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는 1937년 조성 이후 1950년대 태동기를 거쳐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성장기에 들어가 컴퓨터와 반도체산업이 급속히 발전한 1970-8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0년대에 들어 세계경제가 불황에 빠지면서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변혁기를 맞이했으나 통신과 소프트웨어, 그리고 인터넷 붐에 힘입어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첨단기술산업단지로 자리잡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인위적으로 계획돼 조성된 복합단지가 아니라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돼 오랜 기간 동안 산업발전의 역사를 투영하며 독특한 모델로 발전해왔다는 점에서 다른 데서 쉽게 모방하기 어려운 요소를 지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실리콘밸리의 성공을 설명하기 위해 같은 땅덩어리인 미국에서 사전계획에 의해 조성된 리서치트라이앵글과 비교하곤 한다. 리서치트라이앵글이란 동부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수도인 랠리와 인근의 더햄·채플힐을 잇는 삼각형 지역. 노스캐롤라이나대, 듀크대, 주립대 등 3개 대학을 축으로 주정부는 실리콘밸리의 인프라를 도입하기 위해 3천5백만달러를 투입했으나, 아직까지 그 결과는 신통치 않은 편이다.
일부 학자들은 다양한 참여주체들이 제각각의 목적달성을 위해 상호작용하면서 성장했다는 점에서 실리콘밸리를 생태시스템에 비유하기도 한다. 특히 인종과 업종을 불문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형성돼 있는 인적 네트워크는 실리콘밸리를 이끌어 가는 엔진이라고 볼 수 있다.
첨단기업의 성장과 발전을 뒷받침해주는 비즈니스인큐베이터(창업과 관련된 토털 서비스를 제공하는 집단)와 벤처캐피털, 그리고 창업단계의 기업에 투자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개인 에인절 투자자들이 다수 모여 있어 상대적으로 낮은 위험을 안고 창업할 수 있다. 또한 경영컨설팅, 법률, 회계, 홍보, 헤드헌팅, 증권업무 등 다양한 주변 업무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환경을 완비함으로써 이 지역 출신은 물론 전세계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활동할 수 있는 지역으로 발전했다. 실리콘밸리가 90년대 이후 전세계 국가들의 연구대상이 됐으며, 복합단지의 전형으로 자리잡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마모토 테크노폴리스의 가능성
실리콘밸리를 모델로 삼는 것은 이미 상당한 산업화를 진전시킨 이른바 선진국들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은 80년대 초부터 산업정책의 일환으로 주요 거점지역에 테크노폴리스를 건설하고 있다. 이를 위해 테크노폴리스법, 민간자본유치를 위한 민활법, 두뇌입지법, 거점도시법 등을 제정, 산업구조의 지식집약화와 기술집약화를 위한 과학기술단지의 조성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 전역에는 약 70여개의 과학기술단지가 조성돼 있으며 추가로 계획된 것만 40여개에 이른다. 다만 대부분이 최근 10년 동안 조성된 것이어서 그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에 성공여부를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일본의 테크노폴리스 가운데 대표적인 일본식 과학기술단지로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은 구마모토 테크노폴리스. 구마모토현은 ‘일본의 실리콘랜드’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전자산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ABCD 4개의 기간산업과 2개의 첨단산업 EF가 외부에서 지원한다.
여기서 ABCDEF란 각각 A (Automa-tion : 자동화기기, 산업로봇산업), B (Bio-technology :생물공학산업), C (Computer : IC, 반도체 이용 전자기기산업), D (Data Processing: 소프트웨어산업), E (Engineering : 선박, 산업플랜트산업), F (Fine Chemicals : 금속, 화학재료산업 등 신소재)를 말한다.
