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임신했을 때 가족이 갖는 가장 큰 관심의 하나는 뱃속 아이가 아들일까 딸일까 하는 문제다. 요즘은 많이 바뀌었지만 여자아이를 낳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로부터 ‘미운털’이 박히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사내아이를 낳지 않은 일을 며느리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척 ‘비과학적’ 생각이다. 아기의 생물학적 성이 결정되는 것은 아버지의 성염색체(XY) 중에서 어느 것이 어머니의 성염색체(XX)와 만나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아버지의 X염색체를 지닌 정자가 난자와 만나면 아기는 여성(XX)으로 결정되고, Y염색체를 가진 정자가 수정을 이루면 남성(XY)이 태어난다. 이를 ‘1차 성결정’이라고 부른다. 이 우연스런 과정을 마치 여성의 잘못인 양 책임을 묻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염색체 Y의 정체
만일 비정상적으로 수정이 이뤄져 XXXXY 유전자를 갖는 아기가 태어났다고 하자. 이 아기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일까 여성일까. 남성이다. 아무리 X염색체가 많더라도 Y염색체가 있으면 남성으로 결정된다. 도대체 Y염색체가 어떤 존재이길래 이런 일이 벌어질까.
임신 초기에 태아는 비록 유전적으로 남녀가 정해지지만 생식기는 남녀의 것 모두를 가지고 있다. 여성 생식기의 원시 형태인 뮐러관, 그리고 남성 생식기의 원시 형태인 볼프관이다(그림).
이 두가지 기관은 임신 9주경에 비로소 어느 한쪽이 발달하고 다른 한쪽은 퇴화되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여기서 뮐러관을 퇴화시키고 볼프관을 발달시키는, 즉 남성의 생식기를 갖추도록 만드는 주인공이 바로 Y염색체 끝부분의 ‘SRY 유전자’다.
SRY 유전자가 작동을 시작하면 정자를 만들어내는 조직인 정소가 만들어진다. 정소에서는 남성 생식기가 갖춰지도록 두가지 ‘특공대’가 조직된다.
먼저 AMH라는 단백질은 뮐러관을 퇴화시켜 남성에게서 여성 생식기가 분화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한다. 한편 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과 그 유사체인 디하이드로테스토스테론(DHT)은 볼프관이 부정소, 세정관, 저정낭, 음경과 같은 남성 생식기관으로 분화되도록 만든다. 이를 ‘2차 성결정’이라고 부르며, 다른 말로 ‘제1차 성징’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여성의 경우는 어떨까. 기본 원리가 비슷하다. 여성 태아에서는 SRY 유전자가 없는 대신 X염색체에 DAX1 유전자가 있다. 이 유전자가 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난자를 생성하는 난소가 만들어지고,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생성되며, 볼프관이 퇴화되고, 뮐러관이 자궁, 수란관, 질과 같은 여성 생식기관들로 분화된다.
만일 성호르몬의 작용에 이상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흰쥐나 원숭이를 사용한 실험에서 출생 직전이나 직후에 암컷 새끼에게 테스토스테론을 과도하게 투여하면 뇌의 ‘남성화’가 발생한다. 그 결과 어느 정도 성장해도 배란이 일어나지 않고, 마치 수컷처럼 암컷의 등에 올라타는 교미행위를 보인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최근 영국의 하천에서 잡힌 잉어들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환경오염물질에 노출된 수컷에게서 정소의 구조가 암컷의 난소와 유사하게 변해버리고 심지어 알까지 가진 개체도 발견돼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많은 학자들은 오염물질의 구조가 여성호르몬의 구조와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플라스틱과 같은 물질을 태울 때 발생하는 다이옥신을 비롯한 오염물질의 구조가 에스트로겐과 비슷하게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잉어 수컷은 본의 아니게 과도한 여성호르몬에 노출돼 생식계통에 변화가 일어났을 수 있다.
중세의 소년 소프라노 합창단
하지만 이 얘기는 어디까지나 ‘과도한’ 성호르몬에 노출됐을 경우에 발생하는 일일 뿐이다. 생물체는 몸속에 이성의 성호르몬을 조금씩 갖고 있다. 사람의 경우 테스토스테론이 남성에서만 만들어지고 여성에서는 에스트로겐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남녀 모두 이들을 만들지만 단지 그 양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테스토스테론은 에스트로겐이 만들어지는 중간 과정에 생성된다. 테스토스테론은 아로마테이즈라는 효소가 작용하면 에스트로겐으로 변한다. 남녀 모두 아로마테이즈를 갖고 있지만, 여성은 이 효소의 양과 활성도가 남성에 비해 높다. 그 결과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에스트로겐이 많고 테스토스테론이 적은 것이다.
