물 고기를 오염시킨 물질은 다이옥신과 PCB로 알려졌다. 물론 발표가 나가자 임신기에 접어든 여성은 절대로 이 호수에서 잡힌 물고기를 먹지 말라는 경고가 내려졌다.
 

환경호르몬이 유입되는 경로는 다양하다. 매일 숨쉬는 공기에서도 환경호르몬이 침입할 수 있다.


대머리독수리 수컷이 빈둥거린 이유

그러나 더 놀라운 점은 생식기능이 단순히 약해지는 현상을 넘어 아예 성 자체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일이 자연에서 벌어진다는 점이다. 미국 플로리다주의 가장 커다란 호수인 아포프카호는 악어의 천국으로 알려진 천혜의 습지대다. 1980년대 야생동물 연구자들은 악어사육 산업을 위해 악어 알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악어알이 태부족이란 점이 드러났다. 그나마 발견된 알의 부 화율은 겨우 18%에 불과했다. 더욱 불행한 일은 부화된 새끼 악어 중 절반이 10일 이내에 기력을 잃고 죽었다는 점.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연구자들은 호숫가에서 수백m 떨어진 화학공장에서 살충제(DDE)가 흘러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 살충제의 영향으로 악어 수컷의 음경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점을 밝혔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사실은 암컷화된 수컷이 발견된 점이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을 거의 생산하지 못하는 한편 오히려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의 수치가 정상보다 몇배 높게 나타났다.

반대로 여성이 남성화되는 경향도 곳곳에서 발견됐다. 1980년대 초 영국과 프랑스에서 참굴 암컷에 수컷 생식기인 페니스가 달린 기현상이 보고됐다. 원인을 일으킨 주범은 TBT. 선박 밑부분에 생물이 달라붙지 못하도록 페인트에 섞어 사용되는 부착방지제의 원료다. 이후 이 현상은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활발히 연구됐으며, 최근에는 국내 남해안에서도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환경호르몬의 영향은 비단 생식기능에 멈추지 않는다. 캐나다 퀘백주 북부의 이누잇 에스키모족의 경우 현재 어린이들이 면역력이 떨어져 호흡계 질환과 중이염에 시달리고 있다. 조사 결과 타지역에 비해 모유에 PCB의 농도가 7-10배 높다는 점이 밝혀졌다.

한편 1950년대 미국 플로리리다주 서해안에서 대머리독수리의 3분의 2가 짝짓기에 무관심한 행동을 보였다. 이들은 어떤 구애의 몸짓도 하지 않으며 그저 '빈둥거렸다.' 후에 DDT를 비롯한 여러 오염물질을 먹이를 통해 섭취한 탓에 성행동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추정됐다.

1990년대에는 DDT와 PCB에 노출된 여성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학계에 처음 보고됐다. 그래서 의학자들은 생식기와 관련된 각종 암(전립선암, 고환암, 자궁암 등)의 원인 중 하나를 환경호르몬으로 지목하고 있다.

환경호르몬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생명체를 괴롭히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정확히 밝혀진 설명은 거의 없다. 단지 몇가지 가설이 존재할 뿐이다. 대표적으로 환경호르몬이 체내 천연호르몬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모방설, 그리고 천연호르몬의 작용을 방해한다는 봉쇄설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가설이 존재하지만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상황이다.

환경호르몬이 생명체에 유입되는 경로 역시 추측하기 어렵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나 물은 물론이고 매일 식탁에 오르는 음식, 그리고 음식을 포장하고 담는 용기 등 생활의 모든 구석에서 환경 호르몬의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염원으로부터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다 해도 안심할 수 없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사용이 규제된 DDT가 몇십년 후 5대호와 워싱턴주 콜롬비아강에서 발견됐다. 이곳에 서식하는 어류와 흰머 리독수리의 몸에 고농도로 농축된 것이다. 조사 결과 아시아의 저개발국에서 사용되는 것이 '바람 을 타고' 날아왔다는 점이 밝혀졌다.

한편 환경호르몬의 체내 축적양이 먹이사슬을 통해 대폭 증가한다는 점이 놀랍다. 한 예로 미국 5 대호 생물들의 PCB 축적양을 비교해보자. 5대호 물에서는 PCB의 농도가 너무 낮아 거의 검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식물성 플랑크톤의 경우 이보다 2백50배 높은 양이 검출됐고, 동물성 플랑크톤 은 5백배, 이들을 먹고 사는 갑각류는 4만5천배, 갑각류의 천적인 빙어는 83만5천배, 그리고 급기야 빙어를 잡아먹는 재갈매기에 이르면 농도가 2천5백만배까지 증폭된다고 한다. 물이 '깨끗하다'고 해서 환경호르몬의 손아귀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한국은 '국제 농약 시험장'

국내의 경우 환경호르몬에 대한 관심은 얼마 전 일본 젊은이들의 정자수가 감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폭 증가했다. 그러나 사실 정자수가 줄어들었다는 점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하나의 에피 소드에 불과할지 모른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생태계 자체가 교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정규 박사(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책임연구원)는 "환경호르몬이 인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례에만 관심을 모아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예를 들어 동물의 생식기능이 떨어지면 그 종은 머지 않아 사멸될 것이고, 결국은 생태계의 혼란을 초래해 인간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칠 것"임을 강조한다. 현재와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몇세기 내에 대부분의 동물이 불임 상태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박정규 박사는 "우선 어떤 물질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기초적인 자료를 모으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국내에서 이런 데이터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이영순 교수(서울대 수의과대학)는 "특히 농약의 경우 한국은 국제 약효 시험장 수준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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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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