구마모토 테크노폴리스의 최대 강점은 무엇보다도 훌륭한 입지조건을 꼽을 수 있다. 즉 국제공항에 버금가는 구마모토공항이 인접해 있고, 값싼 공장 부지와 연구소 부지를 충분히 공급했다. 여기에 양질의 수자원과 깨끗한 공기, 온난한 기후조건이 산업·연구개발·주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어 수준높은 인력을 충분히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복합단지의 성공여부는 자연환경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실리콘밸리도 연중 기후가 우리나라의 봄, 가을 날씨와 비슷하게온화하며, 우기가 짧은 좋은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주변에 우수한 대학들이 산재해 있어 질 높은 인력공급이 원활할 뿐 아니라 대학과 기업간의 산학협동프로그램이 자연스럽게 조장돼 실용적이고 지속적인 기술개발이 가능했다. 게다가 서부지역 제일의 금융중심지인 샌프란시스코와 인접해 있어 생산활동에 필요한 자금조달이 용이하고 교통까지 편리하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독일의 이노베이션 센터
일본에는 구마모토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복합단지가 설립돼 운영중인데, 상당수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민간기업과 공동 출자해 설립하는 이른바 ‘제 3섹터 방식’으로 조성되고 있다. 이는 민간의 자금과 경영 노하우를 활용, 공공성이 강한 지역사업 등을 추진하기 위한 방법이다. 독일의 이노베이션센터 조성방식과 유사하지만, 보다 연구개발지향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일의 경우 지난 83년 건설된 베를린 이노베이션센터를 시작으로 현재 약 1백60여개의 이노베이션센터를 보유하고 있다. 지방대학과의 협력 하에 지방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이노베이션센터는 자기발전적인 기술창업을 촉진하고 중소기업의 기술혁신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건립되고 있다. 창업지원 활동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베를린 이노베이션센터는 베를린시가 베를린공과대학과 협력해 약 3만평의 부지에 조성한 것으로, 3백여개에 달하는 입주기업과 15개의 연구소로 구성돼 있다. 이곳이 대표적인 이노베이션센터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시나 의회, 그리고 대학간의 협력체제가 큰 힘을 발휘했고, 베를린공대의 우수한 인력과 연구개발자원을 활용했기 때문.
이는 실리콘밸리의 발전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 스탠포드 인더스트리얼파크와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스탠포드 대학은 SRI(Stanford Research Institute)라는 연구기관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산학협동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이 결과 스탠포드 출신의 교수나 연구원이 대학을 떠나 세운 기업의 수가 1천여개에 달했다.
이와 함께 대학은 지역 내 기업 소속 엔지니어들이 공과대학 강좌를 수강할 수 있도록 하는 명예협동과정(Honors Coopera-tive Program)을 도입하는 한편, 1951년에는 스탠포드 출신창업자들을 위해 대학이 소유한 땅 가운데 약 2백20에이커(약27만평)를 할당해 스탠포드 인더스트리얼파크를 조성, 오늘의 실리콘밸리를 일궈냈다.
지난 날 극심한 경기침체를 경험했던 영국은 오늘날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한 선진국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지난 71년 이후 대학 중심으로 조성한 44개 사이언스파크의 역할이 지대하다. 케임브리지 사이언스파크를 시작으로 특히 80년대 후반에는 50개가 넘는 사이언스파크가 영국 전역에 건설됐는데, 이는 첨단산업을 육성하는 한편으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해 침체된 경기와 높은 실업률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였다.
아이작 뉴턴의 모교이자 2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트리니티대학이 재정기반 확충을 위해 조성한 케임브리지단지는 현재 70여개의 입주기업과 4천5백여명의 종사자를 거느리고 있다. 또 단지 외곽에도 3백50여개의 하이테크 기업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 가운데 대학과 연구소에서 독립한 벤처기업의 수는 3백여개. 트리니티대학은 단지 내 기업들에 사무공간을 임대하고 수익금을 단지개발과 창업하는 기업에 다시 투자한다.
같은 유럽 안에서도 영국이 민간 위주의 단지 조성으로 운영의 묘를 살리고 있다면 프랑스는 국가 차원에서 많은 연구단지를 구성하고 있다. 프랑스는 지난 69년부터 지도급 과학자들의 제안에 따라 전국에 53개 연구단지를 공공기관이 주체가 돼 조성했다. 단지에는 세계 각국의 연구기관도 입주해 국적을 떠난 연구활동의 모델을 만들어냈다. 또한 교육기관, 정보기관 등도 입주해 생산기능과 연구기능이 연계된 종합연구단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이들 단지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는 소피아 앙티폴리스를 꼽을 수 있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이고 앙티폴리스는 이 과학단지가 들어선 앙티브라는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지혜를 모으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세계적인 관광도시인 지중해 연안 니스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이곳은 한겨울에도 10℃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천혜의 기후조건을 배경으로 여의도의 10배 되는 면적에 1천여개에 달하는 기업을 유치, 신기술개발 즉시 상품화가 가능한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성공했다.
