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칫 목이 격렬하게 찢어지는 듯한 작렬감을 일으키거나 토혈이나 하혈을 한다든가 심한 통증이나 구역질, 설사라도 한다면 탕제에 극약이 섞여들어가 있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독의 효과를 노리면서도 즉시 독효가 나타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박안식 작 '소설 소현세자'(창작과비평사).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지만 그 안에 엄밀한 과학적 기초가 없으면 허술한 이야기가 돼버린다. 질병 치료를 위한 탕제에 독극물을 의심받지 않고 넣을 수 있을까. 옛부터 극약으로 알려진 독극물이 의외로 질병 치료제로 많이 쓰였다. 수은이나 납등은 인체에 치명적인 물질이지만 소량을 사용할 경우 진통효과를 발휘하고 때로는 환각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비상 또한 의외로 많이 쓰인 약재다. 동의보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비상은 맛이 쓰고 시며, 학질(말라리아)을 다스리는데 쓴다. 독이 있어 가벼이 먹지 못하고 초에 달여서 독을 죽인 다음에 쓴다."
동의보감의 처방대로라면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비상을 학질에 걸진 세자의 탕제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상(砒霜)을 쓰게 되면 그 독성이 너무 강해 조심해야 하고, 만일 세자가 비상이 든 탕제로 인해 급사하게 되면 독살이 탄로날 위험성이 있었다. 때문에 의원은 독의 효과를 노리면서도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 어려움을 토로했던 것이다.
백색 분말의 원형질 독(毒)
비상은 예로부터 죄인에게 내린 사약에 많이 쓰인 독극물이다. 이는 자연상태의 비소를 원료로 제조된다. 자연상태의 비소 자체는 독이 없으나 여러 가지 비소산화물은 거의 독성을 띤다. 그 중 아비산(As2O3)이 가장 강력한 독성을 발휘하는데, 이것이 비상이다.
비상은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로 물에 잘 녹는다. 체내에 흡입되면 조직세포의 산화를 방해해서 세포의 원형질에 독성을 발휘하기 때문에 원형질 독으로 분류된다. 비상을 한 번에 치사량 이상 흡입하면 구토, 설사, 모세혈관 확장, 혈압감소 등이 일어나며, 중추신경기능이 마비돼 1-2시간내에 사망한다.
지구상의 원소 중 50번째로 많은 양을 차지하는 비소는 오래 전부터 인류가 사용해 온 물질이다. 이미 기원전 4세기경 아리스토테레스와 그 제자들이 비소의 독성을 언급했고, 로마시대에도 비소계 독약이 사용된 것으로 일본의 법의학자는 밝히고 있다. 13세기의 연금술사 알베르트 마그누스는 비소를 처음으로 홑원소 물질로 분리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19세기의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서종박물고변'(1834)에는 비상을 제조하는 방법이 소개돼 있다. 천연 비소가 함유된 비소 원석(砒石)을 가열해 증발시켜 비소 증기를 철판에 증착시켰다가 이를 떼어내면 이것이 비상이다.
이규경은 비상을 제조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2년 정도만 이 일에 종사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오랫동안 이 일을 하면 수염과 머리카락이 다 빠져 흉한 몰골이 되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흉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대장장이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대장장이는 금속을 다루는 솜씨만은 대단하지만, 대부분 얼굴이 못생기고 머리가 듬성듬성 빠졌으며 신체의 일부가 불구인 경우가 많다. 거기다 성질은 종잡을 수 없다. 괴팍하다.
게르만족의 고대 신화에 나오는 대장장이는 대부분 난쟁이들이며, 얼굴이 못생기고 곱추이거나 창백한 몰골을 지녔다. 이들은 금속과 귀금속이 풍부한 곳에서 살며, 신들의 무기와 여신들의 장신구를 만드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북구신화 속의 오딘도 무적의 힘을 주는 창과 반지를 난장이로부터 얻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프로디테의 남편인 헤파이스토스(로마에서는 불카누스)도 마찬가지다. 헤파이스토스는 대장간의 신으로 화산의 불을 이용해 금속을 다루던 금속 세공장이였다.
그의 외모는 두꺼운 목에, 가슴에 털이 많았으며, 뒤뚱거리면서 걷는, 큰 체구를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특히 얼굴은 지독히 못생겼다.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의 재주를 높이 사서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사랑과 미의 신인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주었다. 그러나 비너스는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고 부정한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현대에도 비소 중독 살아 있어
왜 대장장이 신은 늘 흉한 외모를 지닌 것으로 묘사될까. 이에 대한 한가지 답이 바로 비소중독다. 헤파이스토스의 작업장은 컴컴한 동굴이었다. 이 때문에 금속을 제련하면서 자연히 금속증기에 섞인 비소화합물을 들이킬 수밖에 없다.
이규경이 2년만 비상제조에 종사하고 다른 일을 하라고 할만큼 비소증기의 독성은 강하다. 심지어 비소중독으로 사망한 지 10여년이 지난 사체에서도 비소를 검출할 수 있다고 한다.
1955년 로스노라는 학자는 그리이스 로마시대의 청동기를 분석해본 결과, 청동기에 비소가 다량 함유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은 자연상태의 여러 물질에 포함된 비소의 양보다 훨씬 많은 양으로 대장장이들이 비소를 사용해 청동기를 제련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비소를 납과 구리에 소량 첨가하면 단단해지고 내열성이 증가하기 때문에 비소는 금속첨가제로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또 비소 원석은 자연상태에서 비소, 유황, 철로 된 광물, 은광, 납광과 함께 나며, 납, 구리 등의 원석에도 흔히 비소가 섞여있다. 때문에 이들 금속을 제련하는 도중 자연히 비소증기를 비롯한 유해가스가 발생한다.
더구나 현대 의학의 연구에 따르면 비소를 쓰는 합금제조 공장근로자의 경우 신경마비, 지각이상, 탈모, 색소침착, 피부가 두꺼워지는 등의 직업병을 겪는 것으로 확인됐다.
고대신화에 등장하는 대장장이가 흉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은 대장간의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발생한 비소가스를 흡입한 결과로 얻은 직업성 중독증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헤파이스토스는 작업장에서 품어나오는 비소증기에 오랫동안 노출돼 외모가 형편없어지고 신경계마저 정상이 아니게 된 것이다.
미의 여신 비너스는 처음부터 현모양처의 기질은 없는 신이었을뿐더러 흉한 몰골과 괴팍한 성격을 지닌 남편보다는 마르스같은 건장한 신에게 끌리는 마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