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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문화가 변모시킨 국토의 얼굴 소나무 숲

당대 최고의 걸작 문인화로 사랑을 받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와 오늘도 복원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조선의 정궁(正宮) 경복궁, 그리고 한국인이면 누구나 귀에 익은 십장생. 이질적인 이 세가지가 품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답은 바로 소나무다.

허름한 집, 엉성해 보이는 구도, 휑한 허허로움의 세한도에는 잣나무와 함께 늙은 소나무와 젊은 소나무 두 그루가 그림을 채우고 있다. 소나무는 이 땅에 자라는 1천여종의 나무 중에서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나무다.

조선의 궁궐들은 오직 소나무로 지어졌다. 이같은 전통은 오늘도 이어져 경복궁 복원공사에는 여전히 소나무만이 재목 대접을 제대로 받고 있다. 이 땅의 나무 중에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고, 또 가장 강한 소나무 목재는 조선 정부로 하여금 지구상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소나무 보호정책을 5백여년 동안 시행하게끔 만들었다.

소나무는 장생을 염원하는 해, 달, 구름, 산, 내, 거북, 학, 사슴, 불로초와 더불어 우리 조상들이 늘 곁에 두고 아껴왔던 생명의 나무였다. 지조와 절개, 강인한 생명력과 같은 민족적 정서로 승화된 상징성은 그래서 소나무를 민족수(民族樹)라고 부르며, 우리 문화를 흔히 '소나무 문화'라고 일컫게 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남벌에도 꺽이지 않은 민족의 나무

문학과 예술의 으뜸 소재, 최상의 건축재, 민족적 정서로 승화된 상징성. 소나무가 간직한 이런 특성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별로 없다. 최근에 산림청에서 실시한 산림에 대한 의식조사 결과도 다르지 않다.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였고 10여년 전에 실시한 조사결과도 역시 같았다.

이 땅의 사람들은 주변에 다른 나무도 많은데 왜 유독 소나무를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떠올렸을까? 소나무가 이 땅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이기 때문일까? 일제의 수탈과 전쟁, 사회적 혼란으로 도벌과 남벌이 행해지면서 지난 60여년 동안 솔숲 면적이 3분의 1이나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 전체 산림면적의 40% 내외를 소나무가 점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많다고 해서, 또 가장 흔하다고 해서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소나무일 필요는 없다. 그러면 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나무하면 가장 먼저 소나무를 떠올릴까? 그것은 소나무 자체가 이 땅의 선조들이 수천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하면서 일구어온 농경문화의 독특한 산물이다.

소나무가 농경문화의 산물이라는 흔적을 오늘날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를 테면 마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성한 소나무 숲은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심심산골로 갈수록 쉽게 찾을 수 없다.

이는 다시 말해 인가 주변에 형성된 소나무 숲은 사실은 저절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된 인간의 손길 때문에 지탱돼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남산 위에 무성하던 소나무 숲이 이제는 신갈나무를 위시한 참나무류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인간의 손길이 끊어지면서 소나무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산업화의 여파로 농촌인구가 감소하고 화석연료가 등장하면서 소나무 숲에 대한 인간의 간섭이 줄어들었고, 따라서 인위적 안정(극상) 상태로 유지되던 소나무 숲은 자연의 힘(천이)에 따라 활엽수림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인위적인 손길이 닿기 이전, 우리 숲의 원래 모습은 광릉 소리봉의 활엽수 극상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

소나무는 과연 어떻게 이 땅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됐고, 또 어떤 과정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지 그 과정을 한번 살펴보자. 우리 조상이 한반도에서 삶을 영위하기 이전에는 온대 활엽수로 구성돼 안정화된 '극상림'이 본래 우리 숲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특히 한반도는 1만년 전에 있었던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과 3면이 해양으로 둘러싸인 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징으로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만나는 환경조건을 가지고 있다. 또 산이 많은 지형조건 때문에 생물다양성이 매우 높았다.

오늘날도 1천여종 이상의 수종이 우리 산하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조상들이 본격적으로 이 땅에 터잡기 시작한 8쳔여년 전에는 낙엽활엽수로 구성된 극상림이 이 땅을 덮고 있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참나무류나 단풍나무 같은 낙엽활엽수로 구성된 안정된 숲은 한반도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변해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 터잡고 살던 우리의 조상은 다른 문명권과 마찬가지로 숲을 이용해 문명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일산의 토탄층 유적지에서 출토된 4천여년 전의 볍씨로 미루어 보아 그 이전부터 서남해안의 평야지대에는 부분적으로 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중부지방의 경우 논농사를 위한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산림 파괴가 2천5백년 전부터 시작됐다는 보고도 있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쇠를 다루고 제련할 수 있는 기술이 본격적으로 이용된 2천5백여년 전에는 이 땅에도 농경문화가 정착됐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수렵채취의 떠돌이 생활을 버리고 한곳에 무리지어 정착해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농경지의 지력 유지가 선결과제였다. 경작지의 지력 유지 수단으로써 사람의 배설물, 온돌 아궁이의 재, 인가 부근의 야산에서 채취한 풀이나 활엽수의 잎을 베어내 썩혀서 만든 퇴비 등이 사용됐다.
그러나 사람과 가축의 배설물이나 유기물을 태워서 만든 재는 그 양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경작지에 사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야산의 풀이나 인가 주변의 산에서 자라는 활엽수의 잎들을 채취해 퇴비로 조성했다.

