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탕카멘 파라오는 이집트 18왕조의 아메노피스 4세와 제2왕비 키야 사이에서 태어나 10세(기원전 1333년)에 즉위하고 20세에 사망한 인물이다. 왕가의 계곡에 묻힌 채 수천년 동안 잊혀진 투탕카멘은 사망한지 3245년 후인 1922년 10월 26일 영국의 카르나본과 고고학자 카터에 의해 거의 완벽한 상태로 발굴됐다.
투탕카멘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호화로운 유물 탓도 있지만, 발굴에 관계된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집트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벌이 내릴 것이다'라는 저주의 글이 쓰여 있다. 이것이 '파라오의 저주'로 비약된 것이다.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의 특파원 아더 웨이갈은 카르나본에게 "만약 투탕카멘의 저주가 사실이라면 당신은 6주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고, 이 말을 들은 소설가 마리 코렐리는 카르나본이 사망하기 15일 전 왕의 저주에 대한 흥미 위주의 작품을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카르나본은 투탕카멘의 얼굴에 나 있는 상처와 똑같은 부위를 모기에 물려 1923년 4월 5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무덤에 손댄지 약 5개월 후의 일이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카르나본이 사망할 당시 영국에 있던 카르나본의 애완견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 이후 카르나본과 가까운 사람들이 연이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923년 9월 카르나본의 조카가 갑자기 죽었고, 미라를 조사하기 위해 이집트에 왔던 방사선 조사자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투탕카멘의 관을 만졌던 미국 철도계의 거물 제이 굴드도 폐렴으로 사망했다. 한 이집트인은 무덤을 본 후 자신의 처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 죠지 방디트 역시 무덤을 방문한 후 갑자기 사망했고, 카터의 비서는 1929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의 아버지 웨스트베리는 무덤을 보지 않았지만 투탕카멘의 유물을 몇가지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사망한 후 곧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해를 운반하던 영구차에 8세의 아이가 치어 죽기도 했다.
'파라오의 저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9년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 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아담슨이 영국 텔레비젼 방송에 출연해 "나는 한순간도 파라오의 저주라는 터무니 없는 전설을 믿어본 적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출연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24시간이 지나기도 전 그의 부인이 죽었고 아들이 등뼈를 다쳤다.
'파라오의 저주'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을까.
'파라오의 저주'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근래에 가장 신빙성 있는 주장으로는 투탕카멘과 함께 묻힌 과일이나 야채가 수십세기를 두고 썩어가면서 만들어진 곰팡이 때문에 일부 건강이 좋지 않던 관련자들이 감염됐다는 것이다. 곰팡이가 3천년 동안 생존하다가 무덤이 열리자 재빨리 인체에 침입한 후 치명적인 질병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X선 검사로 저주 풀려
그렇다면 무덤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일부 학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독약 전문가였다. 어떤 독은 먹지 않고 피부에 스며들기만 해도 치명적이다. 이런 종류의 독이 묘지 안의 벽을 칠할 때 사용됐을 것이다. 발굴자들이 묘지의 독성 물질에 감염됐고, 이 독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염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 자체를 부정한다.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이 대거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지만, 실제로 발굴 작업에 관련된 사람 1천5백여명 가운데 10년 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에 불과하다. 파라오의 무덤을 최초로 개봉한 당사자인 카터는 18년을 멀쩡하게 잘 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1933년 독일의 고고학자 슈타인도르프는 그동안 신문이 발표된 21명의 죽음을 하나하나 뒤쫓았다. 그 결과 나이가 들어 죽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죽음, 또는 우연한 죽음이었다고 진상을 밝혔다.
파라오의 관에 일반적으로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라는 문구가 쓰여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관에는 이와 정반대로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라는 말이 쓰여 있다. 투탕카멘은 오히려 자신의 무덤이 후손들에 의해 영광스럽게 개봉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현재 투탕카멘의 저주에 대한 얘기는 당시 세계 각국의 언론사와 카르나본 사이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비롯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카르나본은 발굴 자금을 조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자, 영국의 한 작은 신문사를 상대로 발굴이 성공할 경우 모든 정보를 독점적으로 보도한다고 약속하고 돈을 지원받았다.
이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례가 없던 일로, 엄청난 특종을 눈앞에 놓고도 다른 신문사를 거쳐 기사를 보도할 수 있게 된 전세계 언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파라오의 저주는 이런 '악감정'을 가진 언론에 의해 과대포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설사 파라오의 저주가 있다고 해도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얼마 전 파라오의 저주가 풀렸다고 확언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고대국립박물관의 어윈 프랭크박사는 파라오 저주의 역사가 끝났다고 설명했다. 전설에 따르면 투탕카멘은 죽을 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복수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사망에 대한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프랭크 박사에 따르면 투탕카멘은 당시 권좌를 노리던 이들에게 계획적으로 살해당했다. 1968년 X선 검사에서 투탕카멘의 머리에서 작은 뼈의 일부가 발견됐다. 두개골 파열의 흔적이었다. 투탕카멘이 살해됐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해주는 것이다.