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매일 뉴스 말미에 나오는 일기예보를 얼마나 주의깊게 눈여겨보는가. 아마도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일 밖에 나갈 때 우산을 챙길 것인지, 혹은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를 참고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일기예보, 좀더 넓게 보아 날씨를 안다는 것은 우산과 옷을 챙기고 스노타이어를 점검하는 정도 이상이다. 날씨야말로 사람들의 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날씨를 알면 돈이 보인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청량음료나 빙과류, 에어컨, 난방기 등 이른바 ‘계절상품’ 회사들이 다가올 날씨를 예측하고 이에 대비함으로써 사업을 성공으로 이끈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난 7월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원하는 주문에 따라 자세한 기상 정보를 제공하는 사설 기상대가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한 것은 기상 정보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기상 정보의 중요성은 스포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사설 기상대의 예상고객 명단에는 프로스포츠 구단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잠실구장의 온도와 습도, 풍향이 이러하니, 오늘은 어떤 구질의 투수를 기용하는 것이 좋으며, 타자들이 어떤 타격법을 구사하는 것이 좋은지 등의 정보를 감독에게 제공할 예정이다.
사실 분초를 다투는 옥외 스포츠의 경우 기상상태가 경기 진행과 기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오바델레 톰슨이란 선수는 96년 4월 미국 엘파소에서 열린 육상대회에 출전, 1백m에서 9초69의 초인적 기록을 수립하고도 기록을 인정받지 못했다. 때맞추어 등을 밀어준 강풍이 원인이었다. 1백m, 2백m, 그리고 넓이뛰기, 3단 뛰기 등의 육상경기는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초 2m를 넘으면 공인되지 않는다는 규정에 따른 것. 또 ‘인간 새’라 불리는 장대높이뛰기의 세계선수권자인 부브카는 올림픽과 인연이 없는 선수다. 그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 획득이 유력했으나, 바람의 도움을 받지 못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핫틀랜타에서 나온 세계신기록의 비밀
세계기상기구(WMO)는 1950년 세계기상기구협약이 발효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3월 23일을 ‘세계기상의 날’로 정하고 날씨와 관련된 한가지 주제를 선정한다. 96년의 주제는 ‘기상과 스포츠’. 이 해가 근대 올림픽 시작 1백돌을 맞는 해인 데다가, 7월부터 미국 애틀랜타에서 제25회 여름올림픽이 열리는 등 스포츠에 대한 기상 서비스의 활용이 기대됐기 때문이다.
실제 인류 최대의 스포츠 잔치인 올림픽에서는 지난 84년 LA 대회부터 세밀한 기상 정보가 제공돼 왔다. 지난 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우리나라 기상청이 기온·습도·풍향·풍속 등 경기장 주변의 최근 기상정보를 대형 전광판을 통해 제공한 바 있다. 그러나 애틀랜타 대회는 날씨에 관한 한 엉망이었다. 그 이유는 애틀랜타 올림픽을 부르는 또다른 명칭이 도시 이름 앞에 덥다는 뜻의 hot이 붙은 ‘핫틀랜타’였던 것을 생각하면 대략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이 도시는 고온다습한 중위도에 위치한데다가 대회 기간이 성하(盛夏)와 겹친 탓에 개최지 선정 당시부터 말이 많았다. 올림픽이 갖고 있는 위상으로 보아 최고의 기록이 쏟아져 나와야만 하는데,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하기에는 기본적인 환경이 최악이라는 것.
원래 이슈가 될만한 경기의 날짜는 항상 날씨를 고려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프로농구가 겨울 스포츠가 된 것은 ‘오빠부대’ 동원을 위해 긴 겨울방학에 맞춘 것이 아니다. 체열의 생산량이 많은 격한 운동일수록 겨울 스포츠로 선택하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미국에서는 10월에 ‘인디언 섬머’라 불리는 따뜻하고 건조한 짧은 시기가 있는데, 이 기간이 미국프로야구 월드시리즈의 일정을 결정하는 한 요인이 된다. 비록 지속기간과 나타나는 시기 등이 변동되기는 하지만, 그 기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야구 시즌을 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애틀랜타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은 대회 기간 내내, 경기보다는 섭씨 38도가 넘는 기온과 50%가 넘는 상대습도에 더 진땀을 흘려야 했다. 이처럼 ‘최상의 기록을 내기엔 최악의 조건’을 무릅쓰고 탄생한 세계 신기록은 모두 24개로 평년작을 밑도는 수준.