대만의 신죽 과학기술 단지
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실리콘밸리 시스템을 도입한 곳으로는 대만이 꼽힌다. 대만이 많은 중소기업들에 의해 산업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지난 80년 이후 정부가 조성한 신죽(新竹)과학기술단지가 중심역할을 해냈다.
현재 이곳에는 약 1백40여만평의 부지 위에 2백50여 입주기업이 전자, 반도체, 컴퓨터, 통신 등 5개 첨단산업군을 형성하고 있다. 지난해 여기서 올린 총 매출액은 우리 돈으로 약 20조원에 달한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모방한 이 곳은 중앙에 고속도로를 놓고 단지 내에 연구개발형 기업, 벤처기업, 대학, 연구기관을 집중시켜 이들간의 지식과 정보가 원활히 교류되는 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은 정부계획에 의해 조성됐지만 철저하게 중소기업 중심으로 발전방향을 설정했을 뿐 아니라 전체 투자액의 약 81%를 민간기업이 부담하고 실리콘밸리 등지에서 활동중인 대만 출신 엔지니어 약 2천7백여명을 유치하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에 유학갔다가 현지 기업에서 일한 경력을 가진 화교들이 승진 한계 등으로 귀국하면서 대만의 하이테크 산업을 창출해낸 것이다. 당연히 이들은 세계의 첨단기술 조류의 맥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이들 귀국 화교들을 위해 정부는 서구식 생활과 교육이 가능하도록 사전준비에 철저를 기했으며, 귀환 엔지니어가 창업하면 기업설립자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신죽단지 입주기업 분포를 보면 대만이 자랑하는 컴퓨터 및 주변기기, 그리고 집적회로 분야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통신, 광전자, 정밀기계 등 고부가가치 업종이 나머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매출면을 살펴보면 컴퓨터와 집적회로가 신죽단지 전체매출의 약 85%를 구성, 대만경제를 이끄는 가장 중심적인 전진기지로 발전했다.
세계 각국은 비록 시차는 있지만 거의 비슷한 배경과 필요성에 의해 복합단지 건설을 진행중이다. 즉 21세기는 첨단기술을 무기로 하는 지식산업사회이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소품종 대량생산으로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따라서 지식과 정보를 요소로 한 다품종 소량생산이 가능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반기술의 고도화와 산학연 협동의 확대가 요구된다.
우리는 외환금융위기와 IMF 한파로 기존산업이 총체적인 붕괴국면을 맞고 있다. 여기에 전면적인 시장개방이 급속히 진행 중이어서 반드시 고부가가치 제품의 수출을 확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제조업 기반이 붕괴되고 있으며 지역경제를 이루던 중소기업의 바탕도 상당히 허약해진 모습이다. 특히 기존산업간의 취약한 연계구조는 산업간 집적구조를 강화시키기엔 매우 불리하다.
최근 정부는 테크노파크 구축사업과 함께 미디어밸리, 수도권 앵커형 벤처단지 등 거의 모든 형태의 집적단지모델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특히 새정부가 벤처육성을 경제위기 극복의 최적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보니 벤처 관련 집적시설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더 강조되고 있다.
과거 공업단지나 산업단지와 같은 개념으로 생산공간을 제공하던 정책은 크게 두가지 흐름으로 진행돼왔다. 하나는 첨단산업단지나 테크노폴리스 같은 첨단산업 육성의 방향이고, 또 하나는 창업보육센터(TBI)와 중소기업전용단지와 같은 중소기업 육성의 방향이다. 이 두가지 흐름은 결국 기술집약적인 첨단중소기업을 우리 방식으로 길러내는 정책으로 귀결되면서 벤처정책과 맞물리게 됐다. 즉 벤처빌딩, 벤처전용단지, 테크노파크, 연구공원과 같은 전략적이고 입체적인 입지정책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이다.
아무튼 경제위기 극복과 21세기 준비라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우리의 첨단복합단지 조성계획은 다른 나라들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충분히 검토한 뒤에 수립돼야 한다. 특히 외형적인 특징이나 제도보다 내면적 요소와 운영노력이 성공요인이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우리 현실에 부합하는 모델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