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던 날 시카고대학에 도착했다. 브라운대학 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필자는 더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즉시 찾아 뵌 분은 라이스박사. 그는 통계역학을 전공한 분으로 30세가 되기 전에 이미 정교수가 됐던 미국 이론화학계의 혜성이었다.
통계역학을 전공한 필자로선 라이스박사가 당연히 이와 관련된 연구를 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의 연구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스박사가 “무슨 연구를 하고 싶은가”라고 물었을 때, 필자는 “유기고체의 양자론적 성질을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분은 “그렇게 하라”고 시원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것은 우리 두 사람의 전공과 전혀 다른 연구였고, 필자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라이스박사가 제시한 연구주제는 “유기결정에 ‘엑사이톤’(전자가 높은 에너지로 여기되면 원래의 위치는 +전하를 띠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전하와 전자를 합친 것을 말함)이 많이 생겼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것이었다. 엑사이톤 2개가 충돌하면 둘 다 소멸하고 자유전자가 한 개 생기는데 그렇게 될 확률이 얼마일까를 먼저 계산해야 했다. 필자는 간단한 모델과 함께 며칠만에 그 결과를 계산해냈다.
완성된 논문을 화학관련 학술지에 제출하려고 했는데, 또 한번의 전환점이 생겼다. 논문을 읽은 저명한 물리학교수 한분이 미국 물리학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학술지에 투고하기를 권했던 것이다. "설마 받아줄까"하고 보냈던 논문이 게재됐다. 또 이 논문을 보고 자기 실험결과를 설명할 수 있었다는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자기 대학에서 강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서울대에서 처음 화학을 배웠던 필자는 30여년 전 이러한 사연으로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물리학교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