육상에서는 대회가 자랑하는 최대의 수확이 나왔다. ‘단거리 육상의 꽃’이라 불리는 남자 1백m에서 캐나다의 도노번 베일리(9초84)가, 또 2백m에서 미국의 마이클 존슨(19초32) 이 신기록을 경신했다. 그러나 트랙과 필드의 여타 종목에선 단 한 개의 세계신기록도 추가하지 못했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기록은 역도 분야에서 터키의 나임 술레이마놀루 등이 종전기록을 5kg 이상 갈아 치우는 등 모두 14개의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
이전까지 세계 육상계의 기록경신을 주도해온 중장거리 분야가 이 대회에서 단 한 개의 세계기록도 세우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또 이전 대회인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약물검사가 강화되면서 “더 이상의 기록 경신은 힘들 것”이라던 예상을 깨고 역도에서 전체 세계신기록의 절반 이상이 쏟아져나온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다른 조건이 이전의 대회와 같다고 본다면 답은 날씨에서 찾아야 한다(물론 육상 트랙이 ‘몬도’라는 단단한 소재로 만들어져서 단거리선수에게 유리한 반면, 중장거리 선수들의 기록 향상을 방해한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딱딱한 바닥은 선수들의 발에 금방 피로를 준다).
1백m달리기와 역도는 짧은 시간에 폭발적 힘을 필요로 하는 무산소운동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마라톤처럼 지구력을 요하는 유산소운동과 달리 무산소운동은 대체로 기온이 낮은 것보다는 높은 게 기록 경신에 좋다는 것이 정설. 날이 차가우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산소 운동은 단시간에 경기가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중거리 이상을 달릴 때와 달리 선수가 열과 싸울 필요가 없다.
한국 마라톤이 강한 이유
일반적으로 스포츠에 영향을 주는 날씨 요소는 크게 온도, 습도, 바람, 기압 등이 꼽힌다. 물론 이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특정 요인만을 떼어내 생각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날씨 요소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연구가 많이 진행된 분야는 온도(열). 대체로 인간은 운동과제를 수행할 때가 공부 등과 같은 정신적인 과제를 수행할 때보다 온도에 의한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운동을 하면 근육에 에너지가 많이 공급돼야 하기 때문에 몸의 열이 올라간다. 이 에너지는 글루코스(포도당)와 지방의 분해에 의해 생산되는데, 이때 생긴 열이 몸의 온도를 높이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인체는 혈액의 온도가 37℃ 이상 높아지면 가뿐 숨을 몰아 쉬거나 땀샘을 통해 수분을 내보내며, 혈액순환의 비율과 정도를 변화시킴으로써 열을 발산한다.
그러나 문제는 신체의 열이 일정수준을 넘으면 에너지 생산능력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신체 활동이 급격히 떨어진다는데 있다. 여기에 신체 외부의 온도가 높으면 이 메커니즘은 더욱 작동하기 힘들어진다.
일반적으로 스포츠과학자들은 15-20℃의 범위를 인간이 가장 운동하기 좋은 기온이라고 본다. 그리고 26℃ 이상을 고온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이상 온도에서 일정시간 이상 운동을 할 경우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연구자들은 선수가 열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연구를 진행해왔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고전적인, 그러나 최선의 방법은 대회 날짜의 날씨에 맞추어 훈련을 지속함으로써 신체 메커니즘을 날씨에 적응시키는 것.
이 때문에 유능한 감독들은 숙소에서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도중 에어컨을 사용하는 것 조차 일일이 통제한다. 외부온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4시간이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최대한 운동장의 온도에 선수들을 적응시키기 위한 조치다.