성호르몬은 ‘제2차 성징’이 발생하는 사춘기에 본격적으로 제 역할을 한다. 외관상으로 생식기의 성숙, 목소리의 변화, 가슴과 엉덩이의 지방 분포 변화, 음모의 발달이 진행된다. 내적으로는 생식 가능한 정자와 난자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여성의 경우 배란과 월경이 시작되는 일이 성호르몬의 작용을 통해 일어난다.
성호르몬을 만드는 생식소(정소와 난소)가 남녀의 형태와 행동양식의 차이를 일으키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일이다.
예를 들어 과거 동양의 궁궐에서는 정소를 일부러 제거한 아이들을 내시로 발탁했다. 중세 서양의 교회에서는 성가대에 남성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신의 영광을 좀더 잘 찬미하기 위해 고음을 낼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부러 거세한 ‘소년 소프라노 합창단’이 만들어졌다. 가축의 경우 거세를 하면 성질이 온순해지고 고기가 부드러워지는 것이 알려져 농가에서 활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애완견의 성질을 온순하고 만들고 이성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강아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거세를 감행하기도 한다.
또 유전적으로는 남성이지만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하는 게이들은 에스트로겐을 규칙적으로 주사해 여성스런 몸매와 목소리를 가지려 한다. 나아가서 테스토스테론의 원천인 정소를 제거하는 거세수술을 원하기도 한다.
과거 국제 대회에서 수영 종목의 메달을 휩쓸었던 동독 여성 선수들의 경우 뒷모습만 보면 남녀 구분이 어려울 만큼 잘 발달된 근육을 갖췄다. 남성호르몬을 복용한 것이 한몫한 결과다. 이 선수들은 은퇴 후 월경이상이나 배란장애에 따른 불임으로 고생했다는 보고가 있다.
성호르몬은 생식소에서 무작정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양이 만들어지면 더 생성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이 작용은 바로 뇌에서 담당한다.
사춘기에 들어서면 대뇌의 시상하부와 그 바로 아래에 위치한 뇌하수체가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시상하부에서는 생식선자극호르몬 방출호르몬(GnRH)이 분비돼 뇌하수체에서 난포자극호르몬(FSH)과 황체형성호르몬(LH)의 분비를 촉진한다. 이들은 난소나 정소에 작용해 성호르몬의 합성과 분비를 조절하고 난자와 정자의 성숙을 유도한다. 만일 성호르몬이 적정 수준으로 만들어지면 시상하부는 호르몬 분비를 멈춰 더 이상 생식소에서 성호르몬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만든다.
여기서 여성과 남성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LH의 분비 패턴이다. 여성의 경우 LH는 한달에 한 번 급격히 분비가 증가한다. 그 직후 난소에서 성숙한 1개의 난자가 배란된다.
하지만 남성에서는 이런 급격한 증가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정자도 늘 꾸준히 다량으로 만들어져 배출된다.
노년 여성의 턱에 수염 나기도
여성의 경우 중년이 지나 갱년기에 이르면 월경이 불규칙해지다가 완전히 멎어버리는 폐경기를 맞는다. 더이상 배란이 일어나지 않아 불임기에 접어드는 시기다.
이때 난소에서 에스트로겐의 생산이 급격히 감소되기 때문에 그 중간산물인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나 디하이드로테스토스테론(DHT)이 상대적으로 과다하게 분비된다.
일반적으로 테스토스테론은 머리가 빠지는데 관여하고, DHT는 수염을 자라게 한다. 따라서 노년의 여성은 머리가 많이 빠지거나 마치 사춘기의 소년들이 겪는 외견상의 변화를 맞기도 한다. 심지어 목소리가 굵어지고,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나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황인종보다 백인이나 흑인에게서 빈번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현상이다.
이에 비해 남성의 경우 별다른 변화가 없다. 테스토스테론의 생산량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정자의 생산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80대 노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아빠가 될 수 있는 생식능력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