특히 퇴비 조제를 위해서 채취된 인가 주변의 활엽수림 잎과, 춥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한 온돌 난방을 위해 채취된 활엽수, 그리고 각종 임상 유기물은 숲의 구조 자체를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본래부터 무성했던 인가 주변의 활엽수림은 난방을 위해 채취하고 농경에 필요한 퇴비의 생산을 위해서 잎을 지속적으로 채취한 결과, 활엽수가 자라던 곳의 지력도 따라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악화된 인가 주변의 산림은 활엽수가 자랄 수 없는 토양 조건으로 변하고, 종국에는 나쁜 토양 조건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소나무가 넓은잎나무들이 자라던 곳을 점차 차지하게 됐다.

이와 같은 내용은 1천4백여년 전부터 소나무의 세력이 우세해진 것으로 나타난 꽃가루 분석 결과와 유사하다. 이 시기는 삼국시대를 거친 이후의 통일 신라시대로, 오늘날에도 당시의 농경문화와 철기문화가 상당히 발전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수렵 채취 생활에서 정착해 농경생활을 하면서 농경지의 지력을 유지하고, 온돌을 이용한 난방으로 겨울을 지내는 행위는 인가 주변에 분포하고 있던 우리 숲의 구조를 낙엽 활엽수림으로부터 점차 소나무림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노릇을 한 셈이다.
 

우리 토종 소나무의 원형이 보존된 양백지방의 소나무.


소나무 외에는 모두 잡목

변모한 인가 주변의 숲이 계속 소나무 숲, 특히 소나무 단순림으로 유지될 수 있었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여러 가지를 추정할 수 있겠지만, 소나무 숲에 대한 지속적인 인간의 간섭을 주된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계속된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농경문화의 발전과 비례해서 소나무의 이용가치는 더욱 증가하고 확대됐기 때문이다.

인구밀집지역의 숲들이 소나무 숲으로 바뀌면서 나무나 숲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고려시대부터 점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록을 살펴보면 이같은 규제는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더욱 구체화돼 국가의 제도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개국과 함께 강력한 산림보호시책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말 국정의 문란으로 산림의 피해가 극심했기 때문에, 태조는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산림의 개인 소유를 금지하고 적극적으로 산림을 보호했다.

특히 소나무는 궁궐이나 가옥을 짓는 건축재는 물론이고, 그 당시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이던 배를 만드는 조선재로 충당됐다. 이 때문에 조선 정부는 소나무재의 원활한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서 솔숲을 보호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런 이유로 조선 정부는 송목금벌(松木禁伐, 줄여서 松禁)이라는 소나무 보호정책을 대표적인 산림시책으로 삼았고, 소나무 외의 수종은 잡목으로 취급했다. 이 결과 일반 백성들은 잡목으로 취급된 활엽수를 자유롭게 채취해 이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소나무 숲에서 자라는 활엽수를 제거하고, 임상 유기물을 계속해 연료로 채취했던 인간의 간섭에 의해서 소나무 숲이 지속적으로 단순림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후 소나무 단순림은 가꾸고 지키기 위한 적절한 조처 없이 수백년 동안 약탈식 벌채만 계속됨에 따라 모양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인구 밀접지역의 우리 소나무 숲은 재목으로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베어낸 터라 굽은 나무들이 자라는 볼품 없는 숲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고, 점차 황폐화의 과정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들이 접하는 이 땅의 소나무 숲은 한민족이 수천 년 동안 농경문화를 영위해오느라 활엽수림을 희생시킨 결과라고 해석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사람의 손길이 다시 다가서야 할 때

굽은 형태 때문에 재목으로 쓰기보다는 조경수로 적합한 것으로 인식되는 나무, 솔잎혹파리를 위시한 병충해에 약한 나무로 오늘도 끊임없이 베어지는 나무. 적절하게 돌보지 못해서 점차 참나무류에게 서식공간을 내줄 수밖에 없는 소나무 숲. 그래서 망국수(亡國樹)라는 잘못된 이름으로도 회자되던 것이 우리 소나무다. 소나무는 과연 이렇게 쓸모없는 '나쁜 나무'일까?

답은 물론 아니다. 여름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절에 나타나는 건조기와 계절 간의 기온차가 큰 대륙성 기후 조건에서도 왕성하게 생육하는, 소나무를 대신할 만한 좋은 침엽수는 이 땅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

더욱이 일제 식민지 수탈과 전쟁 등의 사회적 혼란으로 황폐화된 이 땅에서 소나무처럼 잘 자라는 나무를 찾기란 쉽지 않다. 특히 산림면적의 3분의 2가 풍화도기 쉬운 화강암이나 화강편마암으로 구성돼 한번 파괴되면 쉽게 복구될 수 없는 이 땅의 산림 토양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면 민족혼이 스며 있고 우리 정서의 일부가 된 소나무을 위해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나무 숲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도록 농경시대에 해왔던 인간의 간섭을 대신할, 적절한 사람의 손길을 찾는 일이다. 소나무 숲을 과학적으로 가꾸고 기르기 위한 육림(育林) 작업의 개발과 적절한 투자가 바로 그러한 손길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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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전영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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