42.195km를 쉼 없이 달려야 하는 마라톤을 예로 살펴보자. 전문가들은 이 경기의 최적기온은 13℃이며, 온도가 1℃씩 높아질수록 기록은 3분30초 가량 떨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13℃는 일반인이 평상 작업을 할 때 약간의 한기를 느끼는 온도. 알몸인 상태에서의 실내 최적온도가 21℃임을 생각하면 어림 짐작이 가능하다. 선수들은 이 상태에서 한번의 완주를 통해 도합 2L에 이르는 양의 땀을 흘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년 12월 1일 열린 후쿠오카 국제마라톤대회 당시의 기온은 영상 3℃. 경기가 취소될 정도의 날씨는 아니었다. 매년 4월에 열리는 미국 보스톤마라톤의 경우, 역대 개최일의 날씨는 영하 6℃에서 영상 34℃까지 심한 편차를 보인다.
당초 예상했던 13℃에 못미치는 추위가 닥치자 선수들은 긴팔 셔츠를 받쳐입어야 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우승한 이봉주는 날씨가 행운이었다. 그가 대회를 준비하며 집중적으로 훈련한 11월의 우리나라 날씨는 제법 쌀쌀한 편에 속한다. 아침 저녁 찬바람을 맞으며 몸을 만들어온 이봉주는 조금 뛰자 땀이 났다.
반면 아프라카 등지에서 온 선수들은 기후 적응에 애를 먹는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애틀랜타올림픽에서 3초차로 이봉주를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조시아 투과니는 레이스 시작 1시간16분이 지난 25km부터 힘이 빠져 기권하고 말았다.
이봉주와 달리 황영조는 35℃를 오르내리는 폭염을 뚫고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당시 그가 우승을 차지할 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 스스로는 금메달을 자신했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집중적인 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같은 설명은 일반론일 뿐, 선수 개개인의 체질이나 상태에 따라 기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실제 이봉주와 황영조는 어떤 날씨에도 쉽게 적응하는 전천후 선수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이들 선수들은 타고난 체질과 함께 4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날씨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지적이다.
장마철 야구장은 투수 세상
더운 날씨가 선수들을 지치게 하는 요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기록에 악영향을 주는 것만은 아니다. 투창이나 원반던지기 선수들에게 높은 온도는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더운 날씨에는 공기의 밀도가 낮아져 공기 저항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습도가 낮고 날씨가 서늘하면 공기 분자의 밀도가 높아져 원반 던지기 선수들에겐 불리하다. 반대의 경우에는 밀도가 낮아져 공기 분자의 이동이 활발해지고 분자끼리 서로 밀어내는 현상이 발생해 공기 저항이 줄어든다. 폭풍우가 있기 전에도 공기의 밀도가 낮아지기 때문에 원반은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
이 원리는 야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습도가 높은 흐린 날의 시합은 타자보다 투수에게 유리하다고 입을 모은다. 높은 습도는 야구 공의 속도를 떨어뜨려 강속구 투수에게 불리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오히려 손해는 타자쪽이 크다는 것이다.
체육과학연구원 신동성 박사는 "공기의 밀도가 크면 야구공의 비행거리는 10% 정도 감소한다"고 말한다. 야구공은 코르크 조각을 양모털로 감싼 다음 가죽으로 덮어 만드는데, 양모 한올한올마다 미세한 관이 있어 이 관이 공기 중의 습기를 흡수함으로써 공의 탄성을 떨어뜨리기 때문. 결국 습도가 높으면 공이 수분을 흡수해 무게가 증가하게 되고 타자가 공을 쳐도 멀리 날아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투수 입장에서는 습도로 인해 공을 잡을 때의 감각이 훨씬 살아난다.
야구와 관련된 날씨 정보는 감독의 용병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날씨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감독은 포수쪽으로 강한 바람이 부는 맑은 날이면 강속구 투수를, 궂은 날엔 강속구 투수보다는 변화구를 구사하는 투수를 기용한다. 또 바람이 외야에서 왼쪽으로 불 때는 오른손잡이 타자가, 오른쪽으로 불대는 왼손잡이 타자를 내보낸다. 당연히 수비수들의 위치도 날씨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고전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또 더 좋은 기록을 내려면 충실히 훈련하고 작전이 훌륭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적을 알고 나를 아는' 정도의 훈련법은 이미 '영양가'를 상실했다. 이제 유능한 선수, 혹은 경기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날씨를